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7년 11월 23일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임명장을 받은 임채진 검찰총장. 평소 원칙수사를 강조하던 임 총장이 최근 사정 드라이브를 지휘하자 뭔가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하지만 임 총장은 ‘표적·과잉 수사’ 논란을 일축하면서 오히려 각종 비리 사건에 대한 검찰의 철저한 수사를 독려하고 있다. 정치권 주변에선 평소 원칙과 소신을 중시했던 ‘신중파’ 임 총장의 거침없는 사정 행보에 의혹의 시선을 감추지 않고 있다. 권력의 속성은 차치하더라도 그가 자신을 임명한 노무현 전 대통령과 참여정부 심장부를 겨냥해 전 방위적인 사정 칼날을 휘두르는 데는 무엇인가 속사정이 있는 게 아니냐는 관측도 흘러나오고 있다. 정가 일각에서 ‘청와대-임채진 밀월설’이 나돌고 있는 것도 이러한 관측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2007년 대선을 한 달도 채 남겨 놓지 않은 시점에서 검찰 총수에 임명돼 험난했던 대선정국 파고를 넘어 이명박 대통령의 재신임을 받은 후 사정정국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임 총장의 복심을 들여다봤다.
임채진 검찰총장은 전 정권에서 임명돼 현 정권에서 재신임을 얻은 몇 안 되는 검찰 총수다. 검찰이 사정기관의 중추라는 점에서 과거에도 검찰 총수 자리는 권력 향배에 따라 부침이 유난히 심했던 게 사실이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자 취임 4개월 만에 퇴임한 김각영 전 총장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노 전 대통령이 지난해 대선을 한 달도 채 남겨 놓지 않은 시점에서 임 총장을 임명하자 정치권 일각에서 ‘3개월짜리 총장’으로 전락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돌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임 총장이 임명 과정에서 몇 가지 의혹에 시달렸던 점과 대선 판도를 송두리째 뒤집을 수 있는 핵뇌관이었던 BBK 사건을 지휘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던 것도 이러한 우려를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실제로 지난해 11월 12일 검찰총장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를 하루 앞두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공개한 이른바 ‘삼성 떡값 검사’ 명단에 임 총장의 이름이 포함되자 여야 정치권은 물론 시민단체들까지 가세해 임 총장 사퇴를 압박했다.
특히 다음날(11월 13일) 열린 임 총장 청문회에서 여야 정치권은 이구동성으로 임 총장의 자진 사퇴를 촉구했다. 당시 청문회장에서는 “검찰의 수장이 될 분을 상대로 사제단이나 김용철 변호사가 주지도 않은 뇌물을 줬겠다고 했겠느냐”(대통합민주신당 김동철 의원) “본인과 검찰의 명예를 위해 후보자 지명을 반납할 생각이 없느냐”(민주당 조순형 의원) “검찰 치욕의 날이다”(한나라당 박세환 의원) 등 여야 의원들의 원색적인 비난이 쏟아졌다. 여기에 노회찬 민노당 의원은 임 총장과 삼성 임원들의 골프 회동 의혹을 제기했고 주성영 한나라당 의원은 임 총장의 ‘에스원 주식거래’ 의혹을 질타하기도 했다.
▲ 지난 5월 15일 검찰 수사관들이 한국석유공사 본사를 압수수색했다. 이때만 해도 임채진 검찰총장은 원칙·정도 수사를 강조했다. 연합뉴스 | ||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검찰 총수에 등극한 임 총장이지만 그 앞에 놓인 길은 첩첩산중이었다. 자신이 구설수에 오른 ‘떡값 검사’ 의혹을 포함해 수사할 ‘삼성 특검’ 법안이 통과됐고 대선정국 최대 핵뇌관인 BBK 사건에 대한 수사 발표가 임박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삼성 특검팀이 4월 17일 ‘떡값 검사’ 의혹에 대해 ‘사실 무근’이라는 결과를 내놓으면서 그는 한동안 자신의 어깨를 짓눌러 왔던 짐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당시 특검 수사 결과를 접한 임 총장은 오세인 대변인을 통해 ‘관정지수 필유족저’(灌頂之水 必流足底·정수리에 부은 물은 반드시 발 밑으로 흐른다)라는 한자성어로 심경을 대신했다고 한다. ‘사필귀정’과 같은 의미의 이 성어에는 검찰 수장으로서 비리 의혹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던 그의 남다른 감회가 담겨 있었던 셈이다.
대선을 불과 보름여 앞두고 발표(12월 5일)한 검찰의 BBK 수사 결과물은 훗날 임 총장의 ‘재신임’을 예약하는 단초가 됐다. 대선 정국을 송두리째 뒤흔들 수 있는 BBK 사건에 대해 검찰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사실상 ‘면죄부’를 주는 결과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당시 범여권은 수사검사 3명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발의하는가 하면 대선 이틀 전인 12월 17일에는 소위 ‘이명박 특검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는 등 수사 결과에 따른 거센 후폭풍이 몰아치긴 했지만 ‘이명박 대세론’을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임 총장도 12월 12일 수사검사 탄핵소추안과 관련해 “검사의 정당한 직무행위를 문제 삼은 탄핵소추안 발의는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과 검찰수사의 독립성을 크게 훼손하게 될 것”이라며 BBK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에 신뢰를 보냄으로써 결과적으로 ‘이명박 대세론’에 힘을 실어줬다. 이 대통령이 최대 아킬레스건이었던 BBK 사건을 극복하고 12·19 대선에서 완승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배경에 검찰 수사 결과와 함께 임 총장의 보이지 않은 역할이 작용했을 것이란 관측도 없지 않다.
대선 이후 임 총장은 BBK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 결과에 재차 신뢰를 보내는가 하면 ‘이명박 특검’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12월 31일 대검 청사에서 열린 종무식에서 “헌법과 법률, 법률가의 양심에 따라 행해진 검찰 결정을 정치적 잣대로 평가할 수는 없다”며 “의혹 해소에 부족하다는 사회 일각의 비판과 함께 특별검사가 도입된 것은 정말 뼈아픈 일이었다”고 강조한 바 있다.
치열한 전쟁터를 방불케 했던 험난한 대선정국을 넘고 현 정부 출범 후 이 대통령으로부터 재신임을 받자 임 총장은 자신의 소신이자 지휘방침인 ‘원칙과 정도’를 확립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취임 이후 공식·비공식 자리를 통해 “바른 검찰을 지향하면서 원칙과 정도, 절제와 품격을 지켜나가는 것이 국민의 신뢰와 사랑을 받는 길이라는 점을 명심하고 있다”고 수차례 천명한 바 있다.
현 정부 출범 후 청와대를 정점으로 한 사정당국이 공기업과 구 여권을 겨냥한 전 방위적인 사정작업에 돌입했을 때도 “혐의가 확인되지 않으면 바로 철수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지휘방침을 고수했다. 촛불정국에서 파생된
▲ 지난 8월 25일 건국 6주년 기념 한국법률가대회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과 임채진 총장. 8월을 기점으로 검찰과 임 총장의 행보가 달라졌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임 총장 스스로도 전국 검찰청사 순회 방문과 전국 검찰 수뇌부와의 회동을 통해 비리 척결 의지와 검찰 사정 방침을 강조하는 등 눈에 띄는 사정 독려 행보를 보이고 있다. 실제로 임 총장은 9월 9일 수원지검을 지도 방문한 자리에서 “검찰이 ‘사정·공안 정국’ 조성을 꾀한다”는 정치권 일각의 비판에 대해 “검찰 본연의 임무일 뿐”이라고 정치적 확대 해석을 차단하며 나섰다. 9월 24일 울산지검 간담회에서도 “표적·과잉수사는 없었다”며 정치권 일각의 주장을 재차 반박했다. 그는 또 전국 검찰청사를 순회하면서 검찰 대변자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9월 19일에는 지검장 8명과 회동을 가졌고 20, 21일에도 전국 지청장 38명을 만나 수사지침을 전달하기도 했다.
임 총장의 ‘광폭 행보’에 대해 정치권은 물론 법조계 안팎에서도 갖가지 해석을 내놓고 있다. 검찰 내부에서도 ‘원칙주의자’로 통하는 임 총장이 이례적으로 민감한 ‘사정 정국’ 전면에 나선 배경에는 말 못할 속사정이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흘러나오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선 임 총장이 청와대의 사정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백기투항’한 게 아니냐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임 총장은 촛불정국 이후
야권 일각에서는 임 총장의 평소 성품과 강단에 비춰볼 때 저인망식 사정 움직임을 이해할 수 없다며 취임 과정에서 ‘삼성 떡값’ 구설수에 시달린 바 있는 임 총장이 청와대나 여권 핵심부에 뭔가 약점을 잡힌 게 아니냐는 얘기가 떠돌기도 한다.
물론 검찰 내부에선 근거 없이 떠도는 이러한 의혹에 대해 사정 업무를 하다보면 그 수장이 맞바람도 맞게 마련이라며 임 총장을 옹호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오히려 검찰 사정 드라이브에 부담을 느끼고 제동을 걸려는 이들이 의도적으로 ‘총장 때리기’에 나서고 있는 것 아니냐는 반문도 흘러나오고 있다.
어찌 됐든 이제 임 총장 앞에는 다시 넘어야 할 험난한 ‘여의도 고개’가 기다리고 있다. 민주당 등 야권은 이번 국정감사와 정기국회를 통해 검찰의 독립성 훼손 문제를 비롯해 또다시 ‘권력의 시녀로 둔갑하고 있는 정치검찰’ 문제 등을 강도 높게 질타한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검찰은 야권의 엄포에도 불구하고 임 총장의 ‘부패 척결’ 의지를 반영해 지금까지 불거진 각종 대형 비리의혹 사건은 물론 내사 단계에 있는 정치 사건 등에 대해서도 성역 없이 철저하게 파헤친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다. 전·현직 거물급을 겨냥한 검찰의 거침없는 사정 드라이브가 임 총장의 사정 복심과 맞물려 어떤 결과물을 내놓을지 정치권의 이목이 대검청사로 쏠리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