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19일 오후 6시 30분께 서울 강북구 오패산 터널 입구에서 성병대가 사제총기를 발사해 경찰관이 사망했다. 고성준 기자 joonko1@ilyo.co.kr
# ‘전자발찌 찬 성범죄자’ 소설 <아귀>
“소설 <아귀> 원고 초안 발표.” 지난 2015년 10월 30일, 성병대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아귀의 진실’이라는 동영상과 함께 올린 짧은 글이다. 이날 앞서의 글을 올리기 전까지 성병대의 페이스북에 올라온 게시물에는 장문의 글이 없다. 단순한 연예 또는 각종 사건사고 기사 등의 링크가 대부분이다.
성병대가 올린 소설 <아귀>는 부록을 포함해 A4용지로 총 481페이지에 달한다. 그는 페이스북 게시물 글자 수 제한에 따라 한꺼번에 올리지 못하고 총 13개의 게시물에 나누어 올렸다. 짧은 문장에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도 틀리지 않았지만, 같은 내용이 여러 번 반복되고 한 주제에 대한 부연 설명이 많은 분량을 차지했다.
이 소설의 배경은 일본으로, 주인공 ‘오시오’와 등장인물 모두 일본인이지만 성병대 본인을 대입한 캐릭터로 보여 진다. 그가 소설 도입부에서 주인공에 대해 “오시오는 전자발찌를 부착한 성범죄자”라며 “오시오가 전자발찌를 부착하게 된 경위는 성범죄 유죄판결에 따른 형 집행과 전자발찌 법 소급적용으로 인해 출소 후 전자발찌를 부착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여느 성범죄자처럼 보면 유감스러운 일이다”라고 설명했기 때문이다. 또한 소설에는 주인공이 성범죄자가 된 경위와 교도소에서 복역하며 일어난 일 등이 상세히 적혀있지만, 상당한 분량은 전자발찌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하다.
성병대가 지난 2015년 10월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소설. 자신이 그동안 어떻게 생활해왔는지부터 경찰에 대한 불신과 전자발찌부착 명령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성병대는 페이스북 등 SNS에선 성현우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실제로 성병대는 전자발찌 부착명령에 불복해 수차례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두 번의 성폭행과 교도관 상해 혐의 등으로 9년 6개월을 복역한 후 2012년 9월 12일 만기 출소했는데, 전자발찌 부착 소급 적용 대상자에 포함돼 출소 이후인 2014년 1월 20일부터 전자발찌를 부착했다. 이에 성병대는 곧바로 “형 집행을 모두 마치고 사회생활을 하던 도중 전자발찌 착용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항고했지만 지난 4월 대구고법은 전자발찌 부착명령은 타당하다고 결정했다. 성병대는 이후 대법원에 재항고했다가 지난 6월 돌연 취하했다.
성병대는 소설 <아귀>를 올린 이후부터 페이스북을 통해 강북경찰서와 인근 주민에 대한 불신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경찰에 대해 욕설을 섞어가며 ‘부패친일경찰’로 지칭했고 전자발찌를 통해 확보할 수 있는 위치정보를 활용, 자신을 감시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인근 주민들에 대해선 자신을 폭행, 또는 성폭행 범죄자로 만들기 위해 경찰의 사주를 받았다고 강조했다. 페이스북에 첫 게시물이 등록된 2013년 이후부터 이 시점까지 앞서의 경찰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이나 욕설이 섞인 게시물은 없었다.
# 자전적 에세이서 극심한 생활고 주장
성병대의 페이스북에서 소설 <아귀>는 올해 4월 2일 또 다시 언급된다. 이번엔 <극심한 생활고를 겪고 있는 자의 선택>이라는 제목으로 올린 일종의 자전적 에세이를 올린 것. A4용지로 총 34쪽에 달하는 이 에세이에서 그는 왜 <아귀>라는 소설을 썼는지부터 출소 이후 어떤 일을 겪어왔는지 구체적으로 작성했다.
이 에세이를 보면, 성병대는 지난해부터 극심한 생활고를 겪고 있었다. 그는 출소 이후 2013년 대구에서 서울로 상경한 뒤, 경찰관 총격 사건이 벌어진 서울 강북구 번동으로 이사를 왔는데, 인근 떡집 세 곳에서 각각 시간제 직원, 정직원 등으로 일을 하다 지난 2015년 5월까지 일하던 떡집을 마지막으로 일자리를 구하는 것을 멈췄다. 그는 에세이에서 직장을 구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그동안 떡집 사장과 직원들도 자신을 음해하기 위한 경찰의 사주를 받았으며, 독극물 테러와 교통사고로 위장한 암살 위협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다른 직장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소설 <아귀>를 이때부터 간간이 집필했다고 했다.
성병대는 자신의 사건에 대한 서술이 대부분이었던 소설과는 달리, 에세이 초반부에는 심각한 생활고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 부분 차지했다. 그는 ‘극심한 생활고’를 수차례 언급하면서도 이를 경찰의 탓으로 표현했다. “저금리로 1000만 원을 대출 받아 생활비나 벌 요량으로 주식에 투자했다가 경찰의 사주를 받은 주식 전문가들의 작전으로 큰 손실을 봤다”거나 “떡집 사장들이 나를 화나게 만들어 범죄를 저지르게 만들 목적으로 봉급을 하루 이틀 미뤄서 줬다”는 식이다.
실제로 성병대는 지난 2015년 5월 이후로 생활고를 겪는다. 서울 강북구청과 번1동 주민센터 관계자 등의 말을 종합하면, 성병대는 지난 6월부터 8월까지 125만 5200원의 긴급생계비를 지원 받았다. 이미 지난해부터 건강보험료를 1년 동안 내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최대 3개월로 명시된 긴급생계지원이 끊기자 성병대는 지난 9월부터 다시 생활고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최근 4개월 간 25만 원의 월세를 내지 못하고 있었고, 같은 시기 휴대전화도 착신이 정지됐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듯 에세이는 후반부로 넘어갈수록 경찰과 인근 주민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한다. 경찰이 자신을 생계형 범죄자로 만들 목적으로 일을 그만두게 만들었고, 과거 성폭행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 검사, 판사와 얼굴이 닮은 주민들을 투입해 폭행범죄를 유도했다는 식이다. 여기에 길을 지나는 여성에게는 성폭행을 유도하려는 꽃뱀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특히 이번 오패산 터널 사건에서 성병대에게 폭행을 당한 첫 번째 피해자에 대해선 “범죄를 유도하기 위해 강북경찰서에서 위장 잠입시킨 경찰”이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성병대와 부동산 사장은 그동안 월세와 이사 문제 등으로 갈등을 겪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성병대는 이 에세이에서도 전자발찌를 통해 자신의 위치정보를 확보하고 있다며 전자발찌 부착에 대한 불만을 강하게 나타냈다.
# 사건 목격자들 증언, 치밀한 계획 범행에 무게 실려
소설 <아귀>가 페이스북에 업로드된 뒤부터 경찰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을 표현한 것처럼, 성병대는 앞서의 에세이가 올라온 이후부터는 경찰을 향한 범행을 예고하기 시작했다. 특히 에세이가 올라온 이후부터 사건이 벌어진 지난 19일 전까지의 페이스북 게시물을 보면 “앞으로 몇 개월 내” “조만간” “앞으로 2~3일 내에”라는 식의 기간을 명시하며 ‘경찰과의 충돌’을 수차례 언급했는데, 이는 성병대가 범행에 사용한 사제총을 제작하는 기간으로 보여진다. 사제총 제작의 진행 상황에 따라 경찰을 상대로 한 범행 시기를 계획하고 예고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실제로 성병대는 사건 과정에서 계획 범행 정황을 보였다. 지난 20일 기자와 만난 복수의 사건 목격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성병대는 사건 당일 방탄복과 헬멧을 쓴 채로 첫 번째 피해자 부동산 사장의 건물 앞에서 기다렸다. 부동산 사장이 밖으로 나오자 다짜고짜 공격했으며 도망가는 그를 따라 성병대는 준비한 사제총을 발사했다. 부동산 사장은 골목을 빠져나와 도로변에서 성병대에게 붙잡혔는데, 성병대는 망치로 사장을 폭행한 뒤 곧장 도망치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경찰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장면이다. 실제로 당시 상황을 목격한 주민 일부는 “성병대가 무언가 기다리는 눈치였다”고 주장했다.
첫 번째 피해자 이 아무개 씨(68)가 운영하는 부동산 (파란색 원). 같은 건물에는 성병대가 세입자로 살고 있었다(빨간색 원). 고성준 기자 joonko1@ilyo.co.kr
성병대는 부동산 사장을 폭행한 이후 경찰관을 피격한 오패산 입구로 도주하기 전, 인근 골목에 위치한 한 빌라 주차장에 들어가 부엌칼로 전자발찌를 끊었다. 전자발찌가 훼손되면 곧바로 경찰서에 신고가 접수되는데, 성병대의 페이스북 게시물 일부에도 이 내용이 적혀있다. 경찰을 상대로한 계획적 범행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는 여기에도 있다. 이후 성병대는 오패산입구의 화단에 들어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을 향해 사제총을 발사했다.
지난 21일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앞두고 취재진 앞에 모습을 드러낸 성병대는 횡설수설하면서도 계획 범행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않았다. 범행 후 최초로 입을 연 성병대의 증언으로 대략적인 사건에 대한 윤곽이 나왔지만, 정확한 범행 동기 등은 경찰 수사에서 더 규명돼야 할 부분이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
전국 경찰 방탄복 1000벌뿐…“없어서 못 입는다” 성병대는 경찰의 실탄 사격에도 방탄복 때문에 큰 부상을 입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반면 범인의 총탄을 맞고 숨진 고(故) 김창호 경감은 출동 당시 방탄복은커녕 특별한 보호 장비를 갖추지 못했다. 경찰에 따르면 김 경감은 순찰 도중 폭행 신고를 접수 받고 곧바로 현장으로 출동한 탓에 별다른 장비를 갖추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사건 발생 초기엔 폭행 신고만 접수됐고, 김 경감이 현장에 도착한 이후 사제총 관련 신고가 접수된 탓에 파출소로 돌아와 보호 장비를 챙기지 못했다. 하지만 사건 이후 경찰 내부에선 방탄복 등 보호 장비 재점검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현장에 입고 나갈 방탄복 자체가 없다는 것. 실제로 현재 전국 1900여 곳의 파출소와 지구대에 보급된 방탄복은 약 1000여 벌에 불과하다. 김 경감이 소속된 서울 번동파출소 역시 근무자는 휴직자를 제외하고 총 36명이지만 구비된 방탄복은 단 1벌뿐이었다. 강북 지역의 또 다른 파출소와 지구대도 상황은 비슷했다. 특히 여러 명이 방탄복을 돌려 입어야 하는 탓에 신고가 접수되면 파출소에 들러 착용해야하는 번거로움까지 있었다. 여기에 경찰이 보유한 방탄복은 대부분 1997년부터 2001년 사이에 보급된 구형 제품이다. 납이 채워져 있어 무게가 10㎏이 넘어 현장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다. 서울의 한 지구대 경찰 관계자는 “무게가 상당해 활동에 제약이 많다. 돌발 상황에서 적절한 대처를 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2월 경기 화성시에서 공기총 난사사건으로 이강석 남양파출소장(경감)이 사망하는 사건 이후 정부는 후속조치로 경찰에 신형 방탄복을 보급하기로 했지만 아직 현장에는 내려가지 않았다. 연내 8000개를 보급한다는 계획도 예산이 적어 교체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문] |
빈번한 사제총기 사고에도 실태파악은 ‘유명무실’ 서울 시내에서 저녁시간에 사제 총기가 마구잡이로 발사되는 사건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전에도 사제총 관련 사건이 심심치 않게 벌어져왔다. 그러나 이를 관리하고 사고를 예방해야 할 경찰에서 사제 총기 실태 파악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시민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있다. 충북 음성군에서는 지난 9월 24일 빈 주택에서 소총과 권총 형태의 사제총 24정이 발견됐다. 2015년 사망한 김 아무개 씨가 살던 집을 윤 아무개 씨가 구입해 청소를 하다 발견한 것이다. 조사결과 김 씨가 숨지기 전 철물점을 운영하며 사제총을 제작해 보관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같은 달 17일 경기도 양주시에서는 한 남성이 사제총을 스스로 머리에 쏴 중상을 입는 사건이 일어났다. 경찰은 이 사제총 또한 남성이 직접 만든 것으로 추정했다. 대전에서는 지난해 12월 도로에 50대 남성이 주차된 차량에 난입해 사제총으로 운전자를 쏘는 일도 있었다. 그는 3일 뒤 사제총으로 자살을 시도했고 머리 부위에 관통상을 입어 사망했다. 이처럼 총기 관련 사건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지만 정확한 현황 파악이 안돼 관리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매년 5월은 ‘불법무기류 자진신고 기간’으로 해마다 4400여 개의 불법무기가 신고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닐 것으로 보인다. 사제 총기를 직접 제작한다면 얼마든지 은닉이 가능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간단한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도 총기 제작 방법을 알아낼 수 있다. 제작 방법을 자세히 설명하는 동영상까지 올라와 있다. 고도의 기술이나 구하기 어려운 재료 없이도 사제총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실제 이번 사건의 총격범인 성병대는 “청계천과 을지로에서 재료를 사서 만들었다”고 진술했다. 발견된 총기 또한 나무토막에 얇은 쇠파이프가 테이프로 휘감겨 있어 조악해 보이지만 경찰을 사망에 이르게 만들었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