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연아가 미국 워싱턴주 에버릿에서 열린 2008-09 국제빙상경기연맹(ISU) 피겨스케이팅 그랑프리 대회 ‘스케이트 아메리카’에서 연기를 펼치고 있다. 스포츠서울 USA 시애틀 김성배 기자 | ||
김연아가 올린 성적도 감탄사를 자아낸다. 김연아는 ‘스케이트 아메리카’ 우승에 이어 이번 시즌 2연승뿐 아니라 2006-2007 시즌 4차 대회를 시작으로 무려 그랑프리 시리즈 5개 대회 연속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특히 ‘왕중왕 대회’ 격인 그랑프리 파이널 2연패(2006년, 2007년)까지 합치면 그랑프리 대회 7개 연속 우승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둔 것. 말 그대로 ‘피겨 요정’에서 ‘피겨 여왕’으로 입지를 확실히 굳히는 순간이었다.
#캐나다 ‘꿈의 인큐베이터’
김연아에게 ‘컵 오브 차이나’ 우승은 여러 의미를 가져다줬다. 무엇보다 김연아는 1차 대회(193.45점)에 이어 3차 대회에서도 191.45점을 받으면서 두 개 대회 연속 190점대를 넘겨 이번 시즌 그랑프리 3개 대회에서 유일하게 190점대를 유지한 선수가 됐다.
비록 지난 3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고관절 부상의 여파로 183.23점을 받았었지만 지난 시즌 그랑프리 시리즈부터 꾸준히 190점대를 유지하는 뛰어난 경기력으로 ‘동갑내기 라이벌’ 아사다 마오(일본)와 함께 여자 싱글 쌍두마차 체제를 이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시니어 무대에서 일취월장하고 있는 김연아의 비결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캐나다 토론토에서 안정적인 훈련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과 1984년 사라예보 동계올림픽과 1988년 캘거리 동계올림픽에서 남자 싱글 은메달을 획득한 브라이언 오서 코치(47)와 ‘특급 안무가’ 데이비드 윌슨(42)을 만난 것을 꼽는다.
주니어 시절 김연아의 훈련 환경은 열악했다. 국내 피겨 선수들이 항상 그렇듯 개인훈련을 위해 새벽과 심야에 빙상장을 찾는 ‘올빼미식’ 훈련을 해야만 했다. 더구나 이미 초등학교 시절 트리플 악셀(공중 3회전반)을 제외한 5개 종류의 트리플 점프를 뛰면서 잠재성을 인정받은 김연아로선 새로운 훈련방식도 절실했다.
지난 2006년 3월 김연아가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면서 김연아의 부모님과 대한빙상경기연맹은 본격적으로 외국인 전담 코치와 해외 전지훈련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 오서ㆍ윌슨과 운명적인 만남
2006년 12월 김연아의 어머니 박미희 씨와 빙상연맹은 마침내 김연아의 캐나다 전지훈련을 확정했다.
김연아가 그해 여름 전지훈련지로 선택했던 캐나다 크리켓클럽 빙상장에서 첫 만남을 가졌던 오서 코치가 김연아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본격적으로 지도하겠다는 뜻을 밝혀와서다.
오서 코치는 ‘미스터 트리플 악셀’이라는 별명이 얘기하듯 캐나다가 자랑하는 남자 싱글의 아이콘으로 1984년 사라예보올림픽과 1988년 캘거리올림픽 남자 싱글에서 연속 은메달을 따냈던 스타 출신이다.
오서 코치를 영입하자 그의 절친한 동료인 안무가 윌슨도 자연스럽게 김연아의 전담 안무가를 맡게 됐다. 윌슨은 조애니 로셰트(캐나다), 에밀리 휴즈, 사샤 코헨(이상 미국) 등 세계적인 피겨선수들의 안무를 담당했던 세계적인 전문가였다.
2006년 오서와 윌슨의 지도를 받았던 김연아는 성인무대 데뷔 무대였던 그랑프리 2차 대회에서 동메달을 따내고 나서 곧장 4차 대회에서 첫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그해 그랑프리 파이널을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다.
2007-2008 시즌은 말 그대로 김연아의 전성시대. 쇼트프로그램 ‘박쥐 서곡’과 프리스케이팅 ‘미스 사이공’으로 무장한 김연아는 두 차례 그랑프리 시리즈와 그랑프리 파이널까지 석권, 해외 전지훈련의 성과를 톡톡히 보여줬다.
2008-2009 시즌을 앞두고 김연아와 오서 코치, 안무가 윌슨은 새로운 고민을 시작했다.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을 고려할 때 김연아의 진짜 색깔을 찾아야 한다는 내부 고민이 나왔고, 안무가 윌슨은 강렬하고 성숙한 이미지를 선택했다. 이런 고민 속에서 나온 작품이 바로 이번 시즌 프로그램인 ‘죽음의 무도’(쇼트프로그램)와 ‘세헤라자데’(프리스케이팅)였다.
고려대 수시전형 합격으로 소녀의 티를 벗고 성숙한 여인으로 변화를 추구하는 김연아의 이미지에 제대로 부합하는 프로그램이었다.
▲ ‘스케이트 아메리카’에서 김연아의 연기가 끝나자 관중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 | ||
# 아사다 마오와의 신경전
김연아와 아사다는 주니어 시절부터 여자싱글 정상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펼쳐왔다. 시니어 무대는 아사다가 김연아보다 1년 먼저 진출, 2005-2006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이리나 슬러츠카야(러시아)를 제치고 우승하면서 전 세계 피겨팬들의 주목을 받았다.
김연아도 이에 질세라 시니어 데뷔 첫해 그랑프리 파이널 석권을 시작으로 2007-2008 시즌 그랑프리 두 개 대회와 그랑프리 파이널까지 우승하면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신경전을 펼쳐왔다.
하지만 김연아는 점프 기술에서 아사다보다 한 수 위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사다는 지난 시즌 국제빙상경기연맹(ISU)의 채점강화 방안으로 러츠 점프에서 잘못된 에지(edge) 사용 판정을 받으면서 잠시 주춤하고 말았다. 러츠 점프는 왼발 스케이트의 바깥쪽 날(아웃 에지)을 통해 점프해야 하지만 아사다는 플립 점프처럼 안쪽 날(인 에지)을 사용한 것. 이 때문에 팬들로부터 ‘플러츠 점프’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김연아는 ‘교과서 점프’ ‘정석 점프’라는 별명대로 정확한 에지를 사용한 점프 기술로 ISU 심판들의 인정을 받으면서 실력과 표현력도 함께 일취월장했다.
하지만 이번 ‘컵 오브 차이나’에서 김연아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심판들이 쇼트 프로그램에서 김연아가 시도한 플립 점프가 잘못된 에지를 사용했다며 채점표에 ‘e’를 표시했다.
정석 점프의 자존심이 무너진 순간이었다. 하지만 ‘강심장’이라는 별명대로 뛰어난 마인드컨트롤 능력을 갖춘 김연아는 ‘하던 대로’ 프리스케이팅에서 또 한 번 플립 점프를 뛰었고, 이번에는 주의를 표시하는 어텐션 마크(‘!’)가 붙었다. 심판들이 한발 물러섰다는 증거였다.
# 부상이여, 이젠 안녕~
시니어 무대에 들어선 김연아는 ‘부상과 혈투’라는 말이 틀리지 않을 정도로 힘겹게 매 시즌을 치러왔다. 주니어 시절부터 스케이트화 문제로 골치를 앓았던 김연아는 지난 2006-2007 시즌에는 허리 통증으로 양방과 한방 치료를 병행하면서 자신과의 사투를 벌여야만 했다.
2007년 1월 초 허리디스크 진단을 받은 이후 기초체력훈련은 물론 실전 연기훈련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던 김연아는 결국 동계아시안게임 출전을 포기했고, 설상가상으로 세계선수권대회를 앞두고 꼬리뼈 부상까지 겹치는 악재에 시달려야 했다. 김연아는 포기하지 않았고, 세계선수권대회 쇼트프로그램 직전에 다리에 힘이 빠지자 침을 맞는 응급조치와 함께 진통제까지 먹고 출전, 1위를 차지하는 투혼을 발휘했다. 하지만 프리스케이팅에서는 결국 부상의 여파로 점프 실수가 이어지면서 동메달의 성과에 만족해야 했다.
2007-2008 시즌에는 고관절 부상이 김연아를 괴롭혔다. 올해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쇼트프로그램 도중 통증을 느끼면서 5위로 밀리는 아픔을 겪었고, 프리스케이팅에 앞서 진통제를 맞고 경기에 나서는 불굴의 정신력으로 프리스케이팅 1위에 올라 2년 연속 동메달의 쾌거를 달성했다.
하지만 올해만큼은 ‘부상 투혼’이라는 말이 필요 없을 듯하다. 고관절 부상에서도 완전히 벗어났고, 지난 3월 세계선수권대회 이후 국내 최고 수준의 재활 전문트레이너를 영입해 부상도 미리 방지하는 등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어서다.
지금 같은 몸 상태만 유지한다면 그랑프리 파이널 3연패는 물론 한국 최초의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리스트의 탄생도 기대해볼 만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영호 연합뉴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