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섞이면 누가 누굴 속이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서울의 한 10년차 변호사의 푸념 섞인 말이다. 지난 5월 그는 부인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한 업체에 1억 원을 투자했는데, 알고 보니 사기였다는 내용이었다. 잃은 건 돈뿐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부인이 가족과 지인들에게 이 업체를 소개해 왔다가 이 사실이 드러나면서 관계도 소원해졌다.
앞서의 변호사 부인이 투자한 업체는 지난 4월 서울의 한 호텔에서 중국의 한 업체와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1000억 원 규모의 투자금과 쇼핑에 게임을 융합한 온라인 융합쇼핑 플랫폼을 내세워 언론에도 홍보했다. 특히 업체는 투자자들에게 “6월에 세계적인 온라인 융합쇼핑플랫폼이 한국에 들어오면, 전 세계 수익을 ‘1/N’로 나눠 지급한다. 지금 투자하면 매월 1억 원 이상의 수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미리 투자를 해야 고수익을 보장받고 6월 이후에는 수익이 별로 나지 않는다”며 고액 투자를 권했다. 원금은 물론 수익까지 보장한 전형적인 유사수신행위였다.
실체는 지난 5월 업체 대표가 긴급체포되면서 드러났다. 한 투자자의 제보를 받은 금감원이 유사수신행위가 인정된다며 경찰에 조사 결과를 통보했는데, 경찰 수사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업체가 투자자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내세웠던 플랫폼은 개발되지 않았고, 1000억 원을 투자하겠다던 중국 업체도 자본금 37억 원의 소규모 업체로 투자여력이 없었다. 업체는 투자자 1500여 명으로부터 404억 원을 모았는데, 이 과정에서 후순위 투자자들의 투자금을 선순위 투자자들의 모집 수당으로 지급하는 등 돌려막기까지 벌였다.
앞서와 같은 유사수신 행위로 의심되는 사례들은 올해 들어 크게 늘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 1월부터 8월까지 유사수신 혐의업체 신고건수는 393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156건과 비교해 2.5배 폭증한 수치다. 금감원이 유사수신 행위에 대한 혐의점을 포착해 수사당국에 통보한 건수도 49건에서 88건으로 늘었다. 이 때문에 금감원은 올해 초부터 거의 매달 투자자들에게 유사수신 및 투자사기업체 주의를 당부하는 보도자료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유사수신 업체는 기승을 부리고, 피해자는 큰 폭으로 늘고 있다.
1조 원대의 사기 및 유사수신행위로 검찰에 의해 구속 기소된 김성훈 IDS홀딩스 대표(사진)에 대한 첫 공판이 지난 10월 11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렸다. IDS홀딩스 홈페이지 캡처.
# 전형적인 수법, 속을 수밖에 없는 이유
유사수신 업체들이 돈을 끌어모으는 방식은 대표적으로 △고수익 및 원금 보장으로 투자자 유혹 △ 높은 수익률에도 의심받지 않을 만큼 포장된 투자상품 제시 △투자 초기 일정한 수익 되돌려줘 확신을 심어주는 방식 등이다. 모두 과거부터 잘 알려져 온 유사수신, 다단계 사기 등의 형태와 근본적으로 유사하다. 그런데도 피해가 속출하는 이유는 투자자들이 ‘알면서도 속을 수밖에 없는’ 형태로 진화한 데에 있다. 실제로 금융업계 관계자들과 일부 투자자들은 “업체들의 고수익 주장을 의심하면서도 결국엔 빠져들게 된다”고 입을 모은다.
보통 업체들은 해외자원개발, 에너지산업부터 잘 알려지지 않은 신기술 첨단·테마산업 등을 제시하며 장밋빛 전망을 내세운다. 실제로 최근 유사수신 및 사기 등 혐의로 재판이 진행 중인 IDS홀딩스 대표의 경우, FX 마진거래(외환 거래서 생기는 환차익을 챙기는 파생 거래)나 셰일가스 사업 등에 투자한다고 주장하며 거래량을 조작하는 가짜 프로그램을 공개해 믿음을 샀다. 이 업체는 여의도에 대형 사무실을 차리고 투자 설명회를 열었다. 또한 지난해 7000억 원의 투자금을 불법적으로 모집한 혐의로 대표가 구속된 밸류인베스트먼트코리아(VIK)의 경우엔, 다수의 투자자로부터 소액을 모아 유망 비상장 벤처회사에 투자해 목돈을 만드는 ‘크라우드 펀딩’ 등 선진 기법을 사용한다며 피해자들을 속였다.
이외에도 유명 호텔에서 투자설명회를 개최한 뒤, 투자자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외국계 회사의 계열사라며 ‘그룹형 기업’을 표방하기도 한다. 현재 유사수신 등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한 업체에 5억 원을 투자했던 한 투자 피해자는 “피해자 모임에 변호사와 증권 전문가들도 일부 섞여 있다. 그만큼 업체가 그럴듯하게 꾸며 투자자들을 모집한 것”이라고 귀띔했다.
더 큰 문제는 화려한 겉모습을 보고 일부 투자자들이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다. 투자자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소액을 투자하는데, 여기서 업체들은 투자 초기 약정한 수익을 꼬박꼬박 지급하면서 신뢰를 쌓는다. 믿을 만하다고 판단한 투자자들은 투자 금액을 늘리고, 주변 지인들에게 소개를 시작한다. “업체는 못 믿어도 지인은 믿는다”며 또 다른 소액 투자가 시작되고, 업체들은 소개료 명목으로 추가 이익을 제공하면서 투자자 유치를 부추긴다.
하지만 ‘피라미드’가 점차 거대해지면서, 정상적인 수익원이 없는 업체들은 신규 투자자들에게 받은 돈을 기존 투자자들에게 이자로 지급하는 ‘돌려막기’를 하게 된다. 검찰과 경찰이 수사에 나서기 전까지 이런 식으로 피해가 커진다.
투자자에게 투자받은 돈을 빼돌려 부당하게 이익을 챙긴 혐의로 구속된 ‘청담동 주식부자’ 이희진 씨와 같은 사례를 막기 위한 규제 법안이 제출됐다. 미라클인베스트먼트 홈페이지 캡처.
# 유사수신 규제 위해 새 법안도 나와
일각에선 유사수신에 대한 현행 제도의 허점이 이를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재 금감원에서는 시민감시단과 현장 점검관을 두고 있지만, 혐의업체에 대한 조사·감독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유사수신 혐의를 받는 업체가 금감원의 현장조사를 회피하거나 거부할 경우 기본적인 조사도 할 수 없다. 결국 유사수신 행위에 대한 감시의 대부분을 피해자 신고나 제보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를 악용해 수사기관에 적발된 유사수신 업체가 재판 중에도 영업을 이어나가는 경우도 나오고 있다. 유죄가 확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투자자를 계속 모집하며 불법행위를 이어가거나, 자회사 형태의 파생업체를 통해 영업을 이어가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피해자들에게 합의금을 지급해 처벌 강도를 낮추기도 한다.
이 때문에 최근 국회에선 급증하는 유사수신 피해를 줄이기 위해 새로운 법안을 내기도 했다. 김선동 새누리당 의원은 지난 10월 26일 금감원이 유사수신행위의 직권 조사권을 보유하고 조사를 거부하는 업체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유사수신행위 규제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냈다고 밝혔다. 김 의원은 “금감원의 현장 조사를 거부하는 업체에 대해 선제적으로 필요한 조사를 하고, 조사를 회피한 기업에 대해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을 법안에 담았다“고 설명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