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주자인 정동영 후보가 ‘귀티’ 인상을 벗고 ‘동네 아저씨’ 이미지를 어필하며 신촌에서 거리유세를 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시민의 입장에서 현장에서 만나본 정동영 후보는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옆집 사는 ‘동네 아저씨’의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정 후보는 쌀쌀한 날씨에도 두터운 코트 대신 발랄해 보이는 오렌지색 점퍼를 입고 거리유세를 펼치는 강행군을 이어갔다.
‘말 잘하기로’ 소문난 정동영 후보지만 그는 유세현장에서 멘트 하나, 제스처 하나에도 세심한 신경을 기울였다. 앵커와 기자로서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TV 카메라에 충분히 익숙할 만도 하지만 정치인으로서 비쳐지는 TV 앵글에 대한 전략은 또 다른 것인 듯했다.
정동영 후보는 “다른 후보를 비방하기보다는 나와 나의 정책을 알리겠다”면서도 간간이 이명박 후보를 겨냥한 펀치를 날렸다. 더불어 시민들과 대면하는 자리에서는 “남은 선거운동 기간 이명박 후보와의 지지율 격차를 좁혀 반드시 역전시키겠다”는 각오를 보여주는 데에 주력했다. 지난 28일과 29일 이틀간 공식선거운동을 시작한 정동영 후보의 거리 유세현장을 뒤따라 가봤다.
“가족행복시대를 열겠습니다! 여러분!”
우렁찬 함성이 마이크를 타고 쩌렁쩌렁 울려온다. 방송기자 출신답게 발음이 분명하고 또박또박한 정동영 후보의 연설은 거리 유세장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지난 28일 오후 2시 무렵 인천 부천역 앞 광장의 모습이다. 지나가던 부천시민들 100여 명이 걸음을 멈추고 대선주자의 유세풍경에 관심을 보이며 모여들었다. 현장 분위기를 먼저 주도한 것은 오렌지색 모자를 쓴 자원봉사자들. 이들은 시민들에게 직접 다가서면서 로고송에 맞춘 안무를 선보였다. 추운 날씨에도 경쾌하게 춤추고 있는 자원봉사자들은 20대에서부터 4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이었다. 쌀쌀한 날씨에 다소 얇아 보이는 점퍼차림이었지만 현장의 열기는 추위를 누를 만큼 뜨거웠다. 대선이 임박했음을 피부로 느낄 수가 있는 곳은 국민들이 있는 이 곳, 거리에서였다.
이 날 유세 현장의 사회는 박우석 전 인천 남구구청장이 맡았다. 정 후보는 자신과 대학 1학년 때부터 친구라는 사회자를 소개하며 “누가 더 형님같이 보입니까. 박우석하고 저하고 이해찬하고 대학 동창생인데 이해찬하고 저하고 친구라고 하면 누가 손해 보겠어요?”라며 웃음을 유도한다. 정 후보는 대중들에게 친근감을 주는 것에 남다른 노력을 하는 듯했다. 정동영 후보 캠프에서 주력 선거운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도 ‘안아주기’ 캠페인이다. 얼마 전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프리 허그(free hug) 운동’에서 착안한 것이다.
정 후보는 이날도 연설을 시작하기 전 “대통령 한다고 바락바락 악 쓰는 것보다 주변 사람, 가까이 있는 사람 안아주면 가족 같고 좋지 않습니까. 우리 옆에 있는 사람 한 번씩 안아줍시다. 다 형제고 가족입니다”라며 먼저 안아주기 캠페인부터 시작했다. 한 관계자는 “(안아주기 운동에 대한) 현장 반응이 꽤 좋다. 처음엔 주춤주춤하던 사람들도 후보께서 먼저 다가서면 흔쾌히 응한다”고 전했다. 시민들의 표정을 살펴보니 이 캠페인은 꽤 효과가 있는 듯했다. 정 후보는 “송영길, 문희상, 이호웅, 노웅래 의원님. 100명씩만 안아주세요. 저도 내려가 100명 안아드리고 다시 올라 오겠습니다”라며 연단 아래로 직접 내려갔다.
▲ 지난 28일 정 후보가 인천 GM대우 자동차를 방문해 직원들을 격려했다(위). 다음날인 29일에는 강서노인종합복지회관에 들러 노인들과 식사를 같이했다.사진제공=대통합민주신당 공보실 | ||
‘안아주기’ 캠페인을 추진한 이유는 정 후보의 강해 보이는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서라고 한다. 정 후보가 유세장에서 ‘연설’이 아닌 ‘대화’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 정 후보는 “TV에 나오는 정동영의 모습이 너무 사납다, 주먹을 쥐고 소리치는 모습이 가족 행복과는 안 어울린다는 따가운 지적이 많았다”며 “(공식 선거운동을 시작하고 난 뒤) 연설, 웅변하기를 포기했다”고 말했다. 거리 유세장에서마다 그는 “연설이라면 어디 가서도 빠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데 오늘은 연설보다는 여러분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습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 탓인지 여전히 연설 중간 중간마다 “회의에서 ‘정동영이가~’ 이 소리 하지 말라는데 또 나왔다”며 웃음을 보이기도 했다.
정 후보는 방문하는 유세 현장마다 현지 상황에 맞는 ‘맞춤식 멘트’를 내놓아 시민들의 관심을 유도했다. 29일 출근시간과 퇴근시간 무렵 서울 여의도와 신촌, 홍대 주변에서 직장인들과 대학생들을 만나면서 실업 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했다. 청년 실업자들 사이에서 스스로를 ‘88만원 세대’라는 자조적인 표현이 나오고 있는 상황을 감안해 ‘나쁜 일자리’가 아닌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 주겠다는 것을 알리는 것에 주력했다. 정 후보 캠프에서는 이와 관련해 청년실업자에게 최장 1년 동안 직업교육비, 최저생계비를 지급하는 ‘이태백 탈출제도’, 향후 5년간 30만 명을 해외 인턴, 연수를 보내는 ‘글로벌 인재 양성공약’을 내놓고 있다.
또 강서 노인종합복지회관을 방문한 자리에서는 “노후 문제는 국가의 책임이라며 열심히 일하신 분들이 은퇴 후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하는 가족행복시대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특히 2004년 3월 노인폄하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던 것을 의식해 당시 일에 대해 또 한 번 사과했다. 정 후보는 조심스러운 말투로 “어르신들은 집에서 쉬시고 너희들이 나가서 투표해야 한다는 취지의 청년들을 꾸짖은 발언이었다”고 설명했다.
안아주기 캠페인 외에도 정 후보는 현장에서 국민들과 ‘스킨십’을 늘리는 것에 남다른 애를 쓰고 있었다. 지난 28일 오전 인천의 GM대우 자동차 공장을 시찰한 후 정 후보는 근로자들과 예정에 없던 족구시합을 벌였다. 족구를 워낙 좋아한다는 그는 경기가 끝난 뒤 진 팀을 향해 “이쪽 팀에서 2만 원을 주라”고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다음 날인 29일 노인복지회관에서는 직접 배식판을 나르는가 하면 복지관의 노인들과 함께 당구를 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정 후보는 지난달 16일 후보 선출 후 첫 일정으로 동대문 평화시장을 찾아가서 ‘현장체험’ 을 한 바 있다. 정 후보는 젊은 시절 어머니와 함께 아동복을 만들어 평화시장에 내다 판 돈으로 생활을 이어갔던 고생담을 갖고 있다. 그래서 정 후보는 평소에도 ‘평화’라는 소리를 들으면 그 의미보다 ‘평화시장’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고 한다. 정 후보 캠프에서는 이 점을 알리면서 ‘서민대통령’의 이미지를 극대화시키겠다는 계획이다. 정 후보는 이날 평화시장을 방문해 어린 시절 알고 지낸 상인과 만나고 직접 재봉질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능숙한 재봉질을 선보였던 정 후보는 “이렇게 하는 게 ‘오버로크’”라는 설명도 곁들였다. 지난 28일 부천유세장에서도 정 후보는 다시금 힘들었던 시절을 떠올리며 “제가 한 달 전 처음 대통령 후보 되고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 동대문 시장이다. 30년 만에 제 옷 보따리 팔아주셨던 사장님을 만났다. 필름이 그 때로 돌아가 목이 메었다”며 감회에 젖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정 후보는 종종 “외모 때문인지 돈 많은 집 자식인 것 같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 분들이 많다”는 ‘불만’을 드러낸 바 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마련한 것도 바로 ‘재봉틀집 맏아들’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정 후보는 지난 10월 17일 개성공단 방문 시에도 한 속옷공장에서 재봉작업을 직접 선보였다. 이러한 ‘서민 대통령’의 이미지를 만드는 전략은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전략과 겹쳐진다. 이 후보 또한 가난하게 살아온 젊은 시절을 강조하며 서민의 심리를 가장 잘 파악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앵커 출신이라는 고급스러운 이미지 때문에 정 후보가 다소 불리한 측면이 있다는 분석도 있다.
정 후보 캠프 측은 최근 이명박 후보에 대한 BBK 의혹이 짙어지고 있어 검찰 수사결과 발표가 미칠 여파에 대해 기대감을 갖고 있다. 특히 이회창 후보에 이어 3위를 달리다가 지난 25~27일 실시된 중앙일보·SBS·동아시아연구소·한국리서치의 공동 여론조사에서 2위를 기록한 것에 대해 고무적인 분위기다. 정 후보는 이 조사에서 15.2%를 얻어 이회창 후보(14.7%)를 앞섰다. 정 후보는 “정동영, 이명박, 이회창 이렇게 좁혀지면 정동영이가 1등을 한다는 조사가 나왔다”면서 당 자체 조사 결과를 거론하며 자신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과연 정 후보의 바람대로 ‘3자 대결’ 구도가 만들어져서 결국 그가 승리를 거둘 수 있을까. 대선이 보름여 앞으로 다가왔지만 그가 원하는 3자 대결 구도를 위해선 넘어야 할 산이 높고 험하기만 하다. 선거 전략가들은 “대선은 결국 막판 15일 싸움이 될 것”이라는 분석을 내보이기도 한다. 남은 시간 동안 ‘젊음’을 무기로 내세운 정 후보가 패기와 열정으로 남은 고비를 넘어설 수 있을지 그 결과는 오는 12월 19일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