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3일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한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사장. 문 전 사장은 성공한 CEO 이미지를 내세워 경선과정에서 많은 약점이 드러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대항마’임을 자임하고 나섰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기존 정치권은 여야를 불문하고 큰 실망을 줬다” “새로운 경제인과 기업인들 그리고 학자들은 국민만을 보고 갈 뿐이다.”
23일 대선 출정식을 가진 문 전 사장이 던진 일성이다. 장고 끝에 정치 참여와 대권 도전을 결심하게 된 배경 및 향후 독자적인 대권행보를 걷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는 발언으로 해석된다.
자신이 30여 년 몸담았던 회사의 공익광고 문구를 인용한 ‘우리 정치 푸르게 푸르게!’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정치 신인답지 않게 오래전부터 치밀하고 체계적인 대선 마스터플랜을 준비해 온 게 아니냐는 게 출정식에 참석한 관계자들의 대체적인 시각이었다.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를 의식한 경제정책이 선을 보였고 이 후보를 겨냥해 거침없이 독설을 퍼부었을 때 어느덧 ‘CEO 문국현’은 온데간데없고 ‘정치인 문국현’ 이미지가 서서히 참석자들의 뇌리에 각인되기 시작했다.
문 전 사장은 이날 중소기업 중심의 일자리 500만 개 창출, 신도시 ‘반의 반값 아파트 공급’ 등 대선 정책공약을 제시했다. 그는 “이번 대선은 ‘건설 재벌 중심 가짜경제’와 성장과 복지를 함께 추구하는 ‘사람 중소기업 중심 진짜 경제’의 대결”이라며 “부패한 졸부만의 세상이 아닌 따뜻한 번영을 이루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또 “이명박 후보는 정신적으로 이미 패자이며 경선이 1, 2주만 늦었어도 낙선했을 것”이라며 “온 국민에게 기업인의 이미지를 나쁘게 부각시켜 수많은 깨끗한 기업인들을 모욕했다”고 비판했다. 특히 “땅 투기에 여념 없던 재벌 종사자가 어떻게 국가 지도자가 될 수 있느냐”며 “대운하 따위의 국내 지향적, 땅 투기적 사고를 가진 영원히 부패한 15년 전 개발독재 시대 경제인을 21세기 경제인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독설을 퍼부었다.
마치 이 후보가 한나라당 후보로 결정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맞춤형 경제 정책을 제시하며 ‘이명박 대항마’ 카드로 승부수를 던지고 있는 분위기다. 실제로 문 전 사장과 가까운 민주신당 이계안 의원은 “문 전 사장의 가치와 경쟁력은 한나라당에서 이명박 후보가 선출된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전하고 있다.
또 다른 측근인 범여권 A 의원은 23일 오후 기자와 만나 “문 전 사장은 이명박 후보를 겨냥한 맞춤형 후보”라며 “문 전 사장이 대선 출마 선언을 늦췄던 것도 한나라당의 경선 결과와 무관치 않다”고 말했다. ‘박근혜 전 대표가 후보로 결정됐다면 이번 대선에 출마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A 의원은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 후보 당선이 문 전 사장의 대망론을 자극시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라고 답했다.
범여권 관계자들도 문 전 사장이 ‘이명박 대항마’ 역할을 톡톡히 해 낼 것이란 기대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민주신당 예비후보인 신기남 의원은 “이명박 후보는 과거 지향적 토목 개발형 CEO인 데 반해 문 전 사장은 미래 지향적 창조형 CEO로 리더십을 발휘할 것”이라며 “문 전 사장은 조속히 민주 진영에 들어와 한나라당과의 전면전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주문하기도 했다.
이처럼 문 전 사장의 대권 열차 합류는 범여권 경선구도에 잔잔한 파고를 불러일으키며 벌써부터 흥행 보증수표가 될 것이란 관측도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문 전 사장은 기성 정치인과 차별화될 수 있는 깨끗하고 신선한 이미지를 갖추고 있다. 여기에 CEO 출신으로 경제적 감각이 탁월하다는 평가와 함께 시민사회단체의 물밑 지원을 등에 업고 있는 것도 강점이다. 이와 관련 친문국현 성향의 한 범여권 선거 전략가는 “문 전 사장의 출연은 여전히 침체 분위기를 면치 못하고 있는 범여권 경선구도에 신선한 순풍 역할을 할 것”이라며 “문 전 사장이 기성 대선주자들과의 차별화를 통해 ‘이명박 대항마’로 입지를 구축할 경우 범여권 경선에 일대 파란을 몰고 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문 전 사장의 대권행보가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란 회의론도 만만치 않다. 정치 신인이란 점을 감안하더라도 기존 범여권 주자보다 낮은 1%대 지지율에 머물고 있고 조직력이나 정치적 리더십도 검증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때 범여권의 뜨거운 구애를 받으며 유력한 제 3후보로 거론돼 왔던 고건 전 총리와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냉혹한 현실정치 벽을 넘지 못하고 중도하차한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범여권 경선을 주도하고 있는 큰 물줄기인 민주신당 ‘컷 오프(예비경선)’에 참여하지 않고 독자세력화를 모색하고 있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를 둘러싼 뒷말도 무성하다. 문 전 사장은 독자 노선을 선택한 이유로 기성 정치세력과의 차별화를 들고 있다. 그는 출마 기자회견을 통해 “현재 기존 정치권은 여야를 막론하고 국민들에게 많은 실망을 안겨줬다. 한 집단은 100만 실업과 외환위기를 일으켰으며 다른 그룹은 양극화를 심화시켜 국민을 울린 책임이 있다”며 기성 정치세력과는 함께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하지만 범여권 일각에서는 컷 오프 통과를 확신할 수 없는 문 전 사장이 독자세력화로 몸값을 올린 후 본선 합류나 막판 단일화를 노리고 있을 것이란 의혹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문 사장은 “여당이나 야당이나 배제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며 “저희처럼 제 3의 길을 가며 기존의 범여권도 범야권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국민과 의논해 국민이 원하는 길이 무엇인지 유연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말해 본선 합류 내지는 막판 후보 단일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범여권 일부 대선주자 진영에서는 성공한 CEO 이미지 등으로 경쟁력이 과대 평가돼 있는 문 전 사장이 ‘무임승차’라는 고도의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분위기다.
범여권 일각의 이러한 비판적 시각에 대해 문 전 사장은 “과거의 낡은 정치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계”라고 일갈하며 미래에 대한 비전과 구상을 중심으로 국민과 직접 대화를 통해 평가받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그가 출정식 날 ‘대국민 희망제안’을 발표한 것도 이러한 각오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특히 9월 2일 발족식을 가질 예정인 ‘창조한국’과 관련해서는 “같이 사회운동하던 분들 1000여명과 교수들이 힘을 합쳐 새로운 국민운동기구를 발족하고 워크숍을 개최한다”며 “정당으로 발전하진 않지만 정당으로 발전할 의지와 꿈은 갖고 있다”고 말해 독자적인 신당 창당 가능성도 열어놨다.
하지만 문 전 사장 나름의 대권 플랜과는 달리 그가 범여권과 등을 지고 대망론을 펼친다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다는 게 정치권 관계자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민주신당 컷 오프 과정은 뛰어 넘을 수 있을지 몰라도 그가 진정 대권에 뜻이 있다면 본 경선 내지는 막판 단일화 과정에서 반드시 범여권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을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문 전 사장이 단기필마를 고수할지 아니면 범여권호 합승을 선택할지 그의 대권 도전기는 이제부터 시작일 뿐이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