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J정권 시절 ‘숨은 실세’로 불린 조풍언 씨는 목포에서 태어나 김대중 전 대통령 일가와 선대 때부터 친분을 맺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 ||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최근 외국인 신분인 조 씨에 대해 출국정지 조치를 취하고 조 씨 명의의 금융 계좌에 대한 추적에 나선 상황이다. 조 씨는 지난 2005년 검찰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횡령 혐의 사건 수사 당시 핵심 참고인으로 지목됐으나 해외에 머물고 있어 구체적인 조사가 이뤄지지 못했다.
당시 검찰은 김 전 회장이 1999년 대우그룹의 해외 비밀금융조직(BFC)을 통해 대우 미주법인의 자금 4430만 달러(당시 환율로 한화 약 526억 원)를 조 씨가 운영하는 홍콩법인 KMC인터내셔널사(KMC)로 우회 송금한 사실을 밝혀냈다. 또한 조 씨가 이 자금을 국내로 송금해 대우정보시스템 주식을 매입하고 대우통신의 TDX(전자교환기) 사업부문의 인수자금으로 사용하려 한 사실을 확인했으나 이 자금의 최종 귀착지와 실제 소유자에 대한 수사는 ‘미완’으로 남아 있었다. 김 전 회장이 옛 대우그룹 위기 당시 조 씨를 통해 이 자금으로 권력 최고위층에 대우의 생존을 위한 로비를 한 것이 아니냐는 게 바로 일각에서 제기된 ‘대우 구명 로비 의혹’의 핵심이다.
조 씨의 이번 귀국에 더욱 비상한 관심이 쏠리는 까닭은 DJ 정권 시절 그가 남긴 ‘미스터리’가 적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에서는 조 씨가 정권의 ‘특혜’ 덕분에 무기 중개업으로 큰돈을 벌었다는 의혹을 제기했는가 하면 몰락하는 옛 대우그룹의 알짜 사업체 등을 권력층의 도움으로 헐값에 사들이고 있다며 ‘특별위원회 결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물론 현재 검찰의 수사는 김 전 회장과 조 씨 사이에 오간 자금의 흐름을 추적하고 이 자금의 실질적 귀착지를 찾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지만 계좌 추적과정에서 옛 권력 실세 등이 연루된 흔적이 발견될 경우 초대형 권력 스캔들로 비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과연 이번 검찰 수사가 의혹만 무성했던 ‘조풍언 미스터리’의 실체를 밝히는 단초가 될 수 있을까.
조 씨의 존재가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 계기는 그가 지난 99년 7월 김대중 전 대통령 소유의 일산 집을 매입한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그동안 미국시민권자로 미국에 거주해온 조 씨는 아직도 일산 집을 그대로 소유하고 있고 최근 국내에 들어온 이후 이곳에 머무르고 있다.
목포에서 선박업을 하던 갑부의 외아들로 태어난 조 씨는 선대 때부터 DJ 집안과 이웃사촌으로 친분을 맺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젊은 시절 DJ가 조 씨의 선친이 운영하던 선박회사에서 일했다는 애기도 있다.
경기고등학교와 고려대(상과)를 나온 조 씨는 지난 73년 기흥물산이라는 엔지니어링 회사를 차렸다. 하지만 사업을 하면서 큰돈을 벌지는 못하고 오히려 몇 차례 부도 위기를 맞기도 했다고 한다. 한동안 공산품 수출에 주력하던 기흥물산은 몇 년 뒤 방산물품 수출입 대리점업을 겸하면서 숨통이 트이게 된다. 이후 사업이 한창 궤도에 오르던 80년대 중반 조 씨는 기흥물산을 동업자에게 넘기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미국에서 주류도소매업으로 자수성가한 조 씨는 90년대 중반 DJ가 정치적으로 ‘유랑’생활을 할 당시 DJ와 아들들, 특히 홍걸 씨에게 적잖은 도움을 줬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같은 조 씨와 DJ 집안의 인연과 친분, 그리고 조 씨의 사업 이력은 DJ 정권 시절 그가 ‘얼굴 없는 실세’로 알려지고 갖가지 의혹에 휘말리는 배경이 됐다.
▲ 2001년 조풍언 씨(가운데)가 당시 김홍일 의원(왼쪽)과 만나는 모습. | ||
지난 2005년 검찰 조사에서 김 전 회장은 “내가 조 씨를 통해 해외 거물 인사에게 빌린 돈을 대우그룹 해외금융조직인 BFC 계좌에 넣었다가 나중에 갚은 것”이라고 526억 원의 성격에 대해 해명했으나 이 돈이 ‘채무변제용’이라는 입증자료를 내놓지는 못했다. 하지만 반대로 이 자금이 로비를 위해 쓰였다는 증거 역시 드러나진 않았다.
검찰과 예금보험공사의 당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 씨는 KMC로 송금된 자금 526억 원을 이용해 김 전 회장의 ‘협조’아래 옛 대우그룹의 알짜 회사들을 인수하려 한 것으로 나타난다. 99년 대우정보시스템 주식 253만 주(전체 주식의 71.59%)를 매입했고 이즈음 아도니스 골프장과 대우통신 TDX사업부문 인수에도 나섰다. 대우통신 TDX사업부문의 경우 조 씨가 대표로 있던 ‘라베스 인베스트먼트’라는 해외 법인을 통해 인수 작업을 진행했고, 아도니스 골프장은 조 씨의 부인 이덕희 씨의 이름으로 매입을 추진했다. 이 3개의 회사 모두 대우 ‘그룹사’ 중 수익성과 채무구조가 깨끗한 ‘알짜배기’로 꼽히던 것들이었다.
조 씨는 당시 이들 사업체의 인수 작업을 추진하면서 500억 대의 거액을 움직였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BFC로부터 송금 받은 액수와 거의 흡사한 셈이다. 하지만 TDX사업부문 인수 건은 훗날 계약이 무산돼 조 씨가 투자금액을 되돌려 받았고 아도니스 골프장 역시 김 전 회장의 부인 정희자 씨가 매각을 강하게 반대해 거래가 무산됐다.
과연 당시 조 씨가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옛 대우그룹의 알짜 회사들을 서둘러 인수하려 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룹의 몰락을 앞두고 있던 김 전 회장이 조 씨를 대리인으로 삼아 알짜 회사들을 사전에 개인 소유로 만들려 했던 것일까. 아니면 조 씨가 그룹의 사활과 관련해 ‘무언가’ 큰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그 대가로 싼값에 넘겨주려 했던 걸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일부의 의혹처럼 김 전 회장이 조 씨를 통해 권력 상층부를 상대로 거액의 구명 로비를 펼쳤고 조 씨가 권력 상층부를 대신해 이 돈을 굴렸던 것일까.
조 씨 측은 자신의 소개로 한 해외 거물이 김 전 회장에게 수백억 대(7500만 달러)의 거액을 빌려줬으며 김 전 회장이 KMC로 해외 송금한 526억 원은 그 돈 중 일부를 되돌려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조 씨 주변에선 조 씨가 이 자금으로 대우계열사 주식 등을 인수해 차액을 남기려 했던 것도 예의 해외 거물에게 갚을 돈이 모자랐기 때문이라고 전하고 있다.
▲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 ||
사실 조 씨의 ‘왕성한’ 비즈니스는 비단 몇몇 옛 대우그룹 계열사를 상대로만 이뤄진 것은 아니다. 조 씨는 2000년 대우정보시스템 주식 중 95만 주를 처분해 얻은 자금 중 291억 원을 해외로 반출했다. 또 다른 법인 명의로 SK텔레콤의 주식을 대량으로 인수하기도 했다(박스기사 참조). 2001년에는 ‘스몰록 인베스트먼트’라는 해외 법인을 통해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 있는 삼일빌딩을 산업은행으로부터 502억 원에 매입했다. 당시 삼일빌딩은 2000년 4월 한국감정원의 감정평가액인 563억 원보다 61억 원이나 싸게 팔린 것으로 알려져 특혜시비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여기서 한 가지 눈여겨볼 대목은 조 씨의 비즈니스 행보가 DJ 정권의 출범 및 퇴진과 거의 궤를 같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조 씨는 DJ 정권 말기가 다가오면서 자신이 국내에서 벌인 ‘사업’들을 서둘러 정리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KMC 명의로 보유하고 있던 대우정보시스템 주식을 몇 차례나 매각하려 하다가 결국 예금보험공사가 가압류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고, 삼일빌딩의 매각도 추진했으나 조건이 맞지 않아 무산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 같은 조 씨의 행보는 그가 DJ 정권 고위 권력층의 영향력에 기대 사업을 벌여왔고 정권 말기가 되자 서둘러 판을 접으려 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낳고 있다. 만에 하나 조 씨의 비즈니스와 고위 권력층이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면 초대형 권-경 유착 스캔들로 문제가 비화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그러나 조 씨에 대한 이번 검찰 수사에서 그를 둘러싼 의혹들이 실체를 드러낼지는 미지수다. 해외 계좌 추적 등 현실적인 어려움 탓에 김 전 회장 횡령 사건과 관련해 BFC로부터 KMC에 송금된 자금의 흐름을 확인하는 정도에서 검찰 수사가 마무리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조 씨 주변에선 그를 “밑지는 사업은 절대 하지 않는 철저한 장사꾼”이라고 평한다. 과연 이번에도 조 씨는 ‘밑천’을 드러내지 않는 사업가로 남게 될까.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