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만복 국정원장의 방북 대화록을 유출한 장본인이 자신이라고 밝히면서 파문이 커지고 있다. 사진은 김만복 국정원장이 노무현대통령에게 업무보고를 하는 모습(위)과 남북정상 회담 때 북측 김양건 부장과의 회담 모습 . | ||
과거 정권 교체기만 되면 어김없이 반복돼 온 정보기관장 수난시대가 이번에도 재연되고 있는 분위기다. 김 원장이 왜 대선 하루 전날 극비 방북을 했고 특정 언론에 대화록을 유출했는지 등 각종 의혹이 증폭되면서 그의 아리송한 행보를 둘러싼 뒷말도 무성하다. 취임 전부터 뒷말이 많았던 김 원장이 결국 불명예 퇴진과 함께 ‘사법처리’도 배제할 수 없는 극한 상황으로 몰리고 있는 형국이다. 국정원 개원 45년 만에 처음으로 공채 출신 수장으로 발탁돼 화제가 됐지만 재임기간 중 잦은 돌출 행동으로 구설수에 오르내리다 스스로 사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김 원장의 파란만장했던 정보맨 역정을 들여다 봤다.
김만복 원장은 15일 국정원 국가정보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김양건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장과의 대화록을 유출한 장본인이 자신이라고 밝혀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김 원장은 물의를 일으킨데 대해 사과하고 사퇴 의사를 밝힌 뒤 기자들의 질문에 응하지 않고 곧바로 퇴장했다.
대신 국정원 측은 대화록 작성 배경과 관련해 “김 원장과 김 부장 간 환담 보고서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와 언론의 ‘대선 하루 전 방북 목적’에 대한 의구심 해소를 위한 참고자료로 작성했다”고 설명했다. 김 원장이 지난해 대선 하루 전날인 12월 18일 남북 정상회담 기념 식수 표지석 설치를 위해 방북했으나 한 방송에서 김 원장 방북 사실을 보도(1월3일)한 이후 일부 언론에서 대선을 겨냥한 ‘북풍 기획’ 의혹을 제기함에 따라 적극적으로 해명할 필요성을 느꼈다는 것이다.
국정원은 또 문건의 언론 유출 경위와 관련해서는 “김 원장이 9일 의혹 해소 차원에서 평소 친분이 있는 중앙일보 간부 및 국정원 퇴직직원 등 14명에게 인수위 보고자료를 제공했다”고 설명했다. 언론의 특종 경쟁으로 사실과 무관한 추측 보도가 양산되면서 의혹이 증폭됨에 따라 정확한 사실관계를 알리고 국익 훼손을 막기 위한 적절한 대책 마련 차원이었다는 주장이다. 이에 따라 김 원장은 9일 오전 직접 중앙일보 간부에게 전화를 걸어 비보도를 전제로 자료를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한 뒤 국정원 간부 C 씨를 통해 이를 전달토록 지시했고 이 간부는 당일 오후 3시쯤 밀봉된 서류 봉투를 전달했다고 설명했다.
국정원의 이같은 해명에도 불구하고 김 원장의 돌출 행보를 둘러싼 의혹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김 원장이 대선 하루 전날에 극비 방북을 한 진짜 이유가 무엇이고 김 부장과의 비밀회동 내용이 담긴 대화록을 유출한 배경 등에 대한 의혹이 증폭되고 있는 형국이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김 원장이 대선 하루 전이라는 민감한 시점에 극비 방북을 한 배경에는 ‘북풍 기획’과 무관치 않을 것이란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반면 일부에서는 ‘차기 정부와의 뒷거래’ 의도가 깔려 있었을 것이란 의혹도 감추지 않고 있다.
김 원장이 문건을 언론에 유출한 행위가 불법이고 비상식적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실행에 옮긴 배경을 둘러싼 해석도 다양하다. 언론을 통한 방어 차원이었다는 김 원장의 해명과는 달리 그가 의도적으로 유출했을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김 원장이 이명박 당선인에게 호의적으로 보이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김 원장은 대화록에서 “이명박 후보의 당선이 확실시된다”고 발언하는가 하면 “이 후보가 더 과감한 대북정책을 펼 수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대선 과정에서 국정원이 주도적으로 이 당선인 뒷조사와 BBK 사건의 핵심인물인 김경준 씨 입국을 기획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던 만큼 이 당선인에게 호의를 보이기 위해 자신에게 유리한 내용의 정보 유출이라는 전례 없는 공작을 시도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끊이질 않고 있다. 앞서 김 원장은 수차례에 걸쳐 인수위 인사들과의 면담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 원장이 과거 정보기관 수장과는 달리 유독 정치 지향적이었다는 사실도 이러한 의혹을 부추기고 있다. 김 원장은 지난해 9월 아프간 피랍 사건과 관련해 현지를 직접 방문하는가 하면 현지에서 언론과 인터뷰로 신분을 노출시켜 적잖은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인 인질 19명이 석방된 직후에는 협상 주역인 국정원 직원(일명 ‘선글라스 맨’)과 함께 언론에 나와 자신의 공적을 치켜세우는 보도자료를 뿌리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돌출 행보에 대해 대부분의 언론은 ‘과다노출증’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제2차 남북정상회담 기간 중 평양에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악수하면서 허리를 너무 굽혀 인사한 것에 대한 비난 여론도 거셌다. 출신지역인 부산 기장군 주민들을 국정원에 견학시키고 출신학교 동창회 홈페이지에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공개하는 등 정치적 행보를 서슴지 않아 4월 총선 출마설이 나돌기도 했다.
▲ 김만복 국정원장이 아프간 피랍 사건 해결 후 현지 언론에 자신의 신분을 노출시켰던 모습(위)과 남북 정상회담 때 김정일 위원장과 악수하는 모습. 당시 허리를 너무 굽혀 비난을 샀다. | ||
문서 유출 파문은 김 원장 개인의 불명예 퇴진 및 사법처리 여부를 떠나 정치권의 자존심 싸움으로 비화되고 있다. 김 원장의 사표를 청와대가 “신중하게 처리하겠다”며 보류 입장으로 선회했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15일 김 원장이 사퇴 의사를 밝히자 “사표 수리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며 ‘신속 처리’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은 다음날(16일) “김 원장의 방법은 부적절했지만 방북에 대해 북풍공작·정상회담 대가 제공설과 같은 의혹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이를 해명할 필요성이 있었다고 본다”며 “일각에서는 국정원 배포 문서 내용을 국가기밀이라고 단정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보기 힘들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천 수석은 또 17일 일부 언론이 김 원장의 방북 이유를 ‘남북정상회담 뒤처리’ ‘북한과의 뒷거래’ 가능성과 연관시키는 의혹 기사를 게재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한나라당은 김 원장의 방북사실이 공개된 날부터 ‘국정원과 청와대의 북풍기획에 대한 의심을 피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며 대립각을 세웠다.
청와대의 이러한 입장 선회 배경에는 한나라당과 인수위 측이 문건 유출 사건을 국기문란 행위로 규정하는 등 ‘북풍’ 쪽으로 몰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김 원장의 사표를 곧바로 수리할 경우 이번 파문이 남북정상회담 자체를 포함한 노 대통령의 대북정책에 대한 전방위적 공세로 연결될 가능성을 우려한 전략적 판단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16일 “검찰은 국정원장의 방북이 대선용 북풍 계획이 아니었는지를 밝혀야 한다”며 “김 원장의 갑작스러운 사의 표명은 비밀 방북 사건의 본질을 감추고자 하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청와대를 압박한 바 있다. 인수위 측도 이번 사건을 참여정부의 색깔이 진하게 묻어 있는 국정원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 메스를 들이대는 계기로 삼겠다며 비공개로 개혁작업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나라당은 또 청와대의 김 원장 사표 수리 보류 방침에 대해 “형사상 책임을 추궁해야 함이 마땅한데 청와대가 감싸고도는 저의가 의심스럽다”며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한나라당과 인수위 측은 김 원장이 퇴진하고 자연인 신분에서 검찰 수사를 받게 될 경우 노 대통령의 국정행위와 관련한 검은 커넥션이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고 이 경우 4월 총선에서 또다시 완승을 거둘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 실제로 김 원장은 지난해 10월 열린 2차 남북 정상회담을 막후에서 조율한 바 있고 아프간 피랍 사건을 해결하는 배후조정 역할을 맡기도 했다. 정치권 주변에서는 ‘정상회담 뒷거래’ 의혹이 끊이질 않았고 아프간 인질 석방 과정에서도 ‘수백억 지불설’ ‘이면합의설’ 등이 불거지기도 했다. 참여정부에서 불거진 초대형 의혹사건의 정점에 항상 김 원장이 있었던 만큼 그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되면 뭔가 큰 수확을 건질 수 있을 것이란 게 한나라당 관계자들의 시각이다.
이처럼 김 원장 사표 수리 여부를 놓고 청와대와 인수위 측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는 가운데 검찰의 수사 추이 및 그 결과에 정치권의 이목이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이미 김 원장이 대화록을 유출한 것이 형사처벌 대상인지에 대한 법리 검토에 착수한 상태다. 김 원장이 유출한 대화록 14부의 원본을 확보하는데 주력하고 있고 이 원본을 어떤 경로로 전달했는지도 파악 중이다.
대화록 내용이 ‘비밀’에 해당되는지와 유출 행위가 현행법 위반인지 여부가 핵심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내용이 비밀이어야 형법상 비밀누설 혐의를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화록의 ‘비밀’ 여부에 대해서는 검찰과 법조계의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지만 어떤 형식이 됐든 김 원장이 검찰 수사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란 게 법조계 관계자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따라서 김 원장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되고 이 과정에서 대형 사건을 둘러싼 각종 의혹 중 일부라도 사실로 드러날 경우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는 또다시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 없고 4월 총선을 앞둔 정치권도 거센 격랑에 휩싸일 것으로 관측된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