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제16대 대통령에 취임한 로드리고 두테르테의 폭력 정치에 필리핀 전체가 공포에 떨고 있다. 최근 독일 시사주간 <슈테른>은 ‘마닐라의 밤’이라는 르포 기사를 통해 수도인 마닐라에서 매일 밤 벌어지고 있는 무차별 살인 현장에 대해 보도했다. 물론 처음 취지는 좋았다. 두테르테는 취임 직후 “6개월 안에 강력범죄를 모두 뿌리 뽑겠다”고 선포했고, 그 가운데 가장 먼저 ‘마약과의 전쟁’을 실시하겠노라고 밝혔다. 마약 거래상과 마약 중독자들이야말로 필리핀을 좀먹는 가장 악질의 범죄자라는 판단에서였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취임된 후 3600명이 넘는 마약 용의자가 사살됐다. 연합뉴스
지금까지 필리핀은 아름다운 섬들로 이뤄진 휴양지로 유명했다. 그것도 아니면 그저 무서운 태풍이나 아시아의 가톨릭 국가 내지는 미국의 가까운 우방 정도로만 알려져 왔었다.
하지만 지난 7월, 두테르테가 취임하면서 이런 이미지는 백팔십도 달라졌다. 이제 필리핀은 더 이상 휴양지가 아닌 공포정치와 대학살이 벌어지고 있는 지구상에서 가장 폭력적인 나라 가운데 하나가 됐다. 두테르테는 선거 운동 때부터 강력한 ‘마약 및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했었다.
그리고 여기에 수위 조절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막말을 더하면서 앞으로의 공포정치를 예고했다. 가령 “범죄자 10만 명을 처형한 후 마닐라만에 던져서 물고기의 살을 찌울 테다”라고 호언했는가 하면, “만일 여러분들이 권총을 소지하고 있다면 그들을 직접 쏴죽이십시오. 제가 지원하겠습니다”라고 공개적으로 살인을 부추기기도 했다. 또는 “제가 대통령이 되면 장례 사업을 해보십시오. 아마 장례식장이 가득 찰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시체를 제공하겠습니다”라는 끔찍한 약속을 하기도 했었다.
가난과 무능한 정부, 그리고 부패한 관리들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던 필리핀의 유권자들은 이런 저돌적인 두테르테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냈고, 결국 그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유권자들은 두테르테가 보낸 간결한 메시지, 즉 “제가 여러분들을 강하게 만들어주겠습니다” “부패와 맞서 싸우겠습니다”라는 약속을 믿었다.
이런 믿음에 보답하듯 두테르테는 공약을 충실히 수행했다. 당선 한 달 만에 강력 범죄(살인, 성폭행, 절도 등)의 발생 건수가 31%가량 줄어들었는가 하면,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진 마약 용의자는 4개월 만에 3600여 명에 달했다. 그리고 <슈테른>은 아직도 매일 약 40명의 용의자들이 거리에서 사살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심지어 아예 겁을 먹고 자수하는 사람들도 증가하고 있다. 미성년자 마약범들의 경우 7~8월 두달 만에 2만 명이 자수했는가 하면, 이밖에도 70만 명이 경찰에 자수를 해왔다.
하지만 이런 유혈정치가 4개월 넘게 끝을 보이지 않자 필리핀 사람들 가운데는 점차 피곤함을 호소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사살 현장을 카메라에 담는 사진사로 일하고 있는 노엘 셀리스 역시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다. 결혼식 사진기사로 일하다가 현재 정부에 의해 고용돼 피바다 현장을 기록하고 있는 그는 “두테르테의 명성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과격할 줄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도무지 끝이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첫 번째 사진 촬영을 하던 날 밤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새벽 3시가 조금 안 된 시각, 파라냐케에서 총에 맞아 숨진 남녀 한 명이 길바닥에서 시체로 발견됐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즉시 현장으로 달려간 그는 시체 대신 피바다가 된 보도블록의 현장만 목격할 수 있었다. 시체를 현장에서 치운 경찰은 “시체 옆에서 마약의 일종인 ‘크리스탈 메스’가 들어있는 자그마한 봉지 하나가 발견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시체는 양손이 밧줄로 묶여 있었으며, 총을 쏜 사람은 이미 도주한 상태기 때문에 누가 범인인지 알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런가하면 셀리스는 몇 주 전에는 한 인력거꾼의 시체를 촬영하기도 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던 복면 괴한의 총에 맞아 숨진 인력거꾼 옆에는 그들이 던지고 간 “나는 마약 거래상이다”라고 적힌 마분지 팻말이 놓여 있었다. 남편의 시체를 부둥켜 안고 울부짖는 인력거꾼의 아내의 모습이 담긴 이 사진은 전세계로 퍼져 나갔으며, 곧 국제사회에 두테르테의 잔혹함을 알리는 상징이 됐다. 하지만 이에 대해 두테르테는 “너무 신파적인 사진이다”라고 잘라 말하면서 냉정한 모습을 보였다.
두테르테의 비호를 받고 있는 필리핀 경찰은 마약범으로 의심되면 사법절차 없이 현장에서 즉시 용의자를 사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뉴스
<슈테른>은 두테르테가 실시하고 있는 공포정치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묻지마식 살인’에 있다고 말했다. 실제 두테르테의 비호를 받고 있는 필리핀 경찰이나 자경단은 사법절차 없이 일단 마약범으로 의심되면 현장에서 즉시 용의자를 사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 제3의 암살단이 있다는 소문도 심각하긴 마찬가지다. 마약 관련 용의자 사살을 전문으로 하는 ‘비밀 암살단’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비밀리에 용의자를 사살한 후 몰래 시체를 버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보통 오토바이를 탄 채 두세 명이 짝을 이뤄 다닌다. 또한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늘 무기를 소지하고 다니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들이 정부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확실히 알려지지 않은 상태. 정부는 킬러들과의 연관성을 부정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말을 믿지 않고 있다. 오히려 경찰이 킬러들의 살인 방법을 흉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양쪽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다. 필리핀 경찰 역시 킬러들처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먼저 쏜 다음 묻는 식으로 무차별적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슈테른>은 킬러들이 치안당국으로부터 돈을 받고 일을 한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결국에는 경찰도 공범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식의 처형이 인권침해라는 비난에도 두테르테는 눈하나 깜빡이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오히려 그는 “필리핀에서는 다른 무엇보다 마약범 근절이 우선이다. 국제사회는 필리핀의 내정에 개입하지 말라”고 호통치고 있다. 심지어 필리핀의 인권유린 문제를 언급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향해서는 “도대체 오바마가 누구냐? 그가 감히 내 앞에서 인권문제를 말한다면 그를 개XX라고 욕해주겠다”라는 막말을 서슴지 않았다.
이렇게 묻지마식 살인이 끊이지 않으면서 억울하게 피해를 보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슈테른>은 못배운 노동자, 인력거꾼, 노점상인, 노숙자 등 마약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들까지 희생되고 있다고 말하면서 문제를 제기했다. 이들이 지난 5월 선거에서 두테르테에게 표를 던졌던 유권자들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도 말했다.
한때 마약을 복용했지만 이후 완전히 손을 뗀 롬멜과 롤랜도 렐리스 형제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빈민가인 파코에서 거주하는 형제는 어느 날 인근 도시로 일을 떠났다가 연락이 두절된 후 갑자기 시체로 발견됐다. 경찰은 무기와 마약을 소지한 형제를 총격전 끝에 사살했다고 말했지만, 아내인 엘라 구에바라는 이 말을 믿지 못하고 있다. 남편의 시신은 이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개골에는 무언가에 맞은 흔적이 역력했으며, 손가락은 부러져 있었고, 얼굴에는 시퍼런 멍이 가득했다. 이는 분명 고문을 당한 흔적이었으며, 이마와 관자놀이에는 마치 처형을 당한 것처럼 총을 맞은 자국이 있었다. 현재 구에바라는 남편의 결백을 믿고 있지만 경찰에 신고할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지역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미 경찰 역시 공범이란 소문이 파다하기 때문이다.
희생자들 가운데는 심지어 다섯 살 소녀도 있었다. 다구판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고 있었던 다니카는 갑자기 오토바이를 타고 집안에 들이닥친 두 명의 괴한이 쏜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숨졌다.
지금까지 이런 현장을 수없이 목격했던 셀리스는 이제 냉소적이 됐다. 그는 “시체 옆에서 셀카를 찍는 기자들도 있다. 사람들이 비열해졌다”라고 말했다.
이런 불만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두테르테는 최근 ‘마약과의 전쟁’을 필리핀 전역으로 확대 적용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그런 가운데 얼마 전에는 자신이 벌이는 ‘마약과의 전쟁’을 유대인 대학살인 홀로코스트에 비유해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히틀러는 3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필리핀에는 300만 명의 마약 중독자가 있다. 그들을 전부 학살하겠다”라고 선언했던 것.
<슈테른>은 두테르테가 벌이고 있는 ‘마약과의 전쟁’에 대해 의구심을 표시하면서 필리핀의 마약 중독자들은 이미 2004년부터 2012년까지 80%가량 급감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슈테른>은 필리핀에서 마약보다 더 다급한 문제는 사실 따로 있다고 말했다. 바로 지독한 가난과 빈부격차, 부족한 인프라 시설, 이웃나라 중국과의 영토 분쟁 등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이 선거 운동 때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점이 이상하다고 지적한 <슈테른>은 앞으로 두테르테가 과연 이런 문제에도 주목할지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