▲ 자유형 400m에서 금메달을 딴 후 시상대에 올라 미소를 짓는 박태환. 천진난만한 외모와는 달리 누구보다 강한 승부근성을 갖고 있다. AFP/연합뉴스 | ||
비인기 종목이나 다름없었던 수영에서 ‘대박’이 터지자 스포츠, 연예, 정치, 사회 모든 분야에서 박태환과 관련된 기사를 내보내고 있다. 축구 스타 박지성이 우루과이전을 마치고 출국하는 현장에서도 어김없이 박태환과 관련된 질문이 터졌고 이효리, 아이비, 심지어 여성그룹 씨야의 남규리 등 여자 연예인들과의 인터뷰 때마다 박태환이란 이름이 등장한다. 특히 아이비는 최근 자신의 노래보다 박태환과 사촌 지간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연일 매스컴에 등장했고 남규리는 박태환이 자신을 이상형으로 밝혔다며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자유형 400m 금메달에 이어 자유형 200m에서 동메달을 추가한 박태환은 아쉽게도 주종목인 자유형 1500m에서는 예선 9위를 기록해 결선 진출이 좌절됐다. 그렇지만 분명 박태환은 지난 한 주 동안 대한민국을 들썩거리게 만든 영웅임에 틀림없었다.
‘마린보이’ 박태환의 금메달 획득 상황을 현장에서 직접 지켜본 기자가 생생하게 재구성해봤다.
#금메달 획득 순간
2007 세계수영선수권 남자 자유형 400m 결승전이 시작된 지난달 25일 호주 멜버른 로드 레이버 아레나. 자신이 존경한다는 그랜트 해켓(27ㆍ호주) 등 세계 강호들과 나란히 경기장에 들어선 박태환(18ㆍ경기고)은 가슴이 뭉클했다. 12회째 접어든 세계수영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인이 결승에 오른 것은 이번이 세 번째라는 사실이 떠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이 타고난 승부사는 곧 “이 자리에 섰으니 우승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대담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는 예선 2위 자격으로 결승에서도 우승 후보들이 주로 배정받는 5번 레인에 섰다.
순간 직전 대회인 2005 몬트리올 세계선수권대회에서의 ‘아픈 추억’이 뇌리를 스쳤다. 당시 이 종목에 출전했던 박태환은 자신의 기록에 훨씬 못 미치는 성적으로 예선 탈락했다. 기자와 함께 경기장에서 그를 지켜보던 아버지 박인호 씨도 이심전심이었다. “식사 관리를 못해줘 상한 햄버거를 먹어 배탈이 났었다”며 잠시 당시의 안타까움을 회상했다.
박태환의 이름이 불렸을 때 이 왜소하고 햇빛에 그을려 까무잡잡한 피부의 동양 소년에겐 그의 부모를 비롯한 10여 명의 한국인 응원단만이 환호했다. 그러나 8번 레인의 해켓이 호명되자 경기장을 떠나갈 듯한 호주 관중들의 환호가 이어졌다. 이 환호는 3분 후 박태환의 기적 같은 역전 레이스에 놀라움의 환호로 바뀌었다. 50m를 앞두고 세계 최고의 강호 세 명을 순식간에 제쳐버린 것이다. 전광판에 그의 이름이 1위로 나타나자 박태환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다음 순간 두 손을 번쩍 들어 손가락으로 전광판을 가리키며 조용히 환호했다.
잠시 후 공동취재구역인 믹스트존에서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외국 기자들이 한국 취재진에게 “박태환의 통역을 해 줄 수 없느냐”고 요청해온 것이다. 특히 일본과 중국 기자들의 박태환 취재 열기는 뜨거웠다. 한 일본 기자는 한국 기자에게 “마츠다 다케시(일본의 자유형 중장거리 대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박태환에게 물어봐 달라”고 부탁해 왔다. 기자가 지난해 독일월드컵축구대회 취재를 갔을 때 한국 취재진들이 지네딘 지단, 티에리 앙리 등 프랑스 스타플레이어들에게 “한국 선수 중 아는 이가 있느냐”고 끈질기게 물어대던 일이 생각났다.
#세계 수영계가 놀랐다
대회 전 멜버른에 모인 각국 취재진의 최대 관심사는 ‘마이클 펠프스(22ㆍ미국)가 몇 개의 금메달을 가져갈 것인가’와 ‘그랜트 해켓(27ㆍ호주)이 남자 자유형 1500m 5연패를 달성할 것인가’에 쏠려 있었다. 박태환은 해켓과 승부를 겨룰 적수 중 한 명으로 소개됐다. 아시아 수영의 ‘맹주’ 일본은 2004년 아테네올림픽 평영 2관왕 기타지마 고스케(25)의 우승 여부에 관심이 집중돼 있었다. 2001년 후쿠오카 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던 일본은 50여 명의 취재진을 파견했고 컬러 48쪽 분량의 일본 선수단 홍보 자료집을 발간해 미디어 센터에 비치해 놓기도 했다. 자체 자료집을 발간한 나라는 일본과 미국뿐이었다. 한국 취재진은 신문과 방송을 합쳐 10명이 안 됐다. 그것도 박태환 덕분에 비약적으로 늘어난 숫자였다. 대회 전까지 분명 한국은 수영 변방이었다.
▲ 지난해 12월 도하 아시안게임에 출전해 역영하는 박태환. 연합뉴스 | ||
일본은 박태환의 선전에 부러운 눈길을 보내면서도 기타지마의 부진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믿었던 평영 100m에서 간발의 차이로 2위에 그치자 일본 취재진들은 머리를 감싸며 아쉬워했다. 일본의 수영에 대한 욕심은 대단하다. 올림픽 남자 수영에서 14개의 금메달을 따냈던 일본은 조금이라도 우승권에 근접하기 위해 국제 무대에서 별의별 방법을 다 짜내왔다. 88서울올림픽 배영에선 잠영만으로 거의 끝까지 가는 방법을 고안해 국제수영연맹(FINA)이 규정을 고치도록(잠영은 15m 이내에서만 가능) 만들었고, 공기 저항을 줄이기 위해 나체 수영을 시도해 보기도 했다. 기타지마의 발차기도 변칙이라는 의견이 적지 않다. 하지만 가장 빠른 영법인 자유형에선 2차대전 이후 금메달에 도전할 엄두를 못냈다. 슈토 마사시 스포츠니폰 기자는 “박태환은 아시아에서 육상의 류시앙(중국ㆍ남자 110m 허들 세계기록 보유자) 같은 존재다. 총 메달 수와 저변에선 한국이 일본을 따라올 수 없지만 수영에서 아시아의 얼굴은 박태환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아픔 딛고 일어선 소년
18세라는 박태환의 어린 나이를 염두에 둔 사람들은 박태환이 타고난 재능으로 승승장구해왔다고 생각하기 쉽다. 박태환이 국제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건 지난해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세계 쇼트코스수영선수권대회 자유형 400m와 1500m에서 2위로 입상한 때부터다. 그 이전 박태환은 두 번의 좌절을 겪었다. 대청중 3학년이던 2004년 한국 선수단 최연소로 아테네올림픽에 참가했던 박태환은 ‘샤워만 하고’ 돌아와야 했다. 자유형 400m에 나섰지만 부정 출발로 실격, 물살도 못 갈라보고 화장실에서 눈물을 훔쳤다. 이탈리아의 단 한 신문만이 ‘이 소년을 주목하라’며 박태환의 가능성을 점쳤을 뿐이었다. 부정 출발의 아픔 때문인지 이번 대회에서 박태환의 출발 반응 시간은 항상 1등이다. 훈련 때마다 절대 스타트 연습을 빼먹거나 대충 하지 않았다고 한다.
2005년 몬트리올 세계수영선수권대회에서도 자유형 200mㆍ400mㆍ800m에 출전했지만 컨디션 관리에 실패해 자기 기록에 훨씬 못 미치는 성적으로 모두 예선 탈락했다.
지난해 캐나다 범태평양수영선수권대회와 도하 아시안게임을 통해 한국 수영의 기린아로 거듭난 후엔 그를 둘러싼 지분 싸움으로 본의 아닌 마음 고생을 겪어야 했다. 대회 직전엔 박태환 전담 코치인 박석기 씨와 박태환 부모의 대회 출입증이 제때 발급되지 않아 이를 둘러싸고 박태환 측과 대한수영연맹 간에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대회 기간 중에도 박태환은 스피도의 관리 아래 수영연맹과 따로 움직였다. 시간이 나면 한국팀을 찾아와 동료 대표선수들과 수다를 떨기도 했지만 ‘따로 노는’ 분위기는 어쩔 수 없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지난해 12월에 끝난 2006 도하아시안게임 이후 3개월밖에 안 되는 회복과 준비 기간이었다. 실제로 박태환을 제외한 한국대표팀은 결선 진출자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고 한국 신기록 숫자도 예전보다 훨씬 줄었다. 박태환도 훈련 부족과 정신적 스트레스로 체중이 한때 10㎏ 이상 줄기도 했었다. 아버지 박인호 씨는 멜버른으로 향하는 공항에서까지도 “결과가 좋아야 할 텐데…”라며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강한 승부근성을 지닌 박태환에게 시련은 담금질일 뿐이었다. 해켓, 펠프스와의 승부, 자신이 세운 기록과의 싸움만이 그의 관심사였다. 경기를 벗어나면 동료와 장난치고 최신 음악에 열광하는 천진난만한 모습은 세계선수권대회에 와서도 여전했다. 때문에 수영 관계자들은 ‘어디에 갖다놔도, 누가 가르쳐도 성공할 선수’라며 박태환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카밀로 카메티 국제수영연맹(FINA) 언론분과 위원장은 “아시아, 한국에서 보석 같은 존재가 나왔다. 박태환이 다른 외부 요인에 의해 휩쓸리지 않고 발전할 수 있도록 보살피는 것이 한국 수영계에 남겨진 과제”라고 말했다.
이충형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