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승연 한화 회장이 끝내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됐다. 지난 11일 영장실질심사를 받으러 법원에 들어서는 김 회장.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술집에서 얻어맞은 아들에 대한 보복 폭행 혐의로 영장실질 심사를 받은 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한 말이다. 김 회장은 결국 지난 12일 새벽 남대문경찰서 유치장에 구속수감됐다.
김 회장 아들도 술집 종업원에게 얻어맞아 11바늘을 꿰매는 등 피해자임이 분명하지만 ‘아버지’인 김 회장은 법 절차에 따른 처벌보다는 사적인 보복 폭행을 택하고 재력을 이용해 조직폭력배를 동원했다는 의혹이 이는 등 ‘소악’을 ‘거악’으로 제압하려 했다고 해서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김승연 회장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는 “제가 일시적인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일을 크게 벌어지게 한 것에 대해 전부 수양이 부족하고 부덕해 일어났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욱하는 성미’를 다스리지 못했다는 얘기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보복폭행 사건으로 김승연 회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김승연 회장은 재벌 2세 회장 중에도 특이한 케이스다. 어린 나이에 재벌그룹을 물려받아 수성에 성공하고 더 나아가 그룹의 몸집을 불리는 데 성공했다는 점도 특이하고 잦은 구설수에 올랐다는 점도 특이하다.
먼저 그의 경영 실적.
그는 지난 81년 7월 부친인 김종희 회장이 59세의 나이에 별세하자 29세의 나이에 회장직에 올랐다. 5공, 6공이라는 정치적인 격변기에 회장 자리에 오른 그는 취임 이듬해인 82년 한양화학 인수, 85년 정아그룹(명성콘도, 현 한화국토개발) 인수, 86년 한양유통(현 한화유통) 인수 등 굵직굵직한 인수합병을 통해 기업을 키워나갔다. 29세의 젊은 총수가 질풍노도 같았던 5~6공 시절 현상유지를 뛰어넘어 어떻게 이런 성과를 거뒀을까.
이는 그의 가족사를 보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77년 말부터 경영에 참여한 김 회장은 부친 사망 뒤인 82년 당시 5공 시절 실력자인 서정화 전 의원의 딸인 영민 씨와 결혼했다. 중매자는 유력자의 부인으로 알려져 있다. 서정화 씨는 5공에서 중앙정보부 차장을 지내고 내무장관을 지내는 등 전두환 전 대통령의 신임을 받던 인물이었다.
한화의 출발은 한국화약이란 군납업체였다. 군사정권에서 군납업체가 크기 위해선 실권자와 교분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 김종희 창업주는 3공의 인맥과 교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승연 회장의 누나는 3공의 실력자였던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차남인 동훈 씨와 결혼했다. 천안 출신인 김종희 회장이 3공의 충청 인맥에다 이런 혈연으로 묶인 인맥이 한화의 성장에 병풍을 쳐준 셈이다.
재계에선 5공 초기에 결혼한 김승연 회장의 혼맥이 나이 어린 재계총수에게 몰아쳤을 수도 있는 외풍을 5~6공 내내 막아주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혹자는 외풍을 막아주는 것을 넘어서서 기댈 언덕이 됐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김 회장이 5공 시절 전 전 대통령의 총애를 받았었고 결혼 뒤 당시 부동산 재벌이었던 명성그룹과 한양유통을 인수했기 때문이다. 당시 인수했던 명성그룹의 부동산에는 요즘 각광받는 완도와 해남 등 한려수도 일대의 섬 등 알짜 부동산이 대거 들어있었다.
5~6공 내내 김 회장이 정권과 호의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6공 후반에 터진 스캔들에서도 역설적으로 증명됐다. 6공 말기에 여권 실력자 A 씨와 관련된 각종 스캔들에 김 회장의 이름이 언급됐던 것. 이와 관련해 다른 연루자가 모 월간지에 ‘울고불고’하는 인터뷰를 했던 것은 당시 정·재계에서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었다.
이런 5~6공 실력자들과의 친분은 80년대 내내 김 회장에게 힘이 됐지만 시절이 달라지자 그게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93년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출범하자마자 김 회장에게 시련이 시작됐다. 김 회장과 가까웠던 6공의 실력자들이 정치적으로 완전히 몰락했고 김 회장 자신도 외화를 밀반출해 미국 LA에 470만 달러짜리 호화주택을 사들였다는 혐의로 57일간 구속됐다. 이는 10대그룹 회장 중 최초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후 5년간은 김 회장에게 자숙의 기간이었지만 DJ 정부의 등장은 그에게 또다른 터닝 포인트가 돼줬다.
외환 위기 직후 구조조정을 통해 위기를 수습한 그는 다시 인수합병 대열에 나선다. 2000년 DJ 정부의 벤처 지원에 적극 발맞춰 한화기술금융을 세우고 대덕에 테크노밸리를 세우는 등 벤처지원책에 적극 나서는가 하면 제1회 세계불꽃축제를 개최하기도 하며 한화는 정부와의 관계에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2002년 김승연 회장이 직접 입찰의향서를 금감원에 제출하는 등 공을 들였던 대한생명을 인수해 방산업체였던 한화그룹이 그의 취임 20년 만에 제조 건설, 금융, 서비스 레저를 세 축으로 하는 명실상부한 대그룹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 지난 1996년 그리스 대 훈장을 받은 김승연 회장. 김 회장은 현재 그리스 명예총영사이기도 하다. | ||
하지만 김 회장의 캐릭터는 그를 둘러싸고 정재계에 퍼져나갔던 스캔들만큼이나 다양하고 종잡을 수 없다는 게 중평이다.
그의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되는 사진을 보면 그는 취임 초기부터 기름을 발라 머리를 뒤로 넘긴 올백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다. 20대 후반의 총수가 중년의 나이에서나 시도하는 올백 스타일로 나타나자 ‘특이하다’는 평이 대다수였다. 일각에선 이를 그가 젊은시절부터 나이든 각계 정상급 책임자를 상대하다 보니 일부러 나이들어 보이는 스타일을 고른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그가 ‘형식’에 집중한다는 얘기를 듣기도 한다. ‘철저한 상명하복 질서에 대한 존중’이나 ‘신의’, ‘의리’를 강조하는 캐릭터가 그런 예라는 것이다. 한화에서 영입한 관료 출신 임원이 김 회장 앞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가 사표를 썼다는 얘기부터 외국 조폭영화에서나 봄직한 수십 명의 사설 경호원을 움직일 때마다 동원한다는 일화는 김 회장이 형식에 엄격했다는 반증으로 들리고 있다.
반면 그가 다정다감한 감수성의 소유자라는 얘기도 있다.
한화 이글스 구단의 야구선수 부인이 아프자 치료를 주선했다거나 회사 내 불우이웃돕기 행사에 참여해 100리길을 직접 걷는 모금행사에 참여하고, 친분 있던 계열사 직원이 죽자 빈소를 찾아가 목놓아 울었다는 일화, 구조조정 과정에서 계열사를 매각할 때 ‘고용 승계’ 조건을 관철시킨 일화는 그가 ‘의리’와 ‘신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일화들이다. 그가 부친이 하던 그리스 명예 총영사를 대를 이어 수행해 그리스로부터 대훈장을 받았고 모친이 독실한 성공회 신도로 활동하자 그 인연을 받들어 성공회대 재단 이사장(1997~2003)으로 활동하며 성공회대에 재정적인 지원을 했던 일도 그런 맥락에서 받아들여진다.
김 회장은 최근 들어 유엔 한국협회 회장, 한미교류협회 회장 등 재계 활동을 넘어선 민간외교 활동으로 행동 반경을 넓혀왔다. 최근에는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선임에 관심을 보인다는 얘기도 나돌았다.
하지만 이번 사건으로 그의 대외적인 활동은 일단 중단될 것으로 보인다. 법도 법이지만 법보다 무섭다는 ‘여론법’이 50대 후반의 이 재벌총수에게 “일시적인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일을 크게 벌린” 뒷감당을 해내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약력
1952년 충남 천안 출생
1970년 경기고 졸업
1974년 미국 멘로대 경영학과 졸업
1976년 미국 드폴대 대학원 국제정치학 석사
1981년 한국화약그룹 회장 취임
1982년 세계아마복싱연맹 수석부회장, 아시아지역 회장
2006년 유엔한국협회 회장
2007년 그리스 명예 총영사
상훈
1986 체육훈장 청룡장
1995 금탑산업훈장
1996 그리스 대훈장
1998 대한적십자사 유공장
김진령 기자 kj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