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희 회장의 복심이자 경영권 승계를 위협할 권력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아온 이학수 부회장. 그의 향후 행보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 ||
이학수 부회장은 1946년 경남 밀양 출생으로 부산상고를 나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그가 삼성과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1971년 그룹 공채로 제일모직 경리과에 입사하면서부터다. 제일모직 경리팀은 회장 비서실(구조조정본부의 전신·현재 전략기획실)로 가는 코스로 통할 정도로 그룹 내에서 주목받는 인사들이 대거 포진한 곳이었다. 이 부회장은 공정·품종별 원가관리시스템을 국내 최초 개발한 공로 등을 인정받으며 1982년 비서실에 합류한다.
이건희 회장이 삼성그룹 2대 회장으로 취임한 지 10년이 지난 1997년 이 부회장은 비서실장직에 오른다. 이 회장 취임 초기 소병해 이수빈 현명관 비서실장의 시기가 있었지만 1990년대 초반부터 이미 이 부회장은 이 회장이 가장 신임하는 인사로 자리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비서실장이 되기 전부터 이 회장이 직접 처리하기 껄끄러운 일들을 맡아 처리해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이 부회장이 이 회장의 ‘복심’임을 세상에 알린 계기로 지난 1994년 제일제당(현 CJ) 대표이사 부사장 취임을 들 수 있다. 비서실에 있던 이 부회장이 삼성화재 부사장으로 나갔다가 다시 제일제당으로 갔던 것은 이건희 회장 큰형 이맹희 씨의 장남 이재현 회장 몫으로 제일제당이 보유하고 있던 삼성 핵심 계열사들 지분과 부동산들을 정리하려는 목적으로 풀이됐다. 이 회장의 실질적 대리인으로서 제일제당 계열분리 문제로 불거진 이재현 회장 측과의 첨예한 대립관계를 풀어내는 역할이었다.
당시 이재현 회장의 장충동 자택에 감시카메라가 설치된 일이 공개되면서 삼성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앙금을 남긴 이건희 회장과 이재현 회장 사이에 커다란 신경전이 벌어졌다. 사태가 커지자 이 회장 측은 “조카를 위해 한 일이었는데 오해를 샀다”고 서운함을 밝히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분란이 커지긴 했지만 이 회장이 가족 내 문제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최측근 인사로 이 부회장이 부각되는 계기가 됐다.
제일제당을 떠나 삼성화재 부사장과 사장을 거친 이 부회장은 1996년 비서실 차장으로 원대복귀한 뒤 1997년 1월 비서실장직에 오른다. 이후 비서실이 구조조정본부(구조본·1998년)와 전략기획실(2006년)로 개편된다. 이 과정에서 이 부회장의 영향력은 그룹 계열사 경영 사안들을 수렴해 이 회장에게 보고하고 의견을 들으며 그룹 살림을 좌지우지하게 된다.
▲ 지난 2006년 2월 안기부 X파일 사건과 관련 대국민 사과를 하는 모습. | ||
지난 1997년 말 불거진 외환위기 사태 당시 이 부회장은 이 회장이 직접 나서기 곤란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첨병 역할을 했다. 구조본 내 기획팀 주도하에 추진되던 자동차 사업이 외환위기로 난관에 부딪치자 이를 접게끔 만든 것은 재무팀이었으며 그 중심엔 재무라인에서 잔뼈가 굵은 이 부회장이 서있었다. 이는 재무팀 출신인 이학수 부회장-김인주 사장 라인이 삼성 권력의 핵심에 서는 계기가 됐다. 자동차사업 5년 만인 1999년 6월 30일 치욕스런 법정관리 신청을 하고 나서 다음 날인 7월 1일 이 회장 대신 사내방송을 통해 삼성차 소식을 사원들에게 알린 이 또한 이 부회장이었다.
일각에선 총수의 독단이 부른 비극으로 표현되기도 한 삼성차 사태와 더불어 찾아온 정부의 빅딜 압박 해결 역시 이 부회장 몫이었다. 1998년 재벌 간 빅딜 논의가 나돌 당시 이 부회장과 김태구 당시 대우그룹 구조조정본부장(사장)이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만나 고성을 지르며 격론을 벌였다는 이야기는 제법 유명하다. 이 과정에서 불거진 논리가 바로 ‘처녀-과부’론이었다. 삼성차처럼 모든 내역이 투명한 ‘처녀’ 같은 회사를 무슨 일을 겪었는지 공개도 잘 안 되는 ‘과부’ 같은 대우전자와 맞교환할 수 없다는 논리 설파로 부실덩어리였던 대우전자를 삼성이 억지로 끌어안지 않게끔 만들었다.
이 부회장은 태평로 삼성본관 집무실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이건희 회장과 수시로 독대할 수 있는 유일한 인사다. 이 회장 가족과 이 부회장 가족이 모여 식사나 공연 관람을 함께할 정도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지근거리 보좌가 결국 이 부회장 권력의 걷잡을 수 없는 팽창을 불렀으며 이것이 이건희-이재용 부자의 경영권 승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부정적 시각을 낳았다고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 이학수 부회장(왼쪽)은 지난 4월 22일 삼성의 쇄신안 발표에서 이건희 회장과 동반 퇴진을 선언했다. | ||
재계에 오랫동안 몸담은 인사들은 이학수 부회장과 지난 2005년 사망한 소병해 전 삼성생명 부회장을 비교하곤 한다. 소 전 부회장은 1978년 8월부터 1990년 12월까지 삼성그룹 비서실장을 맡아 고 이병철 창업회장에서 이건희 현 회장으로의 경영권 이양과정의 가교역할을 했다. 소 전 부회장은 1987년 11월 이병철 창업회장 타계 이후에도 3년간 이건희 회장 곁에서 비서실장직을 수행했다. 재계인사들 사이엔 이건희 회장과 동갑(1942년생)이며 이병철 창업회장 시대를 풍미한 소 전 부회장을 이 회장이 존중하면서도 다소 부담스러워했다고 전해진다. 하물며 1968년생인 이 전무에게 22세 위인 이 부회장의 존재가 어떻게 느껴졌을지 짐작해보면 조만간 이재용 전무의 시대를 준비해야 하는 이 회장 입장에선 특검 수사에 이은 ‘이건희-이학수 동반 퇴진’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고 볼 수도 있는 셈이다.
경영 퇴진을 선언한 이 부회장의 향후 행보가 어찌될지도 관심사다. 이 부회장에 앞서 비서실장을 지낸 인사들이 비서실을 떠난 이후 주요 계열사 고위임원직에 오른 전례가 있지만 불구속 기소 처분의 불명예를 안은 이 부회장의 경영일선 재입성에 부정적 여론이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
일각에선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이 비서실장(1993년 10월~1996년 12월)을 지낸 이후 1997년 삼성물산 부회장직에 오르기 전까지 한국공정경쟁협회 이사와 삼성3119구조단장, 성균관대학교 재단 이사를 지낸 사례를 거론하기도 한다. 삼성 계열 공익법인이나 대학 혹은 경제단체 등으로 자리를 옮길 가능성도 열려있는 셈이다. 그러나 삼성그룹 계열사 사장단을 호령했던 이 부회장에게 그런 옷이 어울릴지는 미지수다. 일각에서는 조만간 단행될 사장단 인사를 통한 이학수 사단의 전진배치를 통해 이건희 회장과 더불어 섭정을 펼쳐나갈 가능성도 조심스레 거론된다. ‘이학수’라는 이름 석 자를 삼성에서 당장 지워내기는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