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일 경선룰 중재안을 내놓고 긴급 기자회견을 연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 친박인사였던 그는 최근 친이로 돌아섰다는 시선을 받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강 대표의 경선 중재안 파문으로 분당 위기까지 치달았던 한나라당은 15일 상임전국위에서 합의안이 통과되면서 본격적인 경선 국면으로 돌입했다. 한나라당은 이날 이 전 시장과 박 전 대표가 합의한 8월 21일 이전, 23만 1652명 선거인단, 전국 동시투표를 통한 후보 선출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한 당헌·당규 개정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강 대표는 16일 국회에서 열린 비공개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오는 21일 열릴 전국위원회에서 경선에 필요한 당헌·당규 개정안을 통과시킨 뒤 곧바로 경선관리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며 경선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강 대표는 또 당직개편 등 당 쇄신안 카드로 분위기 반전을 꾀하는 동시에 중재안 파문으로 위축됐던 위상을 되찾겠다는 각오를 다지기도 했다.
하지만 강 대표의 이러한 의지와 각오는 오래가지 못하고 곧 암초에 부딪혔다. 17일 단행한 당직 개편 후폭풍으로 지도부 간 불협화음이 표출되는 등 당내 갈등이 증폭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략과 홍보 파트 본부장 2명과 사무부총장 2명을 교체했을 뿐 대부분 유임시킨 당직개편을 두고 당내 중립성향 의원들과 소장파 의원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 의원들은 강 대표가 말로는 당 쇄신을 주장하면서도 이 전 시장과 박 전 대표의 눈치 살피기에 급급하고 있다고 성토하고 있다. 특히 4·25 재보선 참패에 따른 책임론이 거론됐던 황우여 사무총장과 자신과 함께 경선 중재안을 주도해 파문을 야기한 장본인으로 지목된 박재완 대표 비서실장을 유임시킨 것과 관련해서는 ‘한마디로 코미디’라는 혹평이 쏟아지고 있다.
중립성향 소장파인 정문헌 의원은 “당 개혁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 인사”라고 비판했고 권영세 최고위원과 대변인직에서 물러나 홍보기획 부본부장에 임명된 유기준 의원은 각각 사퇴와 부본부장직 고사 의사를 밝히고 있어 당 쇄신을 둘러싼 당내 갈등이 확전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후보검증 문제와 경선 세부 규정을 놓고 또다시 대혈투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이는 이 전 시장과 박 전 대표 사이에서 강 대표가 어떤 스탠스를 취할지 여부도 초미의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다. 경선 중재안 파문이 말해주듯이 강 대표의 결단은 박빙의 승부를 펼치고 있는 당내 경선구도에 결정적 변수로 작용할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다. 강 대표는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고 중립적인 판단을 할 것이란 입장을 견지하고 있지만 민감한 사안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양측 모두를 만족시킨다는 게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 지난 4일 박근혜 이명박 두 대선 예비주자와 만난 강재섭 대표(가운데). 경선룰 중재안을 양측이 받아들이긴 했지만 이들 빅2에게 휘둘리는 강 대표의 자리는 여전히 위태위태하다. | ||
김기춘 의원은 “시골에서 면단위의 수협, 농협 조합장을 선출할 때도 매표 등 후유증이 발생한다. 개정안에 따르면 시군구까지 투표소를 확대한다고 하는데 자칫 부정부패의 온상이 될 수도 있는데 이에 대한 대책이 있느냐”고 따져 물었고, 김무성 의원은 강 대표가 논의 중간에 자리를 비운 것을 문제 삼아 “강 대표는 논의 도중 배석도 하지 않았으면서 회의를 주도하려고 하느냐”며 감정적으로 추궁하기도 했다.
박 전 대표 진영에서는 당 안팎에서 나돌고 있는 ‘이명박-강재섭 밀약설’에 대한 경계심도 늦추지 않고 있는 분위기다. 강 대표는 지난해 7·11 전당대회에서 박 전 대표의 물밑 지원을 등에 업고 이 전 시장의 지원을 받은 이재오 최고위원을 누르고 당 대표에 당선된 바 있다. 강 대표가 박 전 대표 사람으로 분류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박 전 대표 진영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꼴’이라며 강 대표의 입장 변화 배경에는 뭔가 말 못할 밀약이나 노림수가 내포돼 있을 것이란 의혹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박 전 대표 캠프의 한 관계자는 “강 대표가 3자회동(5월4일) 전날 이 전 시장 캠프의 좌장격인 이재오 최고위원과 비밀회동을 갖는 등 뭔가 석연찮은 낌새가 있었다”며 “강 대표의 정치 성향에 비춰 볼 때 그가 이 전 시장 측과 모종의 거래를 했을 것이란 의혹을 지울 수가 없다”고 전했다.
강 대표는 밀약설과 관련해 “대꾸할 가치도 없다”며 강하게 부인하고 있지만 후보검증 문제등 경선 2라운드에 접어든 국면에서 박 전 대표 측은 강 대표에 대한 불신감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는 분위기다.
강 대표는 17일 최고위원회의에서 “검증 문제는 당에 통째로 맡겨주기 바란다”며 가열될 조짐이 일고 있는 이 전 시장 측과 박 전 대표 측의 후보검증 공방전을 제어하고 나섰다. 그는 이날 “후보 검증을 철저히 해서 건강한 후보를 내야겠다는 당의 입장엔 변함이 없지만 인신 공격성 음해에도 강력 대처할 것”이라며 “후보 측에서 검증위원 인선 문제까지 시비 걸고 근거 없는 인신 비방을 하고 검증을 빙자해 네거티브 공세를 펴는 것은 자제해 달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강 대표의 이 같은 발언은 ‘철저한 후보검증’을 요구하고 있는 박 전 대표 측을 압박하는 동시에 ‘검증은 당에 맡기자’는 이 전 시장 측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듯한 뉘앙스가 담겨져 있어 또다른 논란을 부추기고 있다. 실제로 17일 전남 순천 지역 방문 도중에 후보검증 문제와 관련한 강 대표의 입장을 전해들은 박 전 대표는 “누구나 예외 없이 원론적으로 검증이 필요하다고 하는 게 왜 네거티브냐”며 강 대표를 겨냥했다.
경선 중재안 파문이 극적으로 타결돼 분당 위기를 모면하긴 했지만 후보검증을 둘러싼 이 전 시장과 박 전 대표의 2차 대전은 이미 시작이 됐고 선거인단구성과 여론조사방식 등 세부 경선 규정을 확정짓는 과정에서도 서바이벌 게임을 방불케 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이처럼 이 전 시장과 박 전 대표 진영의 ‘죽기 아니면 살기 식’의 경선 대혈투가 예고되고 있는 가운데 강 대표를 주축으로 한 당 지도부가 공정하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성공적으로 경선을 마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불투명한 상황이다. 특히 경선 중재안 파문을 야기한 강 대표에 대한 박 전 대표 측의 불신이 증폭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강 대표가 중도에 하차할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강 대표와 당 지도부는 현행 선거법상 일단 당 경선후보로 등록하면 탈당해서 무소속이나 다른 정당의 대선 후보로 나설 수 없다는 규정을 최대한 활용해 빠른 시기에 대선후보등록을 마무리한다는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후보등록이 마무리되면 ‘빅2’의 탈당 가능성 및 분당 우려를 말끔히 해소할 수 있고 지도부가 경선을 주도할 수 있을 것이란 판단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정계은퇴라는 최후의 배수진 카드로 분당 위기를 넘긴 강 대표가 당내 갈등을 봉합하고 총성 없는 전쟁 모드로 돌입한 이 전 시장과 박 전 대표 사이에서 해결사 역할을 할지 아니면 또다른 논란을 부추겨 정치생명이 위태롭게 될지 산적한 암초를 헤쳐나가야 하는 강재섭호의 미래가 그리 밝아 보이지는 않아 보인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