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태환이 자유형 400m에서 금메달을 딴 후 환하게 웃고 있다. 노민상 감독은 제자가 시상대에 우뚝 섰을 때 많이 울었다고 한다. 연합뉴스 | ||
한국 수영대표팀의 노민상 감독(52)은 편하게 얘기할 때 박태환을 꼭 ‘아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12년 전 천식치료에 도움이 될까 싶어 수영장을 찾아온 일곱 살 꼬마 박태환을 만났을 때 나이 마흔 살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박태환은 ‘아이’인 것이다. 세계를 놀라게 한 한국 마린보이의 쾌거는 노민상이라는 집념의 수영 지도자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더욱이 평생을 키운 제자와 올림픽을 앞두고 결별 후 재회라는 극적인 과정을 겪었기에 그의 존재는 더욱 특별하다.
노민상 감독과의 접촉은 어렵게 성사됐다. 15일 박태환이 자유형 1500m예선을 끝으로 모든 경기를 마쳤지만 베이징에도 워낙 ‘마린보이 신드롬’이 몰아쳤기 때문에 직접 만나는 것은 물론 전화통화도 힘들었다. 어렵사리 전화번호를 알아내 수차례 연결을 시도한 끝에 17일 반가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베이징 현지에서 ‘박태환의 참스승’ 노민상 감독이 <일요신문>에 코리안 마린보이 신화의 숨은 이야기들을 털어놨다.
그는 많이 울었다
“허허 그렇죠, 뭐. 마구 눈물이 나대요. 평생 소원이 수영 선진국을 한 번 꺾어보는 것이었는데 최고의 무대인 올림픽에서 우리 아이가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서 있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울지 않겠어요.”
언론 보도를 통해 나온 ‘눈물’에 대해 묻자 노민상 감독은 쑥스럽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정말 궁금한 것이 있었다. 19세의 수영 영웅 박태환이 눈물을 보였을까. 물론 언론에 잡히지는 않았지만 카메라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몰래 눈물을 훔쳤을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태환이는) 원래 눈물이 많지 않은 아입니다. 울지 않았어요.”
그럼 박태환은 그 감격을 다 어떻게 소화해냈을까. 400m 결승을 마친 후 박태환의 첫 마디가 무엇이었냐고 물었다. 대답은 싱거웠다.
“그냥 씩씩거렸어요. 전력을 다해 역영했으니 무슨 말을 하기가 힘들었던 것이죠.”
한국 수영의 올림픽 사상 첫 금메달을 넘어 72년 만에 이뤄진 동양인의 자유형 우승의 쾌건데 대답은 썰렁하기만 했다. 대신 노 감독이 박태환을 안으며 “장하다” “대견하다”며 축하인사를 건넸다고 한다.
노 감독은 부모를 제외하면 박태환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다. 제자에 대해서는 항상 “착하다”는 말을 한다. 겉으로 말이 별로 없으면서도 속은 깊고, 어린 나이에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인내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시선이 달라졌다
화면으로 속속들이 다 노출되는 모습 외에 대기실 등 베이징 워터큐브(수영경기장)의 뒷 공간은 어떤 분위기였을까. 결론은 박태환이 확실하게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이다. 대회 개막을 앞두고 연습을 할 때만 해도 미국 호주 네덜란드 등 수영 강국 관계자들의 시선에서 ‘쟤가 코리아에서 잘한다는 그 선수지’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아시안게임은 물론 각종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냈기에 이제 ‘제법 비중 있는 조연’ 정도는 된 셈이다.
▲ 200m 자유형 출발 직전의 박태환. 이 경기에선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연합뉴스 | ||
“예전에는 눈치 코치로 수영 선진국 사람들의 모습을 곁눈질하기 바빴죠. 그런데 이번에는 곁눈질을 당했어요.”
‘되고송’ 그 후
‘금 나와라 뚝딱, 금메달이 되고, 은 나와라 뚝딱, 은메달이 되고….’ 화제의 박태환 CF가 예고(?)한 대로 결과가 나왔고 한국 사람들은 열광했다. 신드롬이라는 단어가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박태환 열풍’은 베이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베이징으로 공부하러 온 전세계 유학생 중 그 수가 가장 많다는 한국 유학생들 사이에서 박태환은 인기 연예인을 능가할 정도의 유명세를 누리고 있다. 특히 잘생긴 얼굴과 조각 같은 몸으로 인해 박태환은 여학생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이다. 중국의 신예 장린을 제친 까닭에 박태환은 중국인들에게도 얼굴이 잘 알려졌다. 하지만 거꾸로 너무 유명해진 까닭에 마음 놓고 돌아다닐 수가 없다. 자신의 경기를 마친 박태환은 대한체육회의 스케줄 상 25일 귀국 전까지 베이징에 머물러야 한다.
그럼 그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일단 박태환의 동정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극비 사항이다. 워낙 언론의 취재 경쟁이 치열하고, 관심이 높은 까닭에 자칫하면 큰 혼란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론에 이미 보도가 됐지만 15일 1500m 예선 때 코감기에 걸렸어요. 그런데 이게 좀 악화됐어요. 그래서 다음날인 16일은 하루 종일 선수촌에서 몸조리를 했죠.”
아예 목표를 갖고 열심히 훈련을 하면 모를까. 스무 살의 혈기왕성한 청년이 아무리 감기에 걸렸다고 해도 외부 출입이 철저히 통제된 선수촌 안에만 머무는 것은 고역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감기치료를 이유로 선수촌에서 나와 베이징의 한인타운인 왕징으로 잠자리를 옮길 것을 대한체육회에 건의했지만 거부당했다. 대한체육회의 말을 들어보니 그 이유가 나름 일리가 있었다.
대한체육회 공보실의 김태형 차장은 “거기(선수촌)에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의사가 3명이나 있어요. 감기 치료는 중국 병원보다 거기가 낫죠. 그리고 생각해보세요. 박태환 선수가 베이징 시내에 출현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사람들이 몰려들 텐데 혹시라도 안전이나, 아니면 불필요한 마찰이 생기면 누가 책임집니까”라고 설명했다.
결국 박태환은 가능한 한 대중에 노출을 삼가며 베이징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노민상 감독은 “글쎄 저야 그동안 읽지 못한 책도 있고 해서 선수촌에서 편하게 쉬면 되지만 아이(박태환)가 걱정이네요. 그나마 다른 한국선수들의 주요경기가 있으면 응원이라도 나갈 예정이니 다행이에요”라고 설명했다.
▲ 노민상 감독. | ||
스승의 부탁
노민상 감독은 인터뷰 말미에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언론을 통해 알리고픈 내용이 한 가지 있다는 것이다. 내용은 대국민 및 대언론 부탁이었다.
“(박)태환이는 이제 단순히 수영선수 한 명이 아니죠. 일부 알려지기도 했지만 잠깐 저와 결별했을 때 주변에서 태환이가 운동에 전념하도록 도와주지 않았어요. 사실은 그것 때문에 1500m에서 실패한 거예요. 시간이 아쉽죠. 한두 달만 더 빨리 저와 재결합했어도 가능성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말인데 이런 시행착오를 또 겪어서는 안 되잖아요. 박태환 선수를 대하는 국민들이나, 언론이 너무 자극적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최대한 선수의 사생활과 삶에 대한 선택권을 보장하는 선에서 모든 활동이 이뤄져야 합니다.”
연예인과의 열애설 등 그동안 박태환이 유명인으로 겪었던 고충은 베이징올림픽 쾌거로 인해 훨씬 더 강해질 것은 분명하다. 스무 살의 청년이 얼마나 놀고 싶겠는가. 스승은 제자가 놀아도 건전하게 놀고, 또 운동 외에 친구를 사귀고 책도 읽고, 학교생활도 하는 등 좋은 경험을 많이 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칫하다가는 선수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을 방향으로 흐를 가능성도 있다. “태환이는 이룬 것보다 이룰 것이 많은 아이예요. 그동안 상상도 못할 힘든 훈련을 소화한 만큼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하지만 몸을 망가뜨리거나 하면 절대 안 됩니다.”
9월 이후 태환은?
박태환의 멋진 역영은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다시 볼 수 있을 전망이다. 오는 10월 전국체전(전남)에 출전해 이번에는 보다 여유로운 환경에서 국내 팬들에게 세계적인 수영을 보여준다.
재미있는 것은 노민상 감독이 박태환의 전국체전 출전종목을 단거리로 권유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100m는 물론이고 50m에도 출전시킬 계획이라고 한다. 훈련시간이 짧고, 체력적인 부담이 많기 때문에 이번에 박태환이 원한다면 전공분야인 중장거리 대신 단거리로 내보낸다는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마린보이는 어느 시도를 대표할까. 출신 지역을 따지면 서울이지만 소속팀 단국대학이 충남 연고인 까닭에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질 가능성도 있다 .
어쨌든 박태환은 9월 중순까지는 각종 공식 활동과 함께 휴식을 취한 후 9월말부터 10월 10일 개막하는 체전에 대비해 다시 물에 몸을 담근다.
반면 노민상 감독은 귀국 후 꼭 필요한 일정을 소화한 후 일정기간 완전히 잠수를 탈 계획이다. 단기적으로는 휴식을 취하는 한편 장기적으로는 지도자 교육을 연구하고, 또 제2의 박태환을 발굴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을 위해 장고에 돌입할 예정이라고 한다.
베이징=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