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12월 술에 취해 비행기에서 난동을 부린 혐의로 기소된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이 4일 오전 부산지법에서 열린 항소심 선고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 ||
박연차 회장은 10여년 전만해도 신발제조 회사 ‘태광실업’을 창립해 30여 년간 외길을 달려온 사업가였다. 그의 이름이 매스컴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노 전 대통령의 측근 안희정 씨에게 불법 정치자금 7억 원을 건넨 사실이 밝혀지면서다. 그후 그는 열린우리당 의원들에게도 후원금을 내는가 하면 한나라당 재정위원으로 활동하며 특별당비로 10억 원이나 내면서 어느덧 정계에서는 마당발로 통하기 시작했다.
세종증권 비리 수사로 인해 박연차 회장과 정치권의 ‘밀월관계’의 실체가 드러날지 정치권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현 정국의 ‘뇌관’으로 급부상한 박연차 회장은 과연 어떤 인물인지 들여다보았다.
사업가로서 박연차 회장은 ‘성공한 기업인’으로 불린다. 신발 제조업체인 태광실업을 중심으로 회원제 골프장 운영사인 정산개발주식회사 등 국내외에 14개 계열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그가 2006년 농협으로부터 인수해 헐값 매각 의혹이 일고 있는 휴켐스(화학제품 제조회사·연매출 3000억 원대)도 여기에 포함된다. 특히 박 회장의 회사들 중 주축인 태광실업은 세계적인 신발 브랜드 나이키의 전략적 파트너로 고급운동화를 생산하는 국내 최대의 러닝화 제조회사다. 태광실업의 홈페이지에는 신발 매출이 3억 5000만 달러(1달러당 1500원 기준 약 5250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기업 왕국이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은 아니다. 경남 밀양 출신인 박 회장은 고향에서 고교를 나온 뒤 그의 나이 27세 때인 지난 70년대 초 소규모 신발제조업체인 정일산업을 설립했다. 이전에 신발공장에서 1년여 동안 직장 생활을 한 뒤 독립을 시도했던 셈이다.
물불을 안 가리고 뛴 덕분인지 한때 그의 회사는 호황을 누리기도 했다. 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첫 번째 위기가 다가왔다. 경기 불황으로 거래처들이 연쇄적으로 부실화되면서 그의 회사마저 큰 타격을 입게 됐던 것. 박 회장은 쓰러지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 몸부림을 쳤지만 결국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실패가 컸던 만큼 좌절도 깊었던 걸까. 주변에 따르면 당시 박 회장은 산 속의 사찰로 들어가 한동안 정신 나간 사람처럼 지냈다고 한다. 한 달여 뒤 어렵사리 마음을 다잡은 그는 지방의 공장 등을 밤낮없이 돌며 폐품을 모아다 팔면서 재기를 꿈꿨다. 약간의 돈을 마련한 그는 작은 공장 하나를 얻어 다시 신발사업에 도전한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회사를 되살리고 80년 회사 이름을 태광실업으로 바꾸게 된다.
그러나 80년대 중후반은 싼 임금을 앞세운 중국의 기지개로 국내 신발업계가 타격을 입던 시기. 동종 업체들이 하나둘씩 손을 놓을 때 박 회장은 세계적인 신발 브랜드 나이키와 계약을 맺고 OEM(주문자상표 부착) 방식으로 제품을 생산하며 활로를 찾게 된다. 부와 명성을 쌓으며 탄탄대로를 걷는 듯했던 박 회장은 90년 들어 엄청난 위기를 맞는다. 무역 관계로 해외 출장이 잦았던 그가 당시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재벌 2세들과 여배우 마약 매춘 사건에 연루돼 사법처리를 받게 됐던 것.
박 회장은 시련의 계절에 자성의 시간을 보내며 말 그대로 일과 회사에 미친 사람으로 변해갔다. 90년대 중반까지 금형·소재 개발에 110억 원이란 거액을 투입하며 회사의 내공을 키웠다. 그 결과 나이키의 하청업체가 아닌 전략적 동반자로 위상을 격상시킬 수 있었다. 또한 해외로 눈을 돌려 94년엔 베트남에, 96년엔 중국에 현지법인을 세우며 3개국을 잇는 생산기지를 구축했다. 마침내 97년 12월 1일 ‘무역의 날’에 박 회장은 한 해 동안 무려 3억 1600만 달러어치를 수출한 공로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아 과거의 멍에를 벗어버릴 수 있었다. 당시 유행했던 나이키의 에어백 시리즈도 그의 회사가 개발·공급한 것이었다.
▲ 검찰이 지난달 김해시에 있는 (주)태광실업에서 압수수색을 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신발 신화’를 일군 ‘기업인 박연차’는 “사양 산업은 없다. 사양 회사가 있을 뿐이다”라는 얘기를 회자시킬 정도로 성공한 사업가임에는 틀림없는 듯하다. 그러나 정치권력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그의 행보를 다시 들여다보면 곳곳이 의혹의 색깔로 채색돼 있다. 그리고 그 시발점이 되는 것은 다름 아닌 노무현 전 대통령 형제와의 특별한 관계다.
박 회장은 노 전 대통령을 알기 전 형인 건평 씨와 먼저 친분을 쌓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978년께였다고 한다. 박 회장이 태광실업 공장을 부산에서 경남 김해로 옮겨오면서 김해에 살고 있던 건평 씨를 지역모임에서 만나 이따금씩 술 한잔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로 발전했다고 한다. 노 씨는 78년까지 마산에서 세무공무원으로 일을 했었다.
그가 노 전 대통령과 알게된 계기는 88년 총선이었다. 당시 노건평 씨가 박 회장을 찾아와 ‘동생이 총선(부산 동구)에 출마해 선거자금으로 쓰려 하니 내 명의의 김해시 한림면 임야 9만여 평을 사달라’고 부탁했다는 것. 박 회장은 이 땅을 4억 5000만 원에 매입했고 선거가 끝난 뒤 노건평 씨의 소개로 노 전 대통령과 만나 감사 인사를 들었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은 또 한 번의 부동산 거래를 하게 된다. 2002년 4월 박 회장이 건평 씨의 부탁으로 경남 거제시 일운면 구조라리 소재의 주택 두 채와 주변 땅을 10억 원에 매입한 것. 공교롭게도 이번에는 대선을 앞둔 시기로 당시 노 전 대통령은 민주당의 경선후보였다. 박 회장은 이에 대해 언론 인터뷰에서 “거제도에 내려가 건물 주위를 직접 둘러본 뒤 말년에 낚시나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매입했다”고 밝힌 바 있다.
박 회장은 2002년 대선을 거치면서 노 전 대통령 주변 사람들과도 친분을 맺게 된다. 이후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는 ‘대통령의 후원자’로 알려져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2003년 5월엔 노 전 대통령이 벌였던 생수사업체인 장수천 빚의 연대보증인이었던 노건평 씨가 채무를 회피할 목적으로 거제시 구조라리 땅의 명의를 처남 민 아무개 씨 명의로 바꿔 매각했다는 의혹이 야당으로부터 제기됐다. 자연 이 땅의 매입자인 박 회장에게도 매매 배경 및 매입대금의 성격 등과 관련한 의혹이 집중됐다.
이듬해엔 노 전 대통령의 측근인 안희정 씨에게 두 차례에 걸쳐 7억 원을 ‘지원’했다가 불법정치자금 제공 혐의로 법정에 서기도 했다. 당시 재판에서 박 회장은 “(안 씨에게) 2002년 12월에 준 5억 원은 노 캠프가 아닌 안희정 개인에게 준 것이고, 2003년 3월에 준 2억 원도 정치자금이 아닌 용돈”이라는 논리를 폈다. 하지만 재판부는 박 회장이 처음 안 씨에게 준 5억 원은 대선자금으로, 또 두 번째 준 2억 원은 총선자금으로 인정했다. 그는 2007년에도 당시 여당 의원 20여 명에게 부인과 임직원 등 5명의 명의로 모두 9800만 원의 후원금을 불법 지원해 약식 기소되기도 했다.
박 회장의 이름이 노무현 정권 당시 오르내린 것은 ‘돈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박 회장의 큰딸이 참여 정부 당시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사실이 뒤늦게 전해지면서 특혜 인사 논란이 빚어지기도 했다. 또한 박 회장의 사돈인 김정복 전 중부지방국세청장이 국가보훈처 차장으로 임명된 발탁 배경을 놓고 ‘보은 인사가 아니냐’는 뒷말을 낳았다. 김 전 청장은 이후 보훈처 처장까지 지낸 뒤 올 2월 퇴임했다.
검찰에서는 박 회장과 일부 ‘노무현 사람’들의 이처럼 남다른 인연이 각종 이권사업과 관련해서도 ‘끈끈하게’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동안 언론 및 정가에서 제기된 박 회장을 둘러싼 의혹은 △세종증권 차명 주식거래 △농협 자회사 휴켐스 헐값 매입 △해외 비자금 등 한두 가지가 아니다.
특히 노건평 씨가 박 회장이 대주주로 있는 생체보안회사 리얼아이디테크놀러지(옛 패스21)의 주식 100만여 주(주당 500원)를 차명 매입한 것으로 알려져 거래 배경에도 의문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또한 정대근 전 농협중앙회장과 친분이 있던 노 씨가 휴켐스 매각 등 이권을 놓고 정 전 회장과 박 회장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한 게 아니냐는 의혹도 불거지고 있다.
검찰에선 박 회장을 소환조사하면 앞으로 더 캐낼 게 많다는 입장이다. 정가 일각에선 박 회장이 자신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MB 정권의 실세 정치인에게도 줄을 대고 구명로비를 시도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다. 과연 ‘박연차 의혹’의 불똥은 어디까지 튀게 되는 걸까. 김해발 ‘시한폭탄’의 초침은 지금도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