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무대를 평정하고 브리티시여자오픈에서 대회 최연소 우승을 차지한 신지애. 시합에만 들어서면 얼굴이 달라진다는 무섭고도 당찬 스무 살 아가씨다.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하이마트 골프단의 주장을 맡고 있는 서예선은 소속팀 후배이자 친동생처럼 살갑게 지내는 ‘골프 지존’ 신지애에 대해 이런 감상을 내놓았다.
올시즌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마지막 메이저 대회인 브리티시여자오픈에서 대회 최연소 우승을 차지하며 자신의 LPGA 첫 승을 따낸 신지애. 메이저 대회 우승으로 세계 랭킹이 10위에서 6위로 껑충 뛰어 오른 그는 ‘메이저 퀸’이란 수식어를 새로 추가하며 고공 행진을 벌이고 있다.
프로 데뷔 3년차. 그동안 국내에서 19승을 이뤘고 그중에서도 역전 우승이 11번이나 된다. 올해 거둔 일본 무대 첫 승과 함께 한국 미국 유럽 일본 등 세계 4대 여자골프 투어 카드를 모두 따낸 진기록도 세웠다.
강한 정신력과 타고난 승부욕을 내세우는 신지애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엄청나게 바뀌었지만 메이저 대회 우승으로 인해 생활이나 목표가 달라지진 않을 것이라며 평정심을 찾으려 애썼다. 도저히 스무 살의 나이라곤 생각하지 못할 만큼 속이 꽉 차다 못해 터질 지경인 신지애를 지난 5일 인천공항에서 만나 단독 인터뷰했다.
#아버지와 손목시계
브리티시여자오픈 우승 후 성대한 환영과 관심 속에 공항 귀국장을 나선 신지애. 기자들과 간단한 인터뷰를 마친 뒤 식당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아버지 신재섭 씨에게 건넸다. 포장을 풀어보니 엄청난 고가의 명품 손목시계였다. 우승 상금 31만 4464달러(약 3억 2000만 원)를 챙기게 되자 가장 먼저 아버지를 떠올렸다는 신지애. 싸구려 손목시계를 차고 다니는 게 항상 마음에 걸려 내심 벼르고 있다가 이번에 생애 처음으로 큰돈을 쓴 것이다.
“아버지랑 함께 투어 생활을 할 때는 아버지의 카리스마에 눌려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힘들었어요.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두 동생들이 있는데 골프하는 절 뒷바라지하셔야 했으니까 얼마나 고통스러우셨겠어요. 그래서 가끔은 아버지의 존재가 부담과 스트레스를 주기도 했었죠. 하지만 조금씩 철이 들면서 아버지가 걸어오신 길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게 됐어요. 형편도 안 좋으면서 어떻게 절 뒷바라지 해주셨는지 신기할 정도예요. 아버지한테 혼날 각오를 하고 고가의 시계를 구입했어요. 싸구려에 짝퉁 시계만 차 오신 아버지에게 제대로 된 시계를 선물하고 싶었습니다.”
#배짱 영어 인터뷰
신지애는 브리티시여자오픈에서 우승 직후 영국의 BBC 방송과 현장 인터뷰를 가졌다. 당연히 영어로 질문이 던져졌는데 신지애는 통역을 쓰지 않고 직접 영어로 답했다. 당시 인터뷰만을 담은 동영상을 본 기자는 신지애의 과감하고도 당돌한 면면에 깜짝 놀랐다. 영국식 발음에 익숙하지도 않은 그가 무슨 배짱으로 통역을 쓰지 않고 현장 인터뷰에 임했는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비록 문법과 발음은 다소 뒤떨어졌지만 단답형이 아닌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풀어낸 멘트들이 놀라움을 넘어 감동스러울 정도였다.
신지애에게 언제부터 영어 공부를 해왔는지 물었다.
“오래 전부터 생각만 해오다 외국 대회를 다니며 필요성을 절감했어요. 지난 겨울 하이마트 골프단이 필리핀으로 전지훈련을 갔을 때 3주 정도 열심히 파고들었어요. 문법책과 영어 테이프 등을 들으며 발음에도 신경 썼구요. 가장 큰 도움은 올 초 미국인 캐디를 만나면서부터예요. 실전 영어 훈련을 할 수 있었거든요(웃음). 아직 잘 못해요. 그래도 영어 못한다고 해서 창피하거나 쑥스럽단 생각은 안 해요. 한국 사람이 영어가 서툰 건 당연하잖아요.”
▲ 지난 4일 브리티시여자오픈 우승컵을 치켜든 신지애. 연합뉴스 | ||
“자꾸 부딪치고 깨져봐야 실력이 늘어난다고 생각해요. 전 실수한다고 움츠러들지 않아요. 다음에 더 잘하면 되는 거잖아요. 영어도 겁내질 않았어요. 하다보면 다 할 수 있을 것 같더라구요. 외국 방송이나 기자들과 인터뷰를 할 때 비록 ‘옹알이’ 수준이지만 영어로 말하는 게 더 도움이 될 거란 믿음이 있었어요. 그들이 아닌 저한테 말이죠.”
#몸도 맘도 ‘철녀’
신지애의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단어들이 있다. 강철 체력, 강심장, 철녀…. 2003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와 두 동생들의 생계를 위해 18세의 나이에 프로에 입문한 뒤 신지애는 쉼 없이 도전에 도전을 거듭했고 거침없이 내달렸다. 2006, 2007년 KLPGA 무대를 평정한 뒤 일본, 호주, 유럽, 미국 무대를 넘나들며 국내 대회도 빠짐없이 챙기려 했다. 너무나 살인적인 투어 일정으로 인해 골프계에선 신지애가 너무 ‘혹사’당하는 거 아니냐며 우려의 목소리를 드높였지만 신지애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강조한다.
“정말 견디지 못할 만큼 힘든 상황이었다면 이런 저런 대회를 포기했을 거예요. 그래도 할 만하니까,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나라를 돌며 투어를 다녔던 것 같아요. 전 쉬는 것보다 시합에 나가는 게 더 좋아요. 대회장에서 사람들 만나 수다도 떨고 인터뷰도 하고 경험을 넓히는 부분이 휴식보다 더 나아요. 육체적인 피로는 정신적인 고통에 미치질 못해요.”
신지애는 영국 현지 인터뷰에서 자신을 ‘파이널스 퀸(finals queen)’이라고 소개했다. 한국에서 막판 역전 우승을 많이 해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는 설명도 덧붙이면서 말이다. 그래서 신지애에게 연장전에 유난히 강한 면모를 보이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연장전에 가면 더 떨리거든요. 그런데 전 그런 떨림이 좋아요. 그렇게 부담되는 상황들이 승부를 자극시키고 즐기게 만드는 것 같아요. 연장전에 강한 이유가 바로 이런 부분들 때문이에요. 긴장과 부담을 즐기는 것. 프로 데뷔 후 참으로 많은 걸 배워가는데 그중에서도 승부를 즐기는 걸 알게 됐어요. 욕심이 생길 때는 그런 여유를 잃어버려요. 하지만 욕심을 줄이고 우승보다 멋진 플레이를 해보자며 마음을 편히 가지려고 노력해요. 그렇다고 우승에 대한 마음까지 완전히 비우는 건 아니구요(웃음).”
브리티시여자오픈 챔피언조에서 일본의 후도 유리와 마지막 라운딩을 펼친 신지애는 경기 내내 입가에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경기가 잘 풀리든, 안 풀리든 그는 즐거운 표정으로 경기에 임했다. 반면에 상대 후도 유리는 신지애의 미소 띤 얼굴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한마디로 신지애의 카리스마에 일본의 골프 여왕이 주눅 든 것. 이에 대해 하이마트 골프단 주장 서예선은 “나이에 비해 너무 침착하다. 플레이를 보면 불안해 보이지가 않다”면서 “지애가 역전 우승이 많은 요인으로는 지애의 훌륭한 실력도 있겠지만 상대 선수가 지애의 기에 눌려 흔들린 것도 많다. 이번에 후도 유리도 마찬가지였다”라고 설명했다.
▲ 지난 5일 인천공항으로 귀국한 신지애가 축하 전화를 받고 있다. | ||
“LPGA 메이저대회는 에비앙마스터스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였어요. 1라운드부터 선두권에 있었기 때문에 크게 긴장하지 않았는데 대회 마지막 날 경기 시작 직전에 이상하게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하더라구요. 그래서 코스를 돌며 틈 날 때마다 쪽지에 적어 놓은 성경 구절을 읽으며 마음을 진정 시켰어요. 성경을 읽고 마음 속으로 찬송가를 부르면서 그렇게 컨트롤해간 것 같아요.”
#오초아와의 승부
신지애를 인터뷰할 때마다 어김없이 거론되는 선수가 있다. 바로 LPGA 세계 랭킹 1위에 있는 오초아(27)다. 신지애가 메이저대회 우승을 거머쥐자 골프 관계자들 사이에선 ‘오초아를 따라 잡을 수 있는 선수는 신지애밖에 없다’는 기대감을 부풀리고 있는 게 현실이다.
“전 이제 겨우 하나 (우승을) 했는걸요. 세계 랭킹 1위를 상대하기엔 제 구력이 너무 짧아요. 이번 대회에서 오초아 선수랑 많이 가까워졌어요. 내년부터 LPGA 무대에서 자주 볼 수 있게 됐다며 좋아하더라구요. 오초아는 참 묘한 선수인 것 같아요. ‘사람’으로 봤을 때는 착하고 좋은 사람인 것 같고 ‘선수’로 봤을 때는 1인자만이 가지고 있는 어떤 포스가 느껴지는 것 같아요. 굉장히 좋아하고 닮고 싶은 선수입니다.”
신지애는 메이저 대회 우승이 분명 골프 인생의 특별한 ‘선물’이긴 해도 자신을 변화시키진 못할 것이라고 단정 지어 말했다. 우승 전이나 우승 후나 당분간은 국내 대회에 전념할 계획이고 우승 횟수를 늘려 연말 KLPGA 시상식에서 대상을 타는 게 목표라는 소박함(?)도 내비쳤다.
남들이 갖지 못한 자신만의 장점을 ‘나에 대한 믿음’이라고 표현하는 신지애. 인터뷰를 하면서 ‘이 친구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 그의 아우라에 새삼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가 약속한 대로 골프선수로선 성장가도를 달려도 인간 신지애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큰 변화가 없을 것이란 말이 큰 울림으로 전해져 온다. 인터뷰를 끝내고 신지애에게 손바닥을 보여 달라고 했다. 창피하다며 계속 빼다가 잠깐 내보인 손바닥은 온갖 굳은살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그건 그냥 ‘손’이 아닌 진짜 ‘바닥’이었던 것이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