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월 2일 18대 전반기 국회의장에 내정된 한나라당 김형오 의원이 당선 소감 연설을 하며 혼란한 정국을 안정시켜 한미FTA·개헌 등 산적한 문제들을 처리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 ||
18대 전반기 국회의장으로 내정된 한나라당 김형오 의원(5선)은 “혼란에 빠졌다 할 정도로 어수선한 시국 상황을 맞아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며 이렇게 말했다. 김 의원은 지난 2일 실시된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국회의장 후보로 선출됐다. 안상수 의원(4선)과 경선을 벌여 ‘102 대 42’란 압도적인 표 차로 당선됐다.
김 의원은 국회가 정상 개원했더라면 이미 5일 의장에 선출됐어야 했다. 그러나 쇠고기 파동의 여파로 통합민주당과 자유선진당, 민주노동당 등 야 3당이 등원을 거부하면서 당분간은 ‘후보’ 상태로 지내야 할 형편이다.
1947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경남중·고와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김 의원은 언론인(동아일보 기자)으로 출발해 관료(국무총리·청와대 정무비서관)를 거쳐 정치인으로 변신해 만 61세의 나이에 ‘입법부 수장’에 오르는 영예를 안게 됐다. 동아일보 출신 국회의장은 이만섭(14대 전반기·16대 전반기)·김원기(17대 전반기)·임채정 씨(17대 후반기)에 이어 김 의원이 네 번째이며, 특히 17대 전반기 이후 마치 승계라도 하듯 3명이 연속으로 배출된 것이 눈길을 끈다.
‘김형오 기자’가 4년 남짓한 언론계 생활을 접은 것은 1978년. 그가 ‘멘토’(Mentor)로 여기는 강영훈 전 총리와의 만남이 계기가 됐다. 당시 월간지 <신동아>에 몸담고 있던 김 의원이 쓴 ‘해외 한국학자들의 현주소’란 기사를 강 전 총리가 눈여겨본 것이 단초였다. 당시 외교안보연구원장으로 있던 강 전 총리는 김 의원에게 “함께 일하자”고 제의했고, 고심 끝에 김 의원은 강 전 총리의 비서로 자리를 옮겼다.
김 의원은 당시 상황에 대해 “1974년 광고탄압 등 ‘동아사태’를 정점으로 언론환경이 매우 좋지 않았다. 언론인으로서 사명을 갖고 제대로 일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던 차에 강 전 총리를 만났고 결국 전직을 결심하게 됐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강 전 총리가 89년 총리에 임명되면서 다시 이어졌다. 당시 김 의원은 대통령 비서실을 거쳐 86년부터 총리실 정무비서관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강 전 총리를 두 번째 상사로 모시게 된 것이다.
강 전 총리는 그후 90년 1월 3당 합당 후 당시 민자당 대표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YS)에게 김 의원을 추천해 정계입문의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YS는 김 의원의 중·고·대학 선배.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김 의원은 민자당 영도지구당 위원장에 임명됐다.
92년 14대 총선에서 당선되면서 국회에 진입한 김 의원은 96년 15대 총선에서 재선한 후엔 신한국당 기조위원장·한나라당 제1사무부총장·정책위 부의장 등을 지내며 ‘순항’했다. 청와대와 총리실에서 정무비서관으로 오랫동안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정세분석과 현안 대응 등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본격적으로 ‘이회창 총재 체제’로 단장된 1998년 이후 김 의원은 침체기를 맞았다. 같은 부산 의원으로 선수(選數)가 낮은 김무성·권철현·정형근 씨 등이 총재·대선후보 비서실장, 대선기획단장 등을 맡아 ‘실세’로 활약한 데 비해 김 의원은 이렇다 할 역할을 하지 못했다. 2001년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장을 맡은 것이 고작이었다.
한나라당이 2002년 16대 대선에서 패배한 후 최병렬 대표 체제로 재편된 후에도 상황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최 전 대표로선 2003년 6월 당 대표 경선에서 자신과 맞붙었던 김 의원을 중용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당시 경선에는 최 전 대표와 김 의원 외에 서청원 전 대표, 김덕룡 강재섭 이재오 의원 등 당시 내로라하던 중진 6명이 참여했다. 김 의원은 이들 중 6등, ‘꼴찌’를 했다.
외곽을 돌던 김 의원의 존재가 다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박근혜 전 대표와 호흡을 맞추기 시작한 2004년 3월부터였다. ‘3·12 대통령 탄핵’의 후폭풍으로 한나라당이 풍비박산될 상황에서 당을 이끌게 된 박 전 대표가 김 의원을 사무총장에 임명하면서다.
김 의원은 그해 4월 15일 치러진 17대 총선에서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박 전 대표와 함께 선거전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결과는 “고작해야 30~50석일 것”이라던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 121석을 얻는 대성공을 거뒀고 김 의원의 당내 위상은 박 전 대표와 더불어 크게 높아졌다.
이들 둘 사이는 2005년 1월 김 의원이 사무총장직에서 물러나자 박 전 대표가 곧바로 그를 인재영입위원장에 임명할 정도로 돈독했다. 김 의원은 박 전 대표 진영의 핵심이 됐고, 본인도 기자들에게 “내가 아니면 누가 친박(친 박근혜 전 대표)이겠느냐”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철벽’으로 여겨졌던 박 전 대표와의 관계는 2006년 7·13 원내대표 경선을 계기로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김 의원과 박 전 대표의 또 다른 핵심 측근인 김무성 의원이 격돌하게 되면서다. 당시 김 의원으로선 박 전 대표가 ‘교통정리’에 적극 나섰다면 김무성 의원이 출마를 강행하는 사태는 오지 않았을 것으로 보고 몹시 서운해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 국회의장에 내정된 뒤 기쁨을 표현하는 김형오 의원(왼쪽). | ||
김 의원으로선 자신의 원내대표 당선을 도운 MB계에 ‘보답’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실제 원내대표단은 이병석 의원을 수석으로 하는 등 MB계 인사들로 채워졌다. 이때부터 박 전 대표와 김 의원 사이엔 점차 냉기류가 흐르기 시작했고 상호 소통의 기회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박 전 대표와의 관계가 틀어졌지만 김 의원이 MB 쪽으로 방향을 튼 것은 아니었다. 2007년 8월 대선후보 경선 때까지 그는 원내대표를 맡고 있는 점을 들어 당시 1위를 달리던 MB 측의 협조 요청을 거부한 채 철저한 중립을 유지했다. 당시 MB 측 한 핵심인사는 기자들에게 “김 원내대표가 적극적으로 도와준다면 선거가 쉬워질 텐데 영 말을 듣지 않는다”며 “그 사람(김 의원을 지칭) 나중에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경선이 MB의 승리로 끝난 지난해 8월 하순 김 의원은 410일간의 한나라당 역사상 최장수 원내대표의 임기를 끝냈다. 그러자 MB가 그에게 일류국가비전위원장 자리를 제안했다. 비전위원회는 17대 대선 공약을 발굴·입안하는 막중한 역할을 하는 기구로 당내에선 MB가 당 정책위원회를 배제한 채 김 의원에게 이러한 임무를 맡긴 것에 주목했다.
MB의 한 측근 의원은 “김 의원은 실용을 중시하는 MB의 스타일에 딱 부합하는 인물”이라며 “측근들 사이에선 경선 과정에서 이렇다 할 공로가 없었던 김 의원에 중책을 맡기는 데 대해 반론도 있었지만 MB가 밀어붙였다”고 말했다.
대선에서 승리한 후에도 김 의원에 대한 MB의 신임은 오히려 더욱 강해졌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긴 것이 단적인 예. 외부인사(이경숙 숙명여대 총장)가 위원장을 맡은 상태에서 MB의 대선공약을 총괄해온 김 의원은 인수위의 실세였다. 이 위원장의 ‘아린쥐(Orange) 발언’ 등으로 인수위 활동에 대한 평가가 좋지는 않았지만 김 의원은 야당과의 끈질긴 협상 끝에 최대 과제였던 정부조직개편안을 통과시키는 저력을 과시했다.
김 의원이 수장으로 이끌어가야 할 18대 국회는 여야 대치로 제때 개원을 못한 점에서 보듯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당장 한미FTA(자유무역협정) 비준동의안 처리 문제가 마주하고 있고 개헌 문제도 쟁점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다.
▲ 이명박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얻으며 인수위 부위원장으로 있을 당시 이 대통령과 밀담을 나누는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 ||
김 의원은 향후 국회 운영과 관련해 “정치라는 것은 내가 100% 먹고, 남은 1%도 안 주겠다고 해선 안 된다. 서로 상대를 인정해야 한다. 수학과 달라서 정치현상에서는 100% 옳은 것도 없고 100% 틀린 것도 없다”며 “서로 협상하고 인정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신뢰와 성실, 신의를 지켜나가면 안 풀릴 문제가 없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FTA비준동의안 처리 해법으로 전원위원회 소집을 제안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김 의원은 “국회의원 전원이 입장을 표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예컨대 국회에는 전원위원회 같은 회의체가 있다. 전원위원회에서 의원들이 각자의 소신발언을 하고 충분히 얘기가 되었다고 싶을 때 투표로 결정하는 이런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개헌에 대한 강력한 의지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그는 한나라당 원내대표로 있던 2007년 4월 11일 ‘18대 국회 초반 개헌 문제 처리’란 여야 6당 합의를 이끌어낸 바 있다. 김 의원은 “18대 국회에서 개헌은 반드시 해야 한다. ‘원 포인트’(One Point)가 아니라 21세기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 통일·환경·인권·노동·경제 등 각 분야에서 고쳐야 할 것이 너무 많다. 권력구조도 물론 대상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나아가 쇠고기 파동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정국이 어느 정도 안정되면 개헌 문제를 공론화해 향후 2년인 자신의 의장 임기 안에 매듭짓고 싶다는 의욕도 내비쳤다. “의장 자문기구로 개헌 문제를 전담할 위원회를 설치해 차분하게 그리고 제대로 각국의 선진헌법을 비교·연구하는 준비에 들어가겠다”고 밝힌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정치권에선 합리적이고 온건한 스타일에 ‘화합형’ 이미지가 강한 김 의원이 만성적인 정쟁의 장(場)이 된 국회를 여야 정책대결의 무대로 탈바꿈시키는데 기여할 것이란 기대감을 표시하고 있다. 통합민주당의 한 중진은 “어차피 국회의장이 한나라당의 몫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김형오 의장’ 카드는 우리로선 환영할 만한 일이다”라고 말할 정도다. 김 의원이 과연 이러한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을까. 두고 볼 일이지만 가능성이 그리 낮아 보이지는 않는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