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맨 오른쪽)이 재정경제원 차관에서 물러난 지 10년 만에 복귀했다. 사진은 지난 1월 삼청동 인수위 대회의실에서 열린 기획예산처 업무보고. | ||
김 전 차관의 평소 인품이나 실력으로 볼 때 별로 비토를 놓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이이기에 더욱 궁금증이 인다. 한데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다. 김 전 차관은 대표적인 ‘강만수 사단’의 인물로 김 전 차관을 금융위 수장으로 앉힐 경우 강 장관의 힘이 지나치게 비대해짐을 두려워해서란 것이 권력 핵심층에서 흘러나오는 비토의 이유다. 그렇다면 정녕 강만수란 인물이 그토록 파괴력이 있는 것일까. 소망교회를 통해 이명박 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됐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는 강 장관은 어떤 사람일까.
‘올드보이’. 친정인 기획재정부(옛 재정경제부)로 귀환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을 두고 세간에서 일컫는 말이다. 강 장관이 1998년 3월경 옛 재정경제원 차관에서 물러났으니 딱 10년 만이다. 그의 복귀를 두고 기획재정부는 극도로 술렁거리고 있다. 장관을 모셔야 하는 기획재정부 직원들이 예전부터 그를 지켜봤으면 그의 행보를 예측할 수 있지만 그동안 야인으로 지내며 정부쪽에 전혀 얼굴을 비추지 않아 그가 앞으로 어떠한 발걸음을 보일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의 등장으로 기획재정부의 각 조직이 어떤 식으로든지 새판이 짜일 텐데 역시 이것도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1·2급 고위공직자의 경우 최악의 경우 옷을 벗고 나갈 수도 있는 상황이다. 목숨이 강 장관에게 달려있는 셈이다. 결정적으로 그가 상당히 사람을 ‘편애’한다고 알려진 점도 강 장관과 인연을 맺지 못했던 기획재정부 직원들에게 공포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강 장관의 프로필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강고집’이다. 그가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내정되자 각 일간지에서는 대부분 그렇게 제목을 뽑았다. 그는 원칙을 중요시하는 스타일로 소위 ‘에프엠(FM·야전교범)’으로 행동한다. 재무부 과장 시절에 장관의 지시에 오류가 있다며 4시간 동안 버티는가 하면, 재무부 이재국장 시절에는 정영의 당시 재무부 장관의 지시를 거부하다 국제금융국장, 공보관으로 한직을 떠돌기도 했다. ‘경주 최 씨 고집’이란 말에 빗대 ‘재무부 강씨 고집’으로 불리는 것도 그래서다.
그를 오랫동안 지켜봤던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아무래도 공무원은 위에서 시키면 자기의 소신을 꺾는 경우가 많다”면서 “그러나 강만수 장관은 원칙을 세우면 꺾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타협하지 않으며 정치권에서 뭐라 해도 이를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보니 아군보다는 적군이 많았다고 과천 관가에서는 평가하고 있다.
더욱이 강 장관은 그다지 친화력을 갖춘 인물이 아니다. 정치적인 행동도 잘 못한다. 그런 단면을 읽을 수 있는 것은 바로 IMF 외환위기 때다. 그 당시 그는 재정경제원 차관으로 국제통화기금(IMF)과 구제금융을 협의하는 최고 실무자였다. 그러나 막상 뉴욕에 가서 외채 협상을 할 때 대표자를 한 인물은 바로 밑의 정덕구 당시 재정경제원 차관보(전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였다.
정 전 의원은 강 장관과 상당히 대조되는 스타일로 상당히 친화력을 갖춘 인물로 정평이 나있다. 부하 직원이나 출입 기자에게 대하는 것을 지켜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정 전 의원은 술자리에서는 옆자리에 앉은 직원이나 기자의 무릎을 툭 치며 스킨십까지 하며 살갑게 대한다. 사석이나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는 육두문자까지 쓴다.
하지만 강 장관은 좀 딱딱한, 말 그대로 ‘FM’으로 행동하는 인물이었다. 김영삼 정부에서 김대중 정부로, 즉 영남에서 호남으로 정권이 바뀌는 과정에서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렇다 보니 재경원(재경부)의 핵심권력은 정덕구 차관보 등 호남인맥이 장악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는 재정경제원의 핵심에서 배제가 됐다.
▲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명박 대통령과 소망교회를 26년 전부터 함께 다니면서 알고 지낸 사이다. | ||
이후 강 장관은 무려 10년간 재기를 위해 몸부림친다. 이는 그가 살아온 궤적을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그는 외환위기 당시 경제 부처 고위 관료였다는 이유로 유관기관장이나 국책은행장으로 가는 ‘전관예우’를 전혀 받지 못했고 당장 오란 곳도 없었다. 퇴임 1년 후에야 무역협회 상근부회장으로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머물고 싶지 않았고 2000년 한나라당의 영입 제의를 받아 무역협회를 떠났지만 공천을 받지 못해 재기는 물거품이 됐다.
4년 후인 2004년에 그는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으며 다시 정치에 노크를 했으나 또다시 공천을 받지 못했다. 결국 그는 낭인으로 지내다 2005년 서울시정개발연구원장으로 가면서 백수생활을 청산했다. 물론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에 부른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과는 1982년 강 장관이 소망교회를 다니면서부터 알고 지낸 사이로 무려 26년 지기다. 이 대통령 측근이 “대통령과 강 장관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말할 정도다. 어쨌든 강 장관은 2005년부터 이 대통령의 경제참모 역할을 하며 부활을 꿈꿔왔고 결국 이뤄냈다.
그렇게 절치부심한 10년이란 세월이 길긴 긴 모양이다. 강 장관이 최근 모습을 살펴보면 사람을 대하는 태도나 성향도 많이 바뀐 듯하기 때문. 그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대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은 과거의 ‘딱딱한’ 모습이 전혀 아니라고 한다. 야인생활을 하면서 그를 변화시킨 듯싶다. 인수위에서의 활동 모습을 지켜본 사람도 이구동성으로 그를 “소탈하고 인정 많은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를 최근 만나 본 기자들은 소탈하고 인간적인 면에 놀라게 된다고 한다. 아들뻘 되는 젊은 기자들과도 농담을 주고받으며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모습은 동네 담배가게 아저씨를 연상시킬 정도라고 한다. 이는 10년 전에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다. 인수위에서 근무했던 한 여직원도 “강 장관이 김윤옥 여사가 인수위원들에게 주고 간 떡의 일부를 내 자리에 슬쩍 놓고 가는 것을 보고 인정이 많은 분임을 알 수 있었다”고 전했다.
그의 한 측근은 “그동안 인생의 쓴맛을 보신 것 아니냐”면서 “과거 혈기왕성할 때의 모습으로만 강 장관을 재단하지 말아달라”고 주문했다. 이 측근은 “원래부터 표현을 잘 안해서 그렇지 상당히 인정 많은 분”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과거 재경원 차관 시절 해외출장 다녀오면서 자신의 비서뿐만 아니라 옆 사무실의 비서들에게 책이나 액세서리를 선물을 주는 따뜻한 성품의 소유자란 것이 이 측근의 전언이다.
그동안 그는 실력이 뒷받침됐기에 원칙을 지켜올 수 있었다. 서울대 법대, 재무부 이재국장, 재정경제원 차관이란 경력을 보면 그는 최고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다. 여기에다 금융과 세제에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을 자랑한다. 옛 재정경제부 관료들 사이에는 지금도 “강 장관 앞에서 금융과 세제는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는 그가 6년에 걸쳐 저술한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부가세에서 IMF사태까지>이란 책에서도 잘 드러난다. 2005년에 발행된 이 책은 공직 시절 그가 직접 입안하고 실행한 정책들을 자세하게 담고 있는데, 관가에서는 이 책을 평가하는데 있어 그의 ‘내공’을 알 수 있는 책이라며 호평 일색이다.
‘강고집’ 강 장관은 이 대통령의 핵심공약인 ‘747공약(연 7% 성장, 국민소득 4만 달러, 세계 7대 강국 도약)’을 주도해 입안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이 공약이 실현된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는 분석이다. 과연 엄청난 ‘내공’을 가진 그가 소신껏 이 정책을 만들었는지 의심이 가는 부분이다. 언뜻 이 대통령에게 휘둘려 소신을 접고 위에서 시키는 대로 정책을 만든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게까지 한다.
외환위기 주범에서 경제 수장으로, ‘올드보이의 화려한 귀환’은 일단 성공했다. 그의 진정한 명예회복은 그가 달고 있는 ‘강고집’이라는 타이틀이 부정이 아닌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도록 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할 듯하다.
조완제 경항신문 기자 jwj@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