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표로 선출된 박상천 전 의원. 민주당 의원들의 탈당 행렬 속 대통합신당 합류에 대한 그의 고민도 깊어져 가고 있다. | ||
하지만 박 대표는 대세론에 휩쓸려 50여 년을 이어온 전통 민주당을 쉽게 포기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피력하고 있다. 박 대표가 호남표심을 담보로 자체 경선을 통해 대선 후보도 만들어내는 등 몸값을 최대한 끌어 올린 뒤 막판에 대통합파와 연대할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런 가운데 범여권 주변에서는 민주당이 빠진 대통합은 ‘도로 열린우리당’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호남 출신인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등 범여권 대선주자들이 앞다퉈 박 대표 설득에 나서고 있는 것도 이러한 우려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박 대표는 과연 어떤 승부수를 던질까. 대통합신당 참여냐 독자세력화냐 정치적 결단을 압박 받고 있는 박 대표의 복심을 들여다봤다.
“탈당은 민주당에 대한 배신행위이며 어리석은 행동이다.” 탈당 도미노로 제2의 분당사태에 직면한 박상천 대표가 던진 일성이다.
7월 25일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타에서 가진 광주·전남 단체장, 광역·기초의원 및 당직자 간담회에 참석한 박 대표는 “공천을 줘서 현재 자리에 있게 한 민주당을 떠나 일신의 안위를 탐하는 것은 배신행위로 공인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이라며 김홍업 의원을 비롯한 탈당파 의원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박 대표는 이날 민주당의 위기상황을 직시하면서 4년 전 분당의 아픔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당원들의 단결을 호소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50만 당원과 함께 대통합에 나서도 다음달 초에는 가부 결정이 날 텐데 그 순간을 못 참고 샛길로 도망가는 것은 개인적 처신 측면에서도 어리석은 행동이다”고 탈당파를 비판한 뒤 “폭풍 속에서 배가 흔들릴 때 선장 선원들이 일치단결하지 않고 배에서 내려 헤엄을 치고 보트를 타고 도망간다면 무사히 항구에 도착하기 힘들 것”이라며 당원들의 결속을 호소했다.
민주당이 비록 소속 의원들의 잇따른 탈당으로 제 2의 분당사태에 직면했지만 절대로 당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박 대표의 강한 의지가 투영된 발언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지난 4월 3일 ‘원외’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민주당 대표에 당선된 박 대표는 화려했던 과거 민주당으로의 회귀를 꿈꾸며 내실을 다져왔다.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을 향해 국정실패의 책임을 인정하고 민주당 분당 과정에 대해 사과를 촉구한 것도 민주당 부활 플랜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해석된다. 박 대표는 취임 후 첫 시험무대였던 4·25 재·보선에서 논란을 빚었던 김홍업 의원을 전남 무안·신안 지역에 전략공천해 당선시킴으로써 호남 맹주 자리를 회복하는 기쁨을 만끽했다. 나아가 범여권 빅뱅이 가시화되면서 DJ와 호남 민심을 대변하는 민주당을 끌어안기 위해 범여권 대선주자들과 제 정파의 구애 경쟁도 갈수록 열기를 더해갔다. 민주당의 주가는 연일 상종가를 쳤고 박 대표의 몸값 또한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박 대표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 큰 구상을 펼치기 시작했다. 6월 3일 소신이었던 ‘특정인사 배제론’ 입장을 접고 열린우리당에서 탈당한 김한길 의원 그룹과 ‘중도통합민주당’이란 당명으로 합당에 합의한 것이다. 소수정당이란 현실적인 한계를 인정하는 동시에 민주당 부활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포석이 담겨져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순항 중이던 박상천호에 거친 파도가 몰아쳐 왔다. 범여권 대통합이라는 거대한 물결이 항로를 가로막으면서 그의 항해술이 또다시 실험무대에 오르고 있는 것이다. 대통합이 대세를 이루면서 소속 의원들의 이탈이 이어지고 있고 잠시 손을 잡았던 김한길 의원 그룹도 탈당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형국이다. 민주당 의석은 현재(7월 29일 기준) 30석이 8석으로 곤두박질칠 상황이다.
가장 충격을 준 것은 뭐니뭐니해도 DJ의 차남 김홍업 의원의 탈당이다. 호남지역 광역단체장인 박광태 광주시장과 박준영 전남지사도 25일 탈당계를 제출하고 제 3지대 신당 창당을 지지하고 나선 상황에서 DJ의 속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해야할 김 의원마저 박 대표의 만류를 뿌리치고 결국 탈당을 선택하자 DJ의 마음도 이미 민주당을 떠난 것이 아니냐는 한탄마저 나오고 있다. 민주당 부활이라는 박 대표의 꿈이 일장춘몽으로 그치는 것은 물론 자칫 민주당의 존립마저 위태로운 현실에 직면한 꼴이다.
범여권 일각에선 DJ를 정점으로 한 범여권 대통합파가 ‘박상천 고사작전’에 돌입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DJ는 정권 연장을 위해서는 범여권과 한나라당의 일 대 일 구도가 불가피한 만큼 ‘무조건 대통합’을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다. 반면 박 대표는 국정실패 및 분당세력은 대통합 과정에서 제외돼야 한다는 이른바 ‘특정세력 배제론’을 주창해 왔다. 그의 이러한 소신은 대세론 급류에 밀려 ‘친노 배제론’으로 다소 약화되긴 했지만 여전히 조건부 통합론을 펼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따라서 박 대표의 결단을 지켜보다 지친 DJ와 범여권 대통합 세력들이 박 대표를 고립무원으로 내몰고 있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박상천 고사작전’설의 골자다. 민주당 공천으로 국회 입성에 성공한 김홍업 의원과 광역단체장 등 DJ와 가까운 인사들이 약속이나 한 듯 민주당을 버리고 대통합 기류에 합류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 지난 4월 국회의원에 당선된 김홍업 씨와 박상천 대표(위). 김 의원의 민주당 탈당으로 대통합에 반대하고 있는 박 대표의 입지가 더 좁아졌다. 아래 사진은 지난 7월 4일 손학규 전 지사(가운데)와 김한길 박상천 공동대표의 3자회동 모습. | ||
박 대표가 25일 광주에서 가진 간담회에서 “민주당 뜻대로 안되면 어쩔 것이냐고 묻는데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라고 전제한 뒤 “당원 70%는 독자적으로 가자고 하지만 이 또한 험난한 길이고 앞을 내다보면서 안전한 길로 끌고 가야 하는 지도자로서 당원 결정대로 무조건 따라갈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여운을 남긴 것도 이러한 전략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다만 박 대표는 ‘열린우리당과 통합 불가’ 주장만큼은 굽히지 않겠다는 입장이어서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을 아우르는 범여권 대통합이 성사될지는 여전히 불투명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