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친구는 또 한 명의 탈북여대생의 얘기를 전해 주었다. 얼굴도 예쁘고 마음씨도 고운 착한 그 탈북여대생은 하루에도 몇 개씩의 아르바이트를 뛰면서 억척같이 돈을 벌었다. 아직 북한에 있는 동생을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열심히 살던 여대생이 어느 날 고층 아파트 위에서 떨어져 자살을 했다. 사회적 편견과 차별의 철벽을 넘지 못하고 절망한 것 같다는 얘기였다.
친구목사는 그들에게 주어야 할 진짜 중요한 것을 우리는 빠뜨리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게 무엇일까. 이따금씩 집에 와서 청소를 도와주는 조선족 출신 아주머니가 있다. 부모가 당원이었다며 엘리트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등소평 이후의 풍족한 중국보다 모택동의 평등한 시절이 더 좋다고 했다. 가난한 사람은 뼈가 휘도록 일해도 살기 힘든데 부자는 아무 일을 안 해도 집안에 먹을 것이 썩어 넘쳐나는 중국은 더 이상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얼마 전 사형을 당했다는 중국재벌의 말을 전해주었다. 수십 조의 재산을 축적했던 중국 재벌은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가게나 하나 하면서 가족들과 즐겁게 살 건데”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생활에 필요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결국 중요한 것은 차별이 없는 인간다운 삶인 것 같다. 박근혜 대통령이 북한의 난민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이미 탈북민이 3만 명을 넘는 시대다. 그들은 중국동포보다 대접을 못 받는 하층민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상대적 빈곤감이 덜한 북한이 좋았다고 그들은 후회할 수도 있다. 수채화 물감처럼 그들을 우리의 일부로 융화시킬 수 없는 사회는 미래의 통일한국이 될 수 없다.
깊은 생각이 결여된 정책은 울리는 꽹과리가 될 수도 있다. 넘어오는 그들을 홈스테이로 맞아들일 정도로 대한민국의 가정들이 이웃사랑으로 성숙해 있는 것일까. 아직은 편견과 차별이 있는 것 같다. 며칠 전 시리아 난민촌에서 오랫동안 일한 경험이 있는 목사를 만났다. 난민들을 지켜보면 영혼이 메말라 있기 때문에 먼저 그들의 마음 밭을 촉촉이 적셔주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야 사랑의 씨를 제대로 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난민들에게 그들이 받는 빵 한 조각 생수 한 병이라도 감사함을 느끼도록 먼저 가르친다고 했다. 감사를 아는 것이 삶의 기본이라고 했다. 그 다음은 베푸는 사람의 자세다.
시리아 난민 아이들이 그에게 한국인 아저씨는 우리한테 뭘 주러 왔어요? 하고 물었다고 한다. 그는 “목숨을 주러왔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 한마디에 모든 철학이 녹아 있었다. 잘난 척하며 주는 이에게 감사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사회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진정한 알맹이가 있는 것일까. 뒤처진 사람들을 챙기고 공평한 기회를 주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엄상익 변호사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