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일 오후 정정길 신임 대통령실장이 인선발표가 끝나고 기자들 질문에 답한 후 청와대 본관 충무실을 나서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이제 국민들의 시선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류 전 실장의 후임으로 향하고 있다. 정정길 신임 대통령실장. 그는 과연 류 전 실장이 밟았던 시행착오의 길을 되풀이할까. 아니면 새로운 대통령실장 상을 만들어 이명박 대통령을 성공한 리더로 만드는 데 일조를 할까. 벌써부터 정치권에선 그 해답 찾기로 설왕설래하고 있다. “또 교수 출신이냐”며 손사래를 치는 사람도 있고 “정치 감각이 있고 마당발이라 류 전 실장과는 다를 것”이라며 기대하는 사람도 있다. 현 정권의 ‘좌충우돌’에 학을 뗀 국민들은 후자쪽이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과연 그렇게 될까.
정정길 신임 대통령실장이 이명박 대통령과 몇 가지 닮았다는 점에서 그의 청와대 입성은 어쩌면 이미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먼저 두 사람은 연배가 비슷하다. 이 대통령이 1941년 12월생이고 정 실장은 1942년 5월생으로 동갑에 가까워 동질성을 느끼는 같은 세대라는 점이 눈에 띈다. 또한 두 사람 모두 영남 출신(포항-함안)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는 점도 공동체 의식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다.
여기에 두 사람이 생김새도 ‘투박한’ 편이라 한결 친근감을 느낀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 대통령은 한때 쌍꺼풀 성형수술을 고려했을 정도로 얼굴 콤플렉스가 있다. 정 실장도 두터운 입술이 도드라져 보인다. 그는 최근 대통령실장 하마평에 오른 뒤 한 기자의 사진 포즈 요구에 대해 “(내가) 못생겼잖아. 모델이 잘생기면 아무렇게나 찍어도 되지만 나는 좀…”이라며 쑥스러운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두 사람은 리더십이 있고 보스 기질이 있다는 공통점도 있다. 지난 1964년 6·3항쟁의 주도자 38명 가운데 두 사람이 나란히 속해 있을 정도로 당시 학생운동에 적극적이었다. 서울대에선 김덕룡 전 한나라당 의원과 김정남 전 교육문화수석(김영삼 정권) 조해녕 전 대구시장과 정정길 현 대통령실장이 주도적 역할을 했고, 고려대에선 이명박 경영대학 학생회장 등이 있었다. 6월 22일자 신문에 6·3 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정정길-이명박 등 38명의 이름이 ‘조건부 제적 공고’라는 제목밑에 나란히 실리기도 했다. 이경숙 숙명여대 총장(전 대통령직인수위 위원장)도 이때 인연을 맺었던 ‘친구’였다. 당시 이 총장이 숙명여대 학생회장으로서 투옥된 정 실장에게 면회를 자주 갔다는 일화도 있다.
이명박-정정길 두 ‘친구’는 ‘한일회담 반대’를 외치다 같이 구속되면서 자연스레 친분도 쌓았다고 한다. 당시 구속된 224명(법무부 발표)은 ‘죄질’에 따라 ABC 등급으로 분류됐는데 두 사람은 82명의 ‘공식적’인 주동인물에 포함됐다. 그들은 풀려날 때까지 몇 달 동안 옥살이 동지였고 이후 평생 동지의 길을 걷게 된다. 정정길 대통령실장은 최근 이에 대해 “출옥한 뒤 서로 행정부와 민간 기업에서 일하느라 바빠 못 만나다가 80년대 들어 같이 고생했던 친구들과 함께 모이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처음에 몇몇이 1년에 한두 번 만나 소주를 마시며 그때의 추억을 반추하던 모임은 40년이 넘게 이어졌다.
두 사람은 일 추진력도 비슷하다. 이 대통령은 기업가 시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불도저 스타일이었고 세일즈맨 성공 신화를 썼던 주인공이다. 정 실장도 서울대 대학원장을 역임하다 울산대 총장으로 옮겨가면서 대학가의 성공 신화를 쓴 주역이다. 그는 지난 2003년 울산대 총장에 부임했는데 3년 만인 2006년에 울산대를 지방대 유일의 최우수 대학으로 올려놓는 경영 성과를 이루게 된다. 당시 학계에서는 “정정길 총장의 야심찬 계획과 집요한 노력이 있었기에 지방대 최우수 대학 신화가 가능했다”라고 평가했다. 그를 아는 한 인사는 “정 실장은 행정고시 6회에 합격해 농림수산부 계장으로 3년간 일하다 경북대 행정학과 교수로서 학계에 진출했다. 그런데 그는 학계에서도 워낙 마당발이라 교수가 안 되었다면 분명히 정치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 실장은 그뒤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선발돼(1974년) 미국 미시간대에서 정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그는 한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는 리더가 차지하는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고 대통령학과 리더십을 전공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러한 ‘선견지명’은 결국 그가 대통령을 보좌하는 자신의 전공에 딱 들어맞는 대통령실장 자리를 꿰차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그가 유학했던 미시간대 동문들 가운데 눈에 띄는 인사로는 조욱래 동성개발 회장(이명박 대통령의 사돈인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의 막내동생)과 이홍구 전 총리, 그리고 최근 YTN 사장으로 뽑힌 구본홍 전 이명박 캠프 언론특보 등이 있다.
정 실장은 또한 미시간대에서 국가운영이나 조직관리, 정책 관리 등을 집중 연구한 까닭에 공공부문의 자문 역할을 많이 해 정치권과도 인연이 깊다. 특히 중앙인사위원회 자문회의 의장, 정부기능조정위원장직도 맡아 관료 사회에도 밝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는 이 대통령이 오랜 ‘친구’인 그에 대해 정·관계에 두루 박식해 대통령의 ‘가정교사’로도 손색이 없다는 판단을 한 배경이 된 것으로 알려진다.
정 실장의 경력과 업무 스타일 등을 종합해 보면 왜 이 대통령이 “그동안 여러 차례 대통령실장 직을 맡아달라고 했지만 번번이 고사했다. 그러다 임명 발표 바로 전날에 겨우 승낙을 받았다”라고 할 정도로 그를 신임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정치권에서는 이 대통령의 ‘깜짝 선택’을 두고 ‘제2의 류우익이 되지는 않을지’ 걱정스럽게 보고 있다.
▲ 이명박 대통령이 충무실에서 정정길 신임 대통령 실장 을직접 소개하고 있다. | ||
특히 류우익 전 실장의 시행착오를 경험했던 여권 관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정 실장은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할 수 있는 실장, 당·청 관계를 복원할 수 있는 정무적인 감각이 있는 실장과는 거리가 멀다”라고 지적한다. 이런 비판을 의식해서인지 청와대는 대통령실장이 기본적으로 참모기능을 총괄하지만 정무기능은 정무수석이 전담하도록 역할 분담을 해 상호 견제·보완하도록 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이에 대해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이 대통령이 기본적으로 대통령실장에 대한 인식을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대통령실장은 청와대 내 모든 참모들의 기능을 조정·지휘하는 중요한 자리다. 역대 정권이 초대 비서실장에 왜 중진급 의원 출신을 앉혔겠느냐. 권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청와대 속성상 그것을 조정하는 적임자는 권력 생리를 잘 아는 정치인이 적임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대통령이 대통령실장을 집안 단속을 하는 기능에만 국한시키고 정무수석이 정무기능을 전담하는, 그런 이중적 역할 분담을 해 버리면 분명히 양측 간에 갈등이 발생할 것이다. 특히 맹형규 전 의원이 3선 출신이라 수석직함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었고, 정무기능이 강화될 것이라는 점에서 대통령실장과 정무수석간의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가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라고 말했다.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도 이에 대해 “교수들은 일반적으로 인간 및 조직관리 능력이 약하다. 생동하는 현실을 놓고 논쟁에 시간을 많이 보낸다. 물러나면 돌아갈 대학이 있으니 배수진을 치지 않는다. 자신의 이론에 현실을 우격다짐으로 집어넣으려고 한다. 타이밍을 잘 놓치고, 추진력이 떨어진다. 지금까지 교수 출신으로 성공한 장관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남덕우 경제기획원장(나중에 국무총리) 정도일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정 실장도 일각의 우려를 잘 알고 있다. 그는 “교수 출신이 성공할 가능성이 있겠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사실 저도 걱정이 된다(웃음). 학자 출신으로서는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닌데 제가 폭넓게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또 전공이 행정학이어서 자연히 정부의 여러 위원회 활동을 많이 했고 그런 과정에서 국회의원들도 많이 만났다. 교수 출신치고는 사회 전반에 걸쳐 폭넓게 알아보려는 사람이다. 앞으로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같이 일하고, 고칠 것은 고치고 하겠다”라며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정치권의 이런 비판을 알고 있음에도 왜 이 대통령은 정정길 대통령실장을 ‘구원투수’로 불러들였을까. 정치권에서는 두 가지 해석을 내놓고 있다.
먼저 그가 떠난 류우익 전 실장의 추천에 의해 등용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있다. 실제 정 실장과 류 전 실장은 1980년부터 2003년까지 서울대에서 각각 행정대학원 교수와 지리학과 교수로 생활하며 인연을 쌓았다. 또한 류 전 실장이 서울대 교무처장으로 재직할 때 정 실장이 대학원장을 맡아 서울대 내 대표적인 보직교수로 호흡을 맞춰 지금까지도 계속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는 후문이다. 여기에는 이상득 의원이 그의 영향력을 잃지 않기 위해 류우익 전 실장 대타로 정 실장을 다시 밀어 넣었다는 분석도 있다.
그런가하면 이 대통령이 향후 여권의 대권 구도를 고려해 그를 썼다는 시각도 있다. 정 실장은 한나라당 최고위원인 정몽준 의원이 이사장으로 있는 울산대 총장 출신이다. 어찌 보면 ‘오너’와 ‘고용인’ 관계일 수도 있다. 정 실장이 며칠 전부터 대통령실장직 제의를 받았을 때 정 최고위원에게 조언을 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래서 정 실장이 정 최고위원의 여권 내 ‘전령사’ 내지는 ‘정보의 파이프라인’ 역할을 할 것이란 관측도 나오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최근 이 대통령이 위기 정국에서 박근혜 전 대표가 전혀 도움을 주지 않은 것에 대해 굉장히 실망했다고 들었다. 그래서 향후 대권 구도와 관련해 박 전 대표와 일합을 겨룰 정몽준 최고위원의 위상을 높여주려는 의도에서 정정길 실장을 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말했다. 정 실장이 청와대 핵심에 진입함에 따라 정몽준 최고위원도 권력 핵심 접근이 한결 용이해졌다는 점에서 향후 여권의 권력 운용 구도에도 변화가 있을 전망이다.
사실 정정길 신임 실장과 류우익 전 실장은 여러 가지 면에서 닮았다. 호탕한 성격에 리더십도 갖춘, 교수사회에서는 ‘튀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취임 전 기자회견 멘트도 비슷했다.
류우익 전 서울대 교수는 이명박 정권 초대 대통령실장으로 임명될 때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이 정무에 멍청한 실장이 왔다고 해주는 것은 고마운 말”이라며 “에러가 있어도 봐달라고 할 수 있어서…”라며 짐짓 여유를 보인 바 있다. 정 실장도 똑같은 지적에 대해 “솔직히 걱정이 된다”라며 웃으며 받아넘겼다. 두 사람 모두 교수 출신의 한계를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류 전 실장은 “(정무를) 전혀 모른다는 것은 동의할 수 없다”라고 말하며 자신감을 내비쳤고 정 실장도 마찬가지로 자신감에 차 있다.
그런데 정치권에선 “두 사람의 취임 전 기자회견이 오버랩되면서 마치 지나간 영화를 다시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라는 반응이 나온다. 이명박 대통령이 <신화는 없다>라는 책에서 말한 “실패는 철저하게 자기 자신이 기억해야 한다. 실패를 망각하는 사람은 또 실패한다”라는 말을 이번에야말로 믿고 싶은 것이 국민들의 마음인 것이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