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특사단장으로 오는 21일 워싱턴을 방문하는 정몽준 의원. 차차기 예비 주자로서 그의 정치적 행보가 주목된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2002년의 일이야 일단 제쳐 놓더라도 정 의원이 대선 직전 혈혈단기로 한나라당에 뛰어들어 이 당선과 손 한번 맞잡은 것으로 과도한 대접을 받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치 관측통들은 정 의원을 차차기 예비 주자의 하나로 올려놓는데 결코 인색하지 않다. 물론 여러 가지 단서가 붙어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과연 정 의원이 차차기 예비주자로 손색이 없을까. 그의 가능성과 약점을 짚어본다.
2002년 ‘이루지 못한 꿈’을 가진 정몽준 의원이 이명박 당선인의 미국 특사단장으로 오는 21~27일 워싱턴을 방문한다. 대선 직전 한나라당 입당과 이명박 당선인 지원에 이어 4강 외교의 핵심 축인 미국 특사단을 이끌게 된 정 의원을 보는 여의도 정가의 시각은 다소 복잡하다.
그만큼 정 의원은 여의도에서 ‘특이한 존재’다. 지역구인 울산 동구에서 13대부터 내리 5선을 기록했지만 동료의원들은 아직도 그를 ‘정치인’으로 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이유는 여러가지다. 먼저 그의 ‘신분’이다. 정 의원은 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6번째 아들이다. 현대중공업의 실소유주다. 말 그대로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가의 ‘혈통’이다. 국회의원들로서는 거리감을 느낄만한 요인이다.
두번째는 그의 활동영역이다. 정 의원은 오랫동안 스포츠분야에 주목받아 왔다. 그는 1993년부터 대한축구협회장을 맡고 있다.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이기도 하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의 주역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국민은 거의 없다. 많은 국회의원들이 스포츠를 즐기고 가끔 경기단체나 연맹회장을 맡기도 하지만 이렇게 ‘올인’하지는 않는다. 동료의원들이 체육인 정몽준을 먼저 떠올릴만한 요인이다.
세번째는 정 의원의 개인적 성향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정 의원이 외향적이지는 않지만 ‘사교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치인과의 접촉에서 정 의원은 항상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게 그를 만나본 의원들의 평이다. 기자 역시 오랫동안 정 의원을 알고 있지만 그가 소리 내어 웃는 모습은 10여년 전 울산 동구의 한 운동장에서 축구 경기를 하면서 본 게 끝이었던 것 같다. 자신에게 엄격함을 유지하는 것이 몸에 배인 정 의원의 스타일도 한 요인으로 보인다.
네번째는 그의 정치적 행보다. 정 의원은 여의도에서 ‘무소속 중진’이라는 닉네임을 갖고 있다. 정 의원은 민자당, 아버지가 만들었던 국민당, 자신이 만든 국민통합21에서 잠깐씩 정당인으로 활동했지만 대부분은 무소속으로 있었다. 이번에 한나라당에 입당한 것이 네번째로 정당인이 된 것이다. 정 의원이 무소속 중진이 된 것은 정당에 못 들어 간 측면과 안 들어간 측면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현실적으로 기업인이자 정치인이라는 그의 이중적 지위가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하다.
다섯번째는 정 의원의 정치성향이 제대로 부각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2002년 대선 당시 정 의원은 당시 민주당과 한나라당으로부터 동시에 ‘구애와 견제’의 대상이었다. 진보냐 보수냐는 색채가 불투명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이다.
그런 정 의원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했다. 그것도 차기 대통령이 가장 중시하는 대미외교의 특사로 차기 대통령의 친서를 들고 방문하게 됐으니 정치인 정몽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정 의원과 오랫동안 접촉해온 울산 출신의 한 의원은 “아마도 어떤 ‘생각’을 가지고 (한나라당에)왔을 것”이라며 “그러나 그는 ‘뿌리’가 없다”고 말했다. 두 가지를 뜻한다. ‘어떤 생각’은 당연히 차차기 대권이다. ‘뿌리’는 정치적 세력이다.
▲ 지난 9일 이명박 당선인,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 등과 함께 서울 통의동 당선인 집무실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공동취재단 | ||
이 당선인으로서는 안정적인 국정운영의 토대를 확보해야 한다. 오는 4·9 총선에서 과반수를 확보해야 한 것이 과제다. 그것도 친이계가 주도하는 한나라당이어야 한다. 하지만 당에서 박근혜 전 대표의 영향력은 여전하다. 이재오 전 최고위원이 총대를 메고 당을 온전히 장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박 전 대표가 움켜쥐고 있는 영남권을 파고들기에는 한계가 있다. 부산에서 태어나 울산에서 5선을 한 재벌가 출신으로 전국적 지명도를 가진 정 의원은 그래서 박 전 대표를 견제하기 위한 카드로 해석되고 있다.
정 의원의 입장에서도 더 이상 ‘여의도 낭인’으로 있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차기 총선에서 현대중공업의 도시로 불리는 울산 동구 선거구에서 정 의원이 낙선할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된다. 2개월 여 뒤 6선의원이 되더라도 무소속 상황에서는 ‘선수를 한번 더 쌓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렵다.
정 의원은 아버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꿈이자, 자신의 꿈인 대권 도전에서 좌절한 경험을 갖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정 의원이 가장 뼈아프게 생각한 것 역시 정치 세력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 의원은 한국전쟁 이듬해인 195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다음 대선이 치러질 5년 뒤면 예순살을 훌쩍 넘는다. 그가 꿈을 향해 뛸 수 있는 시간도 그리 여유가 있는 상황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정 의원의 한나라당 입당은 부산 울산 경남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세력을 확보하기 위한 선택으로 볼 수 있다. 정 의원으로서는 월드컵 4강 신화로 일군 전국적 지명도에 대권 도전 경험에 자신으로 떠받칠 힘만 얻을 수 있다면 꿈을 현실로 바꿀 수도 있다.
하지만 정 의원이 넘어야 할 관문은 그리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는다. 한나라당에 입당했지만 동료의원들은 아직 그를 한나라당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지난 대선에서 이 당선인의 당선에 기여한 부분에 대한 ‘은전’으로 ‘화려한 잔치상’을 받았을 뿐이라는 냉소적 분위기도 있다. 잔치상이 치워지면 손님은 사랑방에서 머물거나 돌아가야 한다. 이 당선인의 손을 잡고 한나라당의 대문을 들어선 정 의원이 사랑방이 아니라 안방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몇 개의 문을 더 지나야 한다.
차차기를 노리는 잠재적 경쟁자들의 견제가 첫문이다. 박 전 대표는 물론이고 이재오 전 최고위원, 강재섭 대표 등이 그들이다. 당장 당내에서 불거지고 있는 공천경쟁에서 정 의원의 역할은 보이지 않는다. 의원들은 공천에 목을 매고, 공천을 확보한 사람을 ‘주군’으로 섬기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공천전장에서 정 의원이 소외되고 있다는 것은 잠재적 경쟁자들에게 밀려나고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공천권은 당의 공천 시스템이 작동하는 공간에 얼마나 많은 자파인맥을 구축하느냐가 핵심이다. 친이와 친박으로 갈라선 지형에서 정 의원이 끼어들 틈은 없어 보인다. 친이계가 정 의원의 ‘얼굴’을 세워준다 하더라도 이 전 최고위원이 버티고 있는 한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 정몽준 의원이 지난해 12월 27일 열린 한나라당 당협위원장 연석회의에서 이명박 당선인과 악수를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 ||
두번째 문은 총선이다. 한나라당의 ‘신참’인 정 의원이 공천에서는 밀린다 하더라도 총선과정에서 우군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회는 있다. 상대적으로 지역구에 강력한 경쟁자가 없다는 점에서 우군을 만들기 위해 뛸 수 있는 여건은 돼 있는 셈이다. 정치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준비해 둔 사람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진다. 전국적 인지도와 5선 의원을 통해 다져놓은 각계의 역량을 동원한다면 최소한 ‘당의 식구’로 확실히 인정받을 수 있다. 총선에서 박 전 대표 등과 나란히 ‘얼굴’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다면 금상첨화가 될 수 있다. 결국 당에 대한 기여도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세번째 문은 결국 자신의 정치적 가치를 높이고 인정을 받아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미국 특사 방문이 첫 시험대가 될 수 있다. 정 의원은 국내에서 중앙고와 서울대를 나왔지만 학맥이 두텁지는 않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반면에 미국 MIT(경영학 석사)와 존스홉킨스대(국제정치학 박사)에서 유학하면서 미국 인맥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사활동을 통해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다소 소원해진 서울과 워싱턴의 관계를 복원해 낸다면 한나라당에서 뿌리를 내리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정치적 비전을 당과 국민에게 각인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정 의원의 네번째 문이다. 2002년 정 의원에 대한 국민적 기대와 열망은 보수와 진보 정당을 막론하고 이전투구식 행태를 보인 정치에 대한 반감에서 촉발된 경향이 강하다. 물론 월드컵 4강 신화도 한 몫 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정치인답지 않게 합리와 효율을 추구하는 정 의원의 모습에서 서방선진국 정치인의 모습을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은 엄밀히 말해 정 의원을 둘러싼 외생적 변수가 정치적 변수로 전환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 의원 스스로가 분명하고 확실한 정치적 지향을 추구하면서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라는 이미지와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한나라당의 ‘좌장’들이 모여 앉은 중청(중앙마루)에 오르려면 새로운 도전자들과의 관계를 풀어내는 것도 숙제중의 하나다. 당 안팎에서는 원희룡 의원이나 오세훈 서울시장, 김문수 경기지사, 김태호 경남지사 등이 차차기를 노린다는 말들이 흔히 들린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한걸음 뒤에 물러나 있다. 당 안에 들어온 정 의원이 이들 ‘제후’들을 끌어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가능성의 정치인’으로 불리는 정 의원이 한나라당에서 뿌리를 내리고 꿈을 펼치는 것이 가능할 지, 차기 정부 출범과 총선을 전후한 격랑기의 행보가 주목되고 있다.
정기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