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캐리커처=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
만약 ‘최근 가장 근심 많을 것 같은 기업인’을 묻는 항목이 있었더라면 역시 이 회장의 1위 자리를 위협할 경쟁자가 없었을 듯하다. 삼성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발언 이후 정치권의 특검 발의, 검찰의 압수수색 그리고 1000여 개의 이르는 차명계좌 수사까지 연일 정신없이 얻어터지고 있는 그 속이 오죽할까.
노무현 정권하에서 이 회장은 숱한 곡절을 겪었다. 지난 2005년 안기부 도청 문건 공개(이른바 ‘X파일 사건’)로 도피성 논란 속에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가 5개월 만에 휠체어 탄 모습으로 돌아와 대국민 사과 성명을 내야 했다. 지난해엔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증여 의혹 사건 재판과정에서 불거진 소환설을 잠재우느라 애를 먹었다. 그러나 삼성 비자금 파문으로 인해 지금껏 견뎌온 고난들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위기감이 이 회장 주변을 감돌고 있다. 아들 이재용 전무로의 안정적 승계를 위해서라도 그룹 창사 이래 최대 역경을 딛고 일어서야 하는 이 회장의 과거 현재 미래를 ‘탐구’했다.
재계에선 최근 삼성 비자금 파문을 일컬어 지난 1966년 ‘한비 사건’ 이후 최대 위기란 표현을 곧잘 사용한다. 삼성 계열사들이 최근처럼 대대적인 압수수색을 당한 것도 한비 사건 이후 처음이다. 사카린 밀수사건으로도 불리는 한비 사건은 삼성이 한국비료 공장을 만들면서 일본에서 사카린 원료를 밀수해 국내에 유통시킨 일로 이병철 선대 회장이 한국비료 주식 51%와 운영권을 정부에 헌납하고 명예회장으로 경영일선 후퇴를 선언하며 막을 내렸다.
이후로도 재산 출연은 삼성이 곧잘 써먹는 수단으로 활용돼 왔다. 지난 1997년 삼성자동차 사태 당시 이 회장은 부채 변제를 위해 채권단에 자신 명의의 삼성생명 주식 400만 주를 내놓았다. 지난해 ‘삼성공화국 파문’ 무마를 위해 8000억 원 사재 출연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번에도 이 회장이 거액 출연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란 지적이다. 검찰이 조사 중인 차명의심계좌 1000여 개 각각에 최소한 10억 원 이상 들어있었다고만 봐도 1조 원이 넘어간다. 차명주식 관리 의혹과 이재용 전무 재산형성 과정에서 빚어진 주식 저가 취득 논란 등이 본격적으로 수사선상에 오를 경우 감당해야 할 추징액이 수조 원에 달할지도 모른다는 지적도 있다. 때문에 차명계좌 추정액 1조 원 정도가 이 회장이 택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출연액일 것이란 관측이 대두된다.
한비 사건 당시 이병철 선대 회장이 총수직에서 물러났던 것처럼 이 회장이 중대결심을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나돈다. 이는 당초 올해 12월 예정이었던 이 회장 취임 20주년 행사를 전후로 이재용 전무로의 승계 발표가 예상됐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이건희-이재용 부자의 경영권 승계가 언제쯤 이뤄질지를 삼성의 반도체사업 진출과정을 통해 가늠해보려는 시각도 있다. 삼성은 그룹의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는 반도체 사업이 이건희 회장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라 강조해왔다. 당시 최고 결정권자는 이병철 선대회장이었지만 초기부터 실질적으로 사업을 구상하고 이끌었던 인물은 이 회장이라는 것이다.
삼성 반도체사업의 효시가 된 한국반도체 인수는 지난 1974년의 일이다. 한비 사건으로 물러나 있던 이병철 선대 회장이 경영일선에 복귀한 것은 1973년의 일로 이때부터 장남 이맹희 씨의 그룹 내 권한이 축소되기 시작한다. 1978년 이건희 회장이 그룹 부회장에 임명돼 승계구도를 공식화하기까지 이 회장을 차기 총수로 만들기 위한 선대회장의 각고의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반도체사업 시작 역시 이건희 시대를 열어주기 위한 선대 회장의 노림수 중 하나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올 들어 이건희 회장은 반도체 사업에 대한 우려와 함께 “10년 후 무엇으로 먹고 살지 고민”이라 밝혀왔다. 삼성의 ‘10년 후’라면 이건희 회장이 아닌 이재용 전무가 간판 역할을 할 시점임에 분명하다. 삼성은 지난 10월 각 계열사별로 운용돼온 신수종 사업 개발 계획을 통합 취합할 목적으로 그룹 전략기획실 내 ‘신수종 TF팀’을 발족시켰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 보자. 한국반도체 인수로 반도체사업 본격화를 알린 지 2년 후인 1976년 9월 이병철 선대 회장은 암수술을 위해 일본으로 출국하기 전날 밤 가족회의를 통해 이건희 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알렸다. 이 회장이 최근 신수종 사업 발굴에 전력을 쏟아온 점은 아들에게 경영권을 넘겨줄 시점을 언제로 잡는지 가늠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 이건희 삼성 회장과 아들 이재용 전무(오른쪽). | ||
최근 그런데 김용철 변호사의 비자금 발언에 이은 시민단체들의 문제 제기로 이 전무의 지분 편법 승계 과정이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는 점이 부담스러워 보인다. 이 전무를 차기 총수로서 부각시킬 신사업 아이템이 아직 구체화되지 않았다는 점도 이건희-이재용 부자 조기 경영권 승계를 단언할 수 없게 만드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이 회장의 결단이 임박했다는 시각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배경에는 이 회장을 계속해서 따라 다녀온 ‘건강 이상설’이 있다. 이 회장이 지난 1999년 10월 건강검진을 받는 과정에서 폐 부근에서 암세포가 발견된 것으로 알려진 바 있다. 이후 이 회장은 서울 삼성병원과 미국의 MD앤더슨 암센터에서 치료를 받았다. 지난 1976년 가족회의에서 이병철 선대 회장이 이건희 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를 공식화한 배경 중 하나가 암 치료 전념이었던 점을 감안해 이재용 전무의 등극시점을 그리 멀지 않게 진단하는 시각들이 있다.
이 회장이 경영권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명예회장직으로 물러난다 해서 이번 삼성 비자금 파문을 완전히 잠재울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 이번 파문에 대한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여야 할 텐데 자칫 이 회장이 모든 십자가를 짊어지는 모양새가 될 우려도 지울 수 없다.
재계 일각에선 빠른 사태 수습을 위해 삼성그룹 전략기획실 기능 축소 혹은 해체 가능성을 거론한다. 현재 수사선상에 오른 1000여 개 차명 의심 계좌 개설과 비자금 관리의 온상이 전략기획실로 여겨지는 만큼 원흉을 제거해야 여론을 달랠 수 있다는 것이다.
전략기획실 기능을 대체할 조직을 다시 꾸리는 것은 큰 문제가 안 되겠지만 전략기획실 중심에 이학수 부회장이 서 있다는 점은 이 회장의 고민거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략기획실장인 이학수 부회장은 1982년부터 회장 비서실에서 근무한 이래 이 회장을 가장 오랫동안 근거리 보좌한 현역 임원이다. 전신인 구조본 시절을 포함해 삼성의 관제탑인 전략기획실을 10년째 이끌고 있다.
이 부회장은 이건희 회장 자택에서 수시로 독대를 하면서 현안을 챙기는 동시에 이 회장 식구들과 식사도 하고 공연 관람도 같이 할 정도의 사이로 알려진다. 삼성 본관 맨 꼭대기 층엔 이 회장과 이 부회장의 집무실이 나란히 붙어있다고 한다. 이건희-이재용 부자의 지분 승계와 재산관리 과정에 깊숙이 개입해 온 것으로 알려진 이 부회장의 위상을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지난 2004년 불법 정치자금 제공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은 이 부회장은 이 회장과 정치자금 제공이 무관함을 일관되게 강조하는 충성심을 발휘하기도 했다. 당시 이 부회장은 <신동아>와의 인터뷰를 통해 “구조본 차원에서 비자금 조성하는 일은 꿈도 못 꾼다”고 밝혔다. 이학수 부회장에 대해 반감이 큰 것으로 알려진 김용철 변호사 같은 사람이 나타나지 않고는 절대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을 사안이었다는 지적인 셈이다. 그만큼 차명계좌는 인맥과 충성심으로 빚어진 조직문화를 통해 관리돼 온 것이며 그 중심에 이 부회장이 있었던 것이다.
이건희 회장 체제를 충실히 떠받쳐온 든든한 기둥이었지만 이 부회장의 향후 입지가 불투명해진 마당에 이 회장이 결단을 내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검찰은 삼성 경영권 승계와 로비 의혹은 곧 출범할 특검에 맡기고 비자금 수사에만 주력할 것이라 밝혀왔다. 1000개가 넘는 차명 의심 계좌에 대한 조사가 이뤄지는 동시에 이 부회장 소환설이 흘러나오는 것을 두고 비자금 혐의 입증에 대한 검찰의 자신감 표출되는 것이라 보는 시각도 있다.
전략기획실을 이끄는 이 부회장과 김인주 사장은 모두 재무팀 출신이다. 지난 1997년 삼성자동차 사태 이후 재무팀 출신이 그룹 내 주도권을 잡은 뒤 자신들의 재무관리 장기를 살려 차명계좌와 비자금 관리를 해왔다는 의혹을 피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결국 현실화될 것 같지 않았던 이 부회장의 권력 축소나 2선 후퇴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이건희 회장이 꺼내들 수 있는 거액의 사회 헌납, 경영 2선 후퇴, 그리고 전략기획실 축소 개편 등은 내년 2월 새 정부 출범을 전후로 그 윤곽이 잡힐 것이란 지적이다. 특검 수사기간이 내년 3월~4월까지 지속될 것임을 감안해 드러날 만한 혐의점들이 구체화되고 나면 대국민 사과성명을 통해 다시 한 번 여론 달래기에 나설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대선후보들이 대부분 현 정권을 향해‘기업 활동에 많은 규제를 가해왔다’고 비판해온 점을 감안하면 새 정부는 기업 친화적 성격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금산법)과 금융지주사법 적용 여부는 이건희-이재용 부자의 순환출자구조를 통한 삼성그룹 지배 근간을 흔들 수 있었다는 점에서 삼성이 해당 법률 개정 로비에 총력을 기울였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이건희 회장 입장에선 오욕으로 뒤덮인 현 정권 말미를 머리 조아리고 보낸 뒤 친 재벌 성향의 새 정부의 관대한 처분에 기대를 걸어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회장이 내년 2월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