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단순히 포스트시즌 진출로 끝날 상황이 아니다. 롯데는 두산과 2위 다툼을 벌이고 있다. 2위로 정규시즌을 마칠 경우 시즌 막판 롯데가 보여준 신바람을 감안하면 한국시리즈 우승까지도 충분히 넘볼 수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해 정규시즌 7위. 불과 1년 만에 완전히 다른 상황에 놓이게 됐다.
이렇듯 롯데와 관련된 모든 소식의 중심에는 제리 로이스터 감독이 자리잡고 있다. 오죽했으면 ‘로이스터 매직’이라는 조어가 탄생했을까. 과정과 결과가 어찌됐든, 로이스터 감독 부임 후 첫 번째 시즌에 곧바로 4강에 합류했으니 그의 인기는 부산에서 하늘을 찌를 것만 같다.
롯데는 어떻게 해서 1년 만에 완벽하게 ‘로이스터의 팀’이 될 수 있었을까. 감독 취임 후 그가 보여준 모습을 돌이켜보고, 한국프로야구에 연착륙할 수 있었던 이유를 분석해본다.
8888577과 롯데의 도박
롯데는 2001년부터 작년까지 길고 긴 터널 속에 있었다. 8-8-8-8-5-7-7. 이제는 웬만한 야구팬이라면 무슨 뜻인지 금세 눈치 채는 숫자다. 최근 7년간 롯데의 정규시즌 등수. 참으로 암담했다. 터널을 빠져나가기 위해 롯데가 선택한 극단의 조치는 외국인 감독이었다.
지난해 말 사상 처음으로 외국인 감독이 한국에 왔을 때, 그를 선택한 롯데 구단에 쏟아지는 야구인들의 시선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했다. 국내 야구인들로선 이방인에게 ‘한자리’를 빼앗긴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다. 팬들도 한국 야구와 분위기에 생소한 미국인 감독이 좋은 성적을 내기는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주를 이뤘다.
한편으론 로이스터 감독이 좋은 성적을 낸다면 이후 외국인 감독이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위기 의식도 있었다. 그 결과 ‘2008시즌에 롯데는 나머지 7개 구단의 공공의 적이 될 것이다’라는 근거 없는 예상이 나돌기도 했다.
롯데 선수들도 처음엔 낯설어하는 분위기였다. 일단 한국말로 대화할 수 없는 지도자를 만나게 됐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신임 감독 발표 당시 대표팀의 오키나와 전훈캠프에 있었던 롯데 이대호는 “그럼 이제 영어 열심히 배워야 하는 건가요?”라며 농담을 했지만 표정 속에선 일말의 당혹스러움이 묻어났다. ‘웅성웅성’. 당시 롯데 선수단의 분위기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바로 이것이었다.
자율훈련과 열린 사고
시작부터 파격이었다. 로이스터 감독은 올 초 일본 가고시마 전지훈련부터 기존 국내 구단 기준으로는 말도 안 될 정도로 적은 훈련량을 소화했다. 대개 해외 전지훈련에선 눈뜰 때부터 시작해 야간훈련까지 꼬박 치르는 게 국내 구단의 자연스러운 풍토다. 로이스터 감독은 다른 방법을 택했다. 메이저리그식 전지훈련 스케줄을 차용해 오전 훈련만 집중적으로 한 뒤 해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날씨가 나쁠 때에는 “선수들이 부상을 입을 수 있다”며 훈련을 취소하기까지 했다. 스스로 몸 관리를 하고, 자유시간에 부족한 훈련을 알아서 하라는 전형적인 자율야구 방식이었다. 몸이 덜 피곤하니 이 같은 훈련 방식은 선수들에겐 대환영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깨닫게 되는 게 있다. 어차피 감독은 선수들에 대한 기존 정보를 싹 비운 채 전지훈련 성과를 통해 옥석을 가릴 것이라는 점에 생각이 미치기 시작했다. 따라서 선수들에게 주어진 ‘자율’은 곧 ‘책임’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로이스터 감독은 지난 8월 올림픽브레이크 동안에도 8개 구단 가운데 가장 긴 7일간의 휴식을 선수단에 안겨줘 화제가 됐다. 그때만 해도 “너무 오래 쉰다. 롯데가 무덤을 파고 있다”는 반응이 주류였는데 막상 후반기가 시작되자 롯데는 8개 구단 가운데 최고 성적을 올리며 승승장구했다. 물론 이 같은 로이스터 감독의 훈련 방식이 무조건 옳다고 결론내릴 수는 없다. 분명한 건 선수들이 성적을 통한 신바람 속에서 자율 야구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있다는 점이다.
립서비스 9단
“메이저리그에서도 모든 감독들이 이대호가 얼마나 뛰어난 타자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이대호는 메이저리그에서 뛰어도 될 타자다. 롯데에 이대호 같은 타자가 한 명뿐이라는 게 너무 안타깝다.”
1월 초 로이스터 감독이 입국 때 남긴 말이다. 미국 지도자들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립서비스다. 요즘은 비교적 나아졌지만 과거 국내 지도자들은 칭찬에 인색한 경우가 많았다. 칭찬을 많이 하는 게 마치 지도자의 체면을 깎는 것으로 인식되는 경향마저 있었다. 로이스터 감독은 심지어 낯간지러운 수준의 칭찬도 서슴지 않았다. 분명한 건 칭찬은 선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점이다. 1년 사이에 롯데는 칭찬에 익숙한 분위기가 됐다.
“다른 팀 마무리 중에 임경완보다 뛰어난 선수가 얼마나 있나? 왜 임경완만 갖고 이러는가?” 5월 말, 당시 마무리를 맡고 있던 임경완이 몇 차례 경기를 망치며 부진을 보이자 취재진은 마무리 교체 가능성에 대해 로이스터 감독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로이스터 감독은 짜증 섞인 반응을 보였다. “임경완은 결코 못하는 투수가 아니다. 좋은 투수로 성장해가는 과정”이라고 철저하게 방패막이가 됐다.
▲ 롯데 자이언츠 로이스터 감독과 이대호가 지난 16일 포스트시즌 진출을 확정지은 뒤 샴페인을 터뜨리며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 ||
카리스마 9단
로이스터 감독은 시즌 직전에 선수단에게 세 가지 주문을 했다. “우리는 하나라는 인식을 가질 것”, “트레이너를 최고로 대우할 것”, “항상 당당할 것” 등의 내용이었다. 처음부터 개막전 엔트리 26명에 대해 시즌 끝까지 함께 갈 것을 약속했다. 큰 부상이 아닌 경우엔 엔트리에서 빠지더라도 무조건 1군에 남아 원정도 따라다니며 함께 훈련하고 생활한다는 뜻이었다. 주전급 선수들에 대한 확실한 예우를 의미했다. 경기에 나가지 않아도 훈련 때 동료들과 호흡을 맞추고 경기 감각을 잃지 않으며 일체감을 유지해야 한다는 속내였다. 이렇게 되면 부상으로 밀려난다는 생각 없이 마음 놓고 재활할 수 있는 편안함도 생기게 된다.
이 같은 방침은 때론 2군 선수들의 불평을 불러오기도 했다. 실제 롯데 2군 선수들은 시즌 중반, “아무리 열심히 해도 엔트리 변경이 거의 없으니 1군에 올라갈 기회가 없다”는 불만을 내뱉기도 했다. 하지만 로이스터 감독은 확고했다. 그 결과, 9월 들어 1군 엔트리가 5명 늘어나는 시점에 롯데는 어떤 선수를 2군에서 불러올릴지 쉽게 고르지 못하는 행복한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처음엔 불평하던 2군 선수들이, 일단 1군에 올라가면 예우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부터 기량을 끌어올리는 데 최선을 다했다. 결국 전반적으로 2군 기량 향상이 이어진 것이다.
로이스터 감독은 트레이너에 대한 신임이 두텁다. 선수들의 몸 상태와 관련해 전적으로 트레이너의 판단에 맡기며 심지어 라인업 구성시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최일선 현장에서 함께 일하는 트레이너를 ‘한가족’으로 생각하라는 주문은 결과적으로 “우리는 하나”라는 얘기와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또한 “공에 몸을 맞았을 때 아파하며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라”는 지시도 내렸다. 이는 경기 중 기 싸움에서 지지 말라는 얘기였다. 경기중 사구를 맞았을 때 일단 1루까지 달려 나간 뒤 그후 치료를 받는 게 메이저리그의 전형적인 방식이다. 로이스터 감독은 또 “심판과는 내가 싸울 테니 판정에 불만이 있더라도 불평을 하거나 고개숙이지 말고 당당하게 걸어나오라”고 선수들에게 강조했다. 일순간의 선택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항상 자신감을 가져야한다는 주문이었다.
이전에도 노력은 있었다
최근 롯데가 포스트시즌 진출을 확정짓자 모 구단의 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솔직히 로이스터는 운이 좋은 것 아닌가. 롯데가 7년 동안 4강에 들지 못했지만 젊은 선수들의 기량이 꾸준히 성장해온 게 사실이다. 그 열매가 맺을 때쯤 운 좋게 로이스터가 감독을 맡았다고 봐야한다.”
얼핏 로이스터 감독의 능력을 깎아내리려는 발언처럼 보였지만 실은 이 관계자는 더 깊게 생각해보자는 의미였다. 그는 “로이스터가 능력이 전혀 없다면 아무리 전력이 좋아도 4강에 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확실히 롯데를 다른 구단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로이스터 이전에 있었던 기존 감독들의 역할에 대해 너무들 쉽게 잊는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일리가 있다. 실제 2006년 시즌이 끝날 때쯤 삼성 선동열 감독은 “롯데가 지금은 성적이 나쁘지만 젊은 투수진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기 때문에 3년 내에 충분히 4강에 들 것으로 본다”고 예측했다. 그 예측은 2년 만에 맞아떨어졌다. 그러고 보면 지금 롯데가 누리는 기쁨은 단순히 로이스터 감독의 ‘매직’ 덕분만은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뿌리가 있었기에 열매가 달린 것이니, 과거 지도자들에 대한 고마움도 잊지 말아야한다는 게 상당수 야구인들의 생각이다.
올시즌 중반, 롯데 선수가 언론 인터뷰에서 로이스터 감독의 카리스마와 선수단 운용 능력에 대해 찬사를 보내다가 본의 아니게 전임 감독들에게 결례가 될 수 있는 표현을 했다. 그러자 한화 김인식 감독은 “그래선 안 된다”면서 언론을 통해 간접적으로 해당 선수를 훈계하기도 했다.
또다른 시험대에 오르다
2위가 됐든 3위가 됐든 로이스터 감독이 이끄는 롯데는 드디어 가을에도 야구를 하게 됐다. 앞으로가 중요하다. 자율과 책임 속에 장편 소설을 써내려가듯 팀을 운용하는 건 정규시즌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포스트시즌은 한순간의 선택에 따라 명암이 좌우되는 급박한 단기전이다.
따라서 로이스터 감독의 전술적 역량이 이번 포스트시즌을 통해 드러날 것이다. 게다가 8년 만의 포스트시즌 진출이란 역으로 말하면 롯데 선수들이 지난 7년간 포스트시즌이란 큰 무대에서 한 번도 뛰어본 적이 없다는 걸 의미한다. 롯데가 시즌 막판까지 신바람을 내고 있지만 과연 한순간의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큰 무대에서 떨지 않을 수 있을까에 모든 야구인들의 시선이 집중될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상황을 장악해나가야 할 지휘자가 바로 로이스터 감독이다. 따라서 포스트시즌을 통해 로이스터 감독의 ‘운영자’ ‘전술가’로서의 능력이 다시 한번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김남형 스포츠조선 야구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