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의 세계유산 등재 여부가 내년 결정된다. 사진은 흥인지문-혜화문 성곽의 야경. 최준필 기자
한양도성은 조선왕조의 도읍지인 한성부 도심의 경계를 표시하고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이다. 태조 5년(1396)에 도심을 둘러싼 백악(북한산)·낙타(낙산)·목멱(남산)·인왕의 내사산 능선을 따라 성을 축조한 후 여러 차례에 걸쳐 개축했다. 높이 5~8m에 총 길이는 약 18.6㎞, 면적은 46만 7922㎡에 이른다. 특히 자연의 선을 손상시키지 않고 지형을 그대로 따라가며 성을 쌓아, 사람과 자연의 공존을 추구한 우리 민족 전통의 정신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산자 김정호가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한양의 지도 ‘수선전도’(首善全圖)에서도 도성 성곽의 자연스러운 곡선미를 확인할 수 있다.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랫동안(1396~1910, 514년간) 도성의 기능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된다. 천만 인구가 거주하는 대도시에서 이 정도 규모의 옛 성곽이 남아 있는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또한 도성 곳곳에 우리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국시대 이래 우리 민족이 발전시켜온 축성 기법을 계승하였고, 조선시대 성벽 축조 기술의 변천 및 발전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북악산 구간 성곽길.
이뿐만 아니라 축성과 관련한 갖가지 정보도 여러 문헌에 기록으로 남겨져, 한양도성은 인문학적으로도 가치가 크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연려실기술> 등을 보면 성벽과 문루의 보수, 새로 조성한 시설물, 성벽에 사용된 돌과 나무를 구해온 곳, 건물의 현판을 쓴 사람 등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다. 도성의 개보수에 관여한 박자청의 경우, 조선 최고의 토목 전문가로서 사졸로부터 출발해 종1품의 지위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로 알려진다.
도성에는 동서남북으로 한양을 대표하는 4개의 대문(흥인지문·돈의문·숭례문·숙정문)과 4개의 소문(혜화문·소의문·광희문·창의문)을 두었다. 이 중에서 숭례문은 조선에서 가장 큰 문으로 외국 사신들이 오가는 외교 통로였고, 흥인지문(동대문)은 4대문 중 유일하게 방어와 공격을 위한 옹성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험준한 산악지역에 자리한 북쪽의 숙정문은 음양오행 가운데 물을 상징하기에 가뭄이 들 때에는 기우를 빌며 열고, 비가 많이 내리면 닫았다고 한다.
한양도성은 근대화 과정에서 상당 부분이 훼손됐는데, 특히 일제강점기 때 피해가 컸다. 소의문은 1914년에 헐렸으며, 서쪽의 관문이던 돈의문(서대문)의 경우 1915년 멸실됐다. 일본인들이 성문과 성벽을 건축자재로 경매에 붙여 헐값에 팔아버렸기 때문이다. 혜화문과 흥인지문의 주변 성벽도 헐려 성돌이 석재로 사용되기도 했다.
훼손된 한양도성의 중건(고쳐 지음)이 시작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다. 하지만 성곽을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는 일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뤄질 수 없다. 2014년을 기준으로 한양도성은 전체 구간의 70%가량이 남아 있거나 중건된 상태다. 숙정문, 광희문, 혜화문을 고쳐 지었지만, 광희문과 혜화문은 부득이한 사정으로 원래 자리가 아닌 곳에 세워지게 됐다.
한 가지 희망적인 것은 한양도성을 되살리기 위한 움직임이 차츰 확대되고 있고, 많은 국민들이 순성(성을 두루 둘러보며 구경하는 일)에 나서며 ‘도성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성곽 둘레길을 걸으며 힐링도 하고 우리 문화와 역사도 돌아보는 것인데, 사실 이러한 풍습은 이미 조선시대에 시작됐다. 그 시절 과거를 보러 온 선비들이 한양도성을 한 바퀴 돌며 급제를 기원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 모습이 도성의 백성들에게 전해지면서 ‘순성놀이’라는 풍습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실제로 정조 때 학자인 유득공의 저서 <경도잡지>에도 지금의 성곽 둘레길 걷기 같은 순성놀이가 등장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얘기가 실감 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