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후보는 ‘원샷 경선’ 수용을 선언했으나 그의 고민은 경선에서 승리할 경우에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승리한다 해도 경선에서 패한 손학규 이해찬 후보가 전격적으로 당을 탈퇴하거나 연대설과 같은 예상 밖의 승부수를 내던질 가능성도 있다. 후보 사퇴 주장이나 형사고발론까지 들먹이고 있는 손·이 두 후보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데다 범여권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단키 어렵기 때문이다. 더구나 장외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사장의 지지율은 경선 파행과 반비례하며 올라만 가고 있다. 정 후보에게 던져진 고민은 무엇이고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지 살펴봤다.
“지도부의 폭거다” “전반전에서 졌다고 룰을 바꿔 후반전을 하자는 것과 같다” “국민과의 약속이 가장 무서운 것이다” “유·불리를 떠나 민주주의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다.”
하루 전만 해도 대통합민주신당 지도부가 결정한 14일의 ‘원샷 경선’에 대해 정동영 후보 측은 이 같은 강도 높은 발언을 내놓았다. 정 후보는 4일 밤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한 자리에서 기자들에게 “판을 깰 수 없다는 것과 지도부가 원칙을 저버린 것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5일 정 후보는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당 지도부가 오는 14일 8개 시·도의 경선을 한꺼번에 치르는 이른바 ‘원샷 경선’을 실시키로 한 방침에 대해 “당의 결정을 대승적 차원에서 받아들이겠다“고 결국 굴복했다.
정 후보는 이날 “경선 판이 깨져서는 안 된다는 대의와 원칙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원칙 사이에서 많이 고민했다. 당을 위해 다시 한번 저를 버리겠다” “지금 정동영이 일등하고 있다고 두 사람(손학규, 이해찬 후보)이 손잡고 흔들고 있지만 결코 흔들리지 않겠다. 저는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니라 모진 비바람과 풍파를 헤쳐 온 광야의 들풀이어서 어떤 비바람에도 결코 꺾이거나 흔들리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혔다.
그러면서도 정 후보는 당의 경선일정 변경에 대해 “경선 도중에 원칙, 룰을 바꿔버리는 결정은 납득할 수 없으며 민주 정당사에 오점을 남겼다. 아주 나쁜 전례가 될 것”이라고 유감을 표명하며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 하며 향후 경선관리에서 한점 의혹과 불신을 받지 않도록 투명성,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섰던 정동영 후보(왼쪽). 당시 이인제 후보는 경선 도중 사퇴했지만 정동영 후보는 끝까지 완주했다. | ||
파국으로 얼룩졌건 어쨌건 경선 1위를 기록 중이고 이대로라면 얼마든지 승리할 자신이 있는데 상대 후보 측에서 탈퇴 등의 초강수를 두지 않는 마당에 먼저 경선 판을 흔들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 정 후보 측의 고민이었다. 결국 바뀐 룰로도 승리할 수 있다고 보고 지도부의 ‘원샷 경선’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대통합민주신당의 경선과정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면 현재의 판세도 정 후보에게 반드시 유리하게 돌아가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의견도 없지 않다는 데 정 후보의 고민이 있다.
우선 우위를 점해온 ‘조직력’을 남은 경선에서 발휘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다. 정 후보는 초반 4연전에서 예상 밖의 선전으로 여론조사에서 한참 앞서 있던 손학규 후보를 누르고 1위를 기록했다. 이어 추석 민심이 반영된 광주·전남·부산·경남의 ‘슈퍼 4연전’에서도 1위 자리를 지켜내면서 손학규 후보를 1만 3274표를 앞서고 있다. 그러나 ‘원샷 경선’일인 14일 남은 8개 시·도 지역 경선을 한꺼번에 치를 경우 상황에 따라서는 다르게 전개될 수도 있다. 우선 최근 조직동원 경선 파문에 대한 반발을 계산치 않을 수 없다. 모바일 투표 또한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 손·이 두 후보의 연대설이 계속 흘러나와 정 후보의 심기를 거스르고 있다. 단순한 산술적 계산으로는 이들이 막판에 연대한다면 정 후보 패배 가능성이 높아진다.
정 후보가 가진 지역적 한계 또한 장점이면서 또한 단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전북 순창 출신인 정 후보는 광주·전남 지역 경선에서 손학규 후보를 앞서며 우세를 보였다. 그러나 호남이 아닌 다른 지역, 특히 손 후보의 우세 지역으로 꼽혀온 수도권이나 이 후보의 우세지역으로 꼽혀온 충남 대전 지역이 ‘호남 후보 불가론’을 내세우며 돌아선다면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 지난 9월 29일 대통합민주신당 광주·전남 경선에서 1위를 차지한 정동영 후보가 연설을 하는 모습. | ||
남북정상회담 이후 벌어질 경선 구도에 대해서도 정 후보의 고민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로선 남북정상회담을 마친 노 대통령이 향후 대선구도에 좀 더 본격적으로 힘을 발휘할 것으로 내다보는 시각이 많다. 또한 정치권 일각에서는 친노 조직인 참여정부평가포럼이 노 대통령의 ‘입김’으로 이해찬 후보를 도와 경선 과정에 개입하고 더 나아가 ‘친노신당’을 만들게 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정 후보로서는 노 대통령의 영향력이 대통합민주신당 대선후보 선출과정에 미칠 파장은 일단 막아냈다 하더라도 제2의 경선이랄 수 있는 범여권 후보 단일화에 대한 영향력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정 후보가 경선 복귀를 결심한 것은 일단 지금까지의 경과를 놓고 볼 때 ‘원샷 경선’도 어느 정도 승산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기는 하다. 경선 파행 중에도 여론조사에서 정 후보가 ‘밀리지’ 않고 있다는 점도 살펴봐야 할 대목이다. 지난 4일 CBS·리얼미터의 주간여론조사 결과 정 후보는 전주에 비해 2.3% 오른 13.7%를 얻으며 이명박 후보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손학규 후보는 전주에 비해 3.4% 내려간 5.8%에 그치며 3위 자리를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사장에게 내주었다. 이해찬 후보도 전주에 비해 2.1% 하락한 3.9%에 그쳤다.
정 후보는 일단 경선 복귀 의사를 밝히면서 동시에 손 후보 측에 대한 의혹 제기를 본격화하는 등 배수진을 친 채 공세적 입장을 강화하고 있다. 정 후보 측은 5일 손 후보 측의 금권·관권 선거 의혹을 제기하고 자금, 조직 책임자와 선대위 여성부장을 고발했다. 정 후보 측 노웅래 대변인은 “손 후보 측은 경기 군포지역 한 호텔에서 36명을 동원, 일당 5만 원씩을 지급하고 선거인단 신청서에 대리서명 작업을 진행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 정치 분석가는 “정 후보로서는 경선 룰 변경을 수용하는 ‘너그러운’ 이미지를 회복하면서 대세론을 이어가는 것으로 남은 경선 전략의 가닥을 잡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정 후보가 자신의 낙관대로 승리의 결말을 얻게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