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촬영현장에서 이창동 감독과 전도연. 사진제공=래핑보아 | ||
문화관광부 장관직을 맡으며 잠시 영화계를 떠나 있던 그가 4년여 만에 내놓은 신작 <밀양>을 들고 위기의 영화계에 등판한 것. 게다가 칸 국제 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이라는 낭보까지 결정구로 장착했다.
지난 81년 이창동 감독은 평범한 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예술가로서의 첫걸음은 글쓰기였다. 그가 쓴 소설 <전리>가 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등단한 뒤 이상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한국 문학계의 기대주로 떠오른다. 영화계에 첫발을 들여놓은 것은 그가 박광수 감독의 영화 <그 섬에 가고 싶다>의 시나리오를 쓰며 조감독을 맡게 된 93년이다. 당시 나이 마흔.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시나리오 작가 및 조감독으로 다시 한 번 박 감독과 작업한 그는 96년 명계남 문성근 여균동 등과 함께 이스트필름을 설립해 본격적인 감독 입봉 준비에 돌입한다.
영화 <초록물고기>로 감독 입봉한 이창동은 단번에 한국 영화계 선발 투수진에 이름을 올렸다. 주연 문성근 감독 이창동 제작 명계남, 이들 삼인방이 힘을 모은 영화 <초록물고기>가 그해 각종 영화제에서 작품상 부문을 휩쓴 것.
이 감독의 저력은 영화 외적인 부분에서도 두드러졌다. 98~99년 영화계의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 과정에서 영화계 최고의 브레인으로 대두된 것. 당시 스크린쿼터 문화연대 이사장이던 문성근을 중심으로 명계남이 일선에서 투쟁을 주도했다면 이 감독은 정책통으로 활동했다.
결국 99년 정부가 스크린쿼터 축소 방침을 철회하면서 영화계의 전면 투쟁이 승리로 마무리된 뒤 이 감독은 다시 메가폰을 잡았다. 그렇게 탄생한 영화가 <박하사탕>이다. 무명 배우이던 설경구를 발굴해낸 영화 <박하사탕>은 역시나 각종 영화제 주요 부문 수상이라는 성과로 연결됐고 급속도로 확대되던 한국 영화계에 무게감을 실어준 작품으로도 인정받았다.
2002년 비로소 그는 해외 무대에서도 검증된 선발 투수로 발돋움하게 된다. 문소리라는 숨은 진주를 찾아내 만든 영화 <오아시스>로 베니스 국제 영화제 감독상과 신인 배우상을 동시 석권한 것. 게다가 같은 해 스크린쿼터 비상대책위 정책위원장까지 맡아 작품은 물론 영화계 현실에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한국 영화의 전성기를 선도했다.
그의 2002년 행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98~99년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 당시 가까워진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에 출마하자 문성근 명계남 등과 함께 ‘노사모’ 핵심 회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 이는 이 감독의 참여정부 초대 문화관광부 장관 취임으로 연결됐다.
영화계는 일제히 환영의 목소리를 냈다.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에 큰 도움을 준 정치인이 대통령이 됐고 일선에서 투쟁을 주도했던 이 감독이 문화관광부 장관이 된 만큼 적어도 이번 정부와는 스크린쿼터를 두고 대립할 일은 없을 것이라 기대한 것. 그런데 2003년 6월 한미 투자보장협정(BIT) 체결이 화두가 되자 노 대통령이 스크린쿼터 축소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이에 문화관광부 장관이던 이 감독이 강하게 반발해 이정우 정책실장과 대립하는 분위기까지 연출됐다.
▲ 5월 29일 칸에서 귀국한 뒤 기자회견을 연 이창동 감독. 사진=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은 한미 FTA 체결 협정이 시작된 2006년 초에 다시 시작됐다. 결국 스크린쿼터는 기존의 절반인 73일로 축소됐다. 이는 한국 영화 시장 점유율이 점차 하락하기 시작해 오늘날의 심각한 영화계 위기로 연결됐다.
이 과정에서 이 감독은 침묵했다. 이는 문성근 명계남 등도 마찬가지. 98~99년 당시 투쟁의 핵심 인사들이 현 정부와의 특수 관계로 인해 투쟁 일선을 떠난 것. 특히 당시 투쟁의 정책 전반을 담당했던 이 감독이 문화관광부 장관 재임 시절 스크린쿼터 축소 입장을 보인 뒤 침묵을 시작했다는 게 영화인들에겐 상당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98~99년 투쟁 당시와 마찬가지로 이번 투쟁에서도 일선을 지키고 있는 이춘연 영화인회의 이사장은 “98~99년 맹활약한 그들에게 영화계가 빚을 진 게 사실”이라며 “모두 영화계로 돌아왔지만 지금의 상황을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그들이 더 괴로울 것”이라고 얘기했다.
반면 현장의 목소리는 강한 비판의 어조가 더 많았다. 스크린쿼터 축소가 이뤄진 2006년 7월 영화계 투쟁 일선에서 만난 영화인들 가운데 “98~99년 당시 그들이 보인 활약을 스크린쿼터 사수를 위해서가 아닌 정치 지향적인 인물들이 그들의 성향을 드러낸 것일 뿐”이라고 평가 절하하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다시 이 감독이 정치판을 버리고 영화를 들고 영화계로 돌아왔다. 한국 영화계가 반전의 기회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불러 모으고 있는 <밀양>이 바로 이 감독의 영화계 컴백작이다. 2006년 영화계의 스크린쿼터 사수투쟁 당시 이춘연 이사장이 “이 감독도 요즘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했으니 다시 영화인으로 돌아온 것”이라 얘기했었는데 당시 쓰인 시나리오가 바로 <밀양>이다.
여전히 영화계의 이 감독에 대한 시선은 갈라지고 있다. 한국 영화의 우수성을 입증한 데 대한 찬사와 <밀양>을 계기로 관객들의 발길을 한국 영화로 돌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의 눈길도 있지만 스크린쿼터 축소 과정에서 보인 이 감독의 행보를 두고 여전히 비판어린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 이들도 있다.
5월 30일 열린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기념 기자회견이 끝난 직후 주차장 앞에서 이 감독을 따로 만났다. 이 감독에게 다가간 기자는 스크린쿼터 축소가 오늘날 영화계 위기에 미친 영향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이 감독은 “그 얘기를 언제 다 하냐? 다음 기회에 얘기하자”고 대답했다. “얘기가 너무 길어서 그러느냐”고 묻는 기자에게 이 감독은 “그렇기도 하지만 지금은 그 얘기를 할 때가 아닌 거 같다. 언젠가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만 말할 뿐이다.
절반의 지지와 비난의 우려 속에 위기의 한국 영화계 구원투수로 등판한 이창동. 그는 오늘날 영화계가 처한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는 방법으로 좀 더 도전적이고 모험적이며 실험적인 영화 제작을 제시했다. 어쩌면 이제 그가 다시 영화계 현실 문제에 직접 관여하는 모습은 이제 보기 힘들지도 모른다. 대신 자신이 말한 대로 좀 더 도전적이고 모험적인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서의 역할만큼은 충실히 소화해줄 것이라 기대한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