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 ||
삼성 라이온즈의 양준혁과 기자가 처음 만난 것은 지난 2002년 1월이었다. 자유계약선수(FA)가 된 뒤 삼성으로 갓 이적한 양준혁은 당시 보건복지부 산하 중앙아동학대예방센터의 홍보대사로 선정돼 과천 정부종합청사에서 보건복지부장관으로부터 위촉패를 받았다. 그 자리에서 양준혁은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라며 삼성 담당이었던 기자에게 악수를 건넸다.당시 ‘대스타치곤 상당히 털털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지난 5년간 야구장에서 양준혁을 대하면서 그 때 첫인상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양신(梁神)’으로 추앙받기도 하지만 분명 ‘옆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다.
양준혁이 한국프로야구 최초로 개인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 쏟아지는 인터뷰 요청 속에 모 언론에서 “한국 야구의 신화가 됐는데?”라는 질문이 나오자 양준혁은 “제발, 쫌! 신화는 무슨, 나 아직도 현역 선수거든요”라며 정색을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거리감 있는 스타플레이어가 되기보다는 팬 곁에 있는 친구로 남고 싶다는 평소 바람이 묻어난 대답이기도 했다. 양준혁과의 인터뷰는 항상 즐겁다. 솔직한 얘기가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2000안타 달성 순간에 누가 가장 먼저 떠올랐는가.
▲음~ 없었다. 딱 한 사람이 머리에 그려지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스쳐 지나갔다.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이다. 98년 말에 삼성에서 해태로 트레이드됐던 일, 99년에 선수협 사건 이후 각 구단 고위층으로부터 기피 선수로 낙인찍혔던 일, 2002년에 처음으로 2할대로 타율이 떨어졌을 때도 생각났고, 2005년 부진해서 은퇴 어쩌구 하는 얘기가 들려올 때에도 서글펐다.
―2000안타를 치고 1루에서 잠시 눈물이 고이는 걸 봤는데 진짜 울었나.
▲(한참 생각하더니) 참나, 나 몰라 몰라 몰라. 2002년에 한국시리즈에서 처음 우승했을 때 많이 울었는데 이번엔…. 몰라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갑시다.
―2000안타 가운데 몇 개 정도가 기억나는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10개 정도는 기억할 것 같은데 당장은 떠오르지 않는다. 물론 프로 데뷔 후 첫 안타는 14년이 지났지만 또렷하게 기억난다(양준혁은 93년 4월 10일 대구 쌍방울전에서 동갑내기 잠수함투수 임창식으로부터 프로 1호 안타를 뽑아냈다).
―안타를 치고 1루 베이스를 밟을 때마다 어떤 생각이 드는가.
▲매번 이 나이에도 현역으로 계속 활약하고 있다는 걸 몸으로 확인하는 순간이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든 다음 베이스로 가야할 텐데 하는 생각뿐이다.
―다시 태어난다면 또다시 야구 선수가 되고 싶은가.
▲나는 야구를 떠나서 살 수 없을 것 같다. 양준혁이란 사람에게서 야구를 빼면 그건 시체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야구 선수가 되고 싶다. 혹시 모르겠다. 그때에는 투수를 하고 있을지(웃음).
―야구 외에 좋아하는 스포츠가 있는가. 좋아한다면 그 이유도 말해 달라.
▲배구와 탁구가 좋다. 좋아하는 이유는 야구 말고 그나마 그 종목을 제일 잘 하기 때문이다. 배구는 영남대 재학 때 가끔 즐겼다. 탁구는 지금도 자주 치는데 파트너는 왼손투수 전병호다. 어지간한 사람들이 탁구로 나를 이기기는 힘들 것이다.
▲ 지난 9일 양준혁의 2000 안타 순간. 평생 잊지못할 짜릿한 신화가 달성되었다. | ||
▲사람 운명이라는 게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과거에 나는 ‘파란 피가 흐른다’는 얘기를 했었고 그 믿음에 변함이 없다. 나이를 속일 수 없고 사람 일은 모른다는데 일단 힘 닿는 데까지 (현역으로) 야구를 하고 싶다. 그리고 그 마지막 순간에 삼성에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삼성 외에 현재 가장 좋아하는 팀은 어디인가. 이유가 있다면.
▲두산 베어스를 좋아한다. 김경문 감독님이 팀을 이상적으로 끌어가고 계신 것 같다. 두산이라는 팀 자체보다 그 선수들의 플레이가 마음에 든다. 물론 김경문 감독님이 만드셨겠지만 선수들이 하고자 하는 의욕이 보이고 뭔가 야구를 알고 하는 느낌이 든다. 가장 싫어하는 팀도 대라고요? 그건 특별히 없다. (잠시 머뭇거린 뒤) 있어도 말 못하는 거 알면서 왜 그래? (웃음)
―항상 운동장에서 뛰기만 하는데 만약 관중석에서 야구를 보는 입장이라면 어떤 위치에서 즐기는 게 좋겠는가.
▲단연 내야 응원단석 근처다. 치어리더 때문이냐고?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함께 응원하는 사람들과 호흡을 맞추며 야구를 본다는 게 재미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내야석은 야구를 옆에서 보기 때문에 야구 자체의 스피드를 즐길 수 있는 위치이기도 하다. 그래서 내야 응원단석 근처를 적극 추천한다.
―항상 최고 타자로 박수를 받지만 원정 구장에선 욕도 듣고 곤욕을 치렀던 일도 있을 것 같은데.
▲당연하지^^. 라면 국물 뒤집어쓴 일도 있었다. 90년대 초·중반이었는데 그때 삼성이 광주구장에 갔을 때 분위기가 살벌했다. 더그아웃 근처에 있는데 컵라면이 날아와 고대로 뒤집어썼다. 어쩌겠나. 그냥 웃고 말았다.
―요즘도 욕을 듣는 경우가 있나.
▲예전에 비하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옛날엔 원정 구장에서 심한 욕 많이 들었다. 그대로 얘기해볼까? XXX, X▲X, X▲▲, 무서울 정도였다. 이거 어차피 그대로 쓰지도 못할 걸? 하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 시절에는 팬들도 진짜 승부에 민감했었던 것 같다.
―결혼을 안 한 것 때문에….
▲스톱!! 결혼 문제는 노 코멘트요. 때 되면 다 알아서 가겠지, 제발 나 좀 내버려 둬.
―여성팬에게 러브레터를 받아본 일이 있는가.
▲뭐, 있었겠지. 초년병 시절에 많았다. 내용이야 흔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이었다. 편지 많이 받았는데 대부분 내용은 비슷했다. 편지 보낸 여성 팬과 실제로 만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요즘? 거의 안 온다. 요즘 세상에 누가 편지 쓰나.
―다른 구단에서 가장 친한 선수는 누구인가.
▲마해영과 서용빈이다. 마해영과는 선수협 사건 때 함께 어려움을 겪으면서 친해졌고 내가 2000년부터 2년간 LG에 있을 때 용빈이와 잘 알게 됐다. 요즘 해영이가 LG에서 많이 힘든 상황을 겪고 있는데 잘 해결됐으면 좋겠다.
▲ 캐리커처=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
▲불편한 것은 전혀 없다. 내 자신에 만족하기 때문에 항상 긍정적으로 살고 있다. 애초에 야구를 몰랐으면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 적도 없다.
―타임머신이 발명되고 이용할 수 있다면 돌아가고 싶은 시점이 있는가.
▲아무래도 2002년이 아니겠나. 그때 9년 연속 3할을 치다가 10년을 채우지 못하고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2할대로 떨어졌었다.
―후배인 KIA 장성호가 얼마 전 1500안타를 치면서 통산 안타 부문에서 부지런히 따라오고 있다.
▲기록은 언젠가는 깨지는 것이다. (장)성호는 좋은 타자다. 세월이 흘러서 내가 가장 먼저 2000안타에 도착했던 선수로 기억될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한다.
―2001년 말 삼성으로 이적하기 전에 뉴욕 메츠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고 했는데.
▲계약금 120만 달러를 제시받았었다. 내가 타율과 출루율이 높으면서 볼넷도 많은 점을 그쪽 스카우트가 높게 평가했다고 들었다. 그때 선수협 문제로 8개 구단 사장단에 찍혀있었기 때문에 잘못 하면 유니폼을 벗어야한다고 생각했었다. 김응용 감독님(현 사장)이 나를 불러주시지 않았다면 마지막 순간에 미국으로 가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었을 것이다.
―야구 선수로서 인생의 목표는 무엇인가. 한때 42세까지 야구하고 싶다고 말한 게 기억난다.
▲내일 일을 알 수 없으니 이젠 구체적인 나이를 못 박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1루까지 전력 질주할 수 있는 체력이 남아있는 한 어떤 형태로든 선수로 뛰고 싶다. 개인 기록에선 2500안타에 우선 도달한 뒤 그 다음 목표를 또 정하고 싶다.
―야구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뭐든지 최선을 다해본 뒤에 된다, 안 된다를 판단하라는 점이다. 요즘 후배들 중에선 좋은 자질을 갖췄지만 본인의 한계를 시험해볼 만한 노력 없이 제풀에 지쳐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매사에 최선을 다하다보면 언젠가는 기회가 온다. 일반 직장인들의 사회 생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남형 스포츠조선 야구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