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2일 김민석 최고위원이 검찰의 영장집행 강행에 항의하며 민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였다. 연합뉴스 | ||
따라서 김 최고의 구속 여부는 24일 오후 결정되겠지만 세 차례 영장집행 불응에 따른 여론 악화와 검찰의 강력한 사법처리 의지 등을 감안하면 적잖은 후유증을 예고하고 있다. 김 최고는 특히 2005년도에도 같은 혐의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바 있어 이번 사건은 그의 정치생명에 중대한 기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과 김 최고는 그동안 표적수사·야당탄압을 앞세워 검찰의 영장집행에 맞서 왔지만 측근 제보로 수사가 진행됐고 검찰이 혐의를 입증할 만한 구체적인 증거와 증인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코너에 몰리고 있는 형국이다.
김 최고는 80년대 중후반 학생운동을 주도한 대표적인 386세대 정치인으로 초고속 성장가도를 달리다 2002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패한 뒤 오랫동안 혹독한 정치 시련기를 보내야 했다. 지난 여름 민주당 7·6 전당대회 때 최고위원 경선에서 당당히 2위로 당선, ‘화려한 부활’을 알렸지만 또다시 정치자금법 ‘덫’에 걸려 정치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이다. 과연 ‘김민석 파동’의 막은 어떻게 내려질까.
“3김 이후 나처럼 우여곡절을 겪은 정치인도 드물 것이다.”
민주당 7·6 전당대회를 통해 화려하게 부활한 김민석 최고가 지난 7월 17일 <일요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던졌던 일성이다. 6년이란 공백기를 극복하고 제1 야당 최고위원 경선에서 당당히 2위를 차지한 김 최고의 남다른 소회와 그의 굴곡 깊은 정치역정을 대변한 발언이었던 셈이다.
실제 386세대 선두주자인 김 최고는 올해 나이 44세에 불과하지만 유달리 부침이 심한 정치여정을 걸어왔다. 젊은 나이에 이미 여당의 서울시장 후보와 야당의 대선 경선 후보를 지냈을 정도로 화려한 이력을 지닌 반면 총선과 단체장선거 패배와 같은 실패의 역사도 뒤안길에 새겨져 있다.
▲ 2002년 서울시장 후보 당시 거리 유세 모습(위) , 2002년 10월 민주당 탈당 후 국민통합21 입당. | ||
대학시절 민주화운동을 주도한 김 최고는 90년 ‘청년 정치’를 기치로 26세의 나이에 정계에 입문한다. 2년 후 28세의 나이로 14대 총선(92년)에 출사표(서울 영등포구)를 던졌지만 당시 여당 정책위의장과 부총리를 지낸 나웅배 후보에게 200표 차이로 석패하면서 쓰라린 신고식을 치른다. 386세대 운동권 선두주자라는 ‘젊음과 패기’만 믿고 도전했던 첫 총선에서 현실 정치의 높은 벽을 실감한 김 최고는 절치부심 ‘4년 후’를 기약하며 몸을 낮추고 ‘지역구 다지기’에 매진한다.
96년 15대 총선에서 최연소(32세) 당선이란 화려한 타이틀을 가지고 국회에 첫 발을 내디딘 그는 이후 16대 총선에서 서울지역 최다 득표로 당선돼 재선에 성공하는 등 초고속 성장가도를 달리기 시작한다. 2000년 1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을 중심으로 창당된 새천년민주당 대변인과 김대중 총재 비서실장을 역임하는 등 권력 핵심부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차세대 지도자의 꿈을 키우기도 했다.
김 최고는 특히 2002년 38세의 나이로 당시 집권당이었던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로 선출되면서 정치인생의 절정을 맞는 듯했다. 서울시장은 ‘소통령’으로 통할 정도로 막중한 자리로 그동안 중량급 정치인이 아니면 명함조차 내밀지 못했던, 차세대 지도자의 등용문이나 다름없었다. 김 최고는 당시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했던 이명박 대통령에게 패했지만 40세 전에 차세대 지도자 반열에 이름을 올리는 동시에 대권을 꿈꾸는 잠룡의 위상을 다지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김 최고의 거침없는 성장가도는 2002년 대선정국을 거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김 최고는 당시 노무현 민주당 대선후보와 정몽준 국민통합21 대선후보 간의 단일화 논의가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자 ‘단일화 가교’를 명분으로 자신의 정치적 고향이나 다름없는 민주당을 전격 탈당, 국민통합21을 선택하는 정치적 모험을 감행한다.
당시 노무현 후보의 지지도는 후보단일화협의회 사태로 하향세를 걷고 있던 반면 정몽준 후보는 ‘월드컵 특수’를 업고 상한가를 치던 상황이었다. 민주당은 김 최고의 ‘약삭빠른’ 행보를 신랄하게 비판했고 네티즌들은 ‘김민석은 철새 정치인’이라는 의미로 ‘김민새’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특히 80년대 학생운동권의 대표주자로 민주당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김 최고와 임종석 전 의원은 ‘철새 논쟁’을 벌인 바 있다. 당시 노무현 후보 선대위 국민참여운동본부 사무총장을 맡고 있던 임 전 의원은 “동지의 이름에서 그를 지우고 싶다. ‘정치 철새’ 추방운동을 벌이겠다”며 선배인 김 최고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이에 대해 김 최고는 “욕먹을 각오는 하고 있다. 그러나 크고 길게 보자”고 해명했다.
철새 논란과 대선 후유증으로 한동안 정치 공백기를 보냈던 김 최고는 2004년 17대 총선을 앞두고 새천년민주당에 복당해 재기를 노렸다. 하지만 17대 총선의 최대 뇌관이었던 ‘탄핵’ 역풍을 넘지 못하고 낙선의 쓴잔을 마시며 다시 내리막 정치 인생을 보내게 된다.
▲ 2008년 7월 전대서 2위로 최고위원 당선(위) , 지난 20일 김 최고위원 세 번째 영장집행 시도. 사진=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2007년 6월 김 최고는 정계복귀 기자회견을 통해 “5년 전 대선 당시 후보단일화의 절박성과 노(무현) 대통령의 비정상적 정치행태에 대해 정치생명을 건 결단을 했지만 국민과의 대화와 소통을 경시하는 오류와 결례를 범했다”며 한껏 몸을 낮췄다. 3년여의 공백을 딛고 김 최고는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뛰어들었지만 이인제 후보에게 6000여 표 차로 패하고 만다. 이후 18대 총선을 통해 다시 국회 입성을 노렸지만 대통합민주신당과 민주당이 합당해 새롭게 창당한 통합민주당이 비리부정 전력자들에 대한 일괄 공천배제 원칙을 정함에 따라 공천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이처럼 숱한 좌절과 시련을 겪어야 했던 김 최고는 지난 총선 당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낙천자 유세단을 이끌며 백의종군하는 자세를 보여 당원들과 전통적 지지층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 김 최고의 포기를 모르는 의지와 낮은 행보는 7·6 전대를 통해 드디어 그 빚을 보게 된다. 그의 높은 인지도와 구 민주계 대의원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최고위원 경선에서 당당히 2위로 당선되면서 화려한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기 때문이다. 2002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패배한 이후 좌절과 시련의 세월을 보낸 지 6년여 만에 짜릿한 승리를 맛본 셈이다.
7·6 전대를 통해 자신의 건재함과 부활 가능성을 보여준 김 최고는 의욕적인 정치활동을 전개했다. 지난 7월 서울시의회 뇌물사건이 터졌을 때 ‘돈 봉투’ 사건 대책위원장을 맡아 ‘대여 저격수’ 역할을 자청하기도 했다. 그는 특히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2006년과 2007년 서울시의회 의원들로부터 1500만 원의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주장해 홍 대표와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김 최고는 ‘화려한 부활’을 알린 지 4개월이 채 안 돼 또다시 정치자금의 덫에 걸려 정치생명이 위태로운 처지다. 김 최고가 18대 총선 출마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중국에서 사업을 하는 박 아무개 씨와 문 아무개 씨 등 기업인 2명으로부터 2억여 원씩 모두 4억 7000만 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김 최고는 10월 29일 구속영장이 청구된 이후 검찰의 구속 수사방침에 불복하고 11월 21일까지 20여 일간 검찰과 대치해 왔지만 구속영장 기한 만료일인 이날 입장을 바꿔 법원의 영장실질심사에 나가기로 결정했다. 검찰이 21일 김 최고에 대한 기존 구속영장 기한이 만료되자 3개월짜리 구속영장을 재청구하는 등 강제구인 의지를 분명히 한 데다 악화된 여론도 부담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당 지도부가 21일 궁여지책으로 검찰에 제시한 ‘신원보증’ 카드를 둘러싼 논란이 거세지고 있고 그동안 비리 혐의자를 옹호한다는 비난을 받아온 당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하는 의지도 투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김 최고의 구속 여부는 24일 법원의 영장실질심사 결과에 따라 결정되겠지만 세 차례 영장집행 불응에 따른 여론 악화와 검찰의 강력한 사법처리 의지 등을 감안하면 김 최고의 향후 정치 행로는 가시밭길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김 최고의 구속 여부를 떠나 검찰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그의 혐의가 입증될 경우 김 최고의 정치생명은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란 관측을 내놓고 있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직면한 ‘풍운아’ 김 최고의 정치 명운이 어떻게 갈릴지 귀추가 주목된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