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 ||
특히 반 총장은 최근 국내의 한 여론조사 기관에서 실시된 대선 후보 선호도 조사에서 본인의 의중과는 상관없이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 이어 2위를 차지, 그 정치적 잠재력도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요신문>은 2009년 새롭게 주목해야 할 인물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선정해 그를 집중 조명해보았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세계 대통령’ 자리를 수행한 지도 만 2년이 돼 간다. 그는 지난 2007년 1월 1일 유엔 사무총장직에 오른 뒤 지금까지 전 세계의 크고 작은 분쟁의 조정자 역할을 하느라 정신없이 달려왔다. 그런데 반 총장의 열정과는 상관없이 임기 2년을 넘긴 그에 대한 ‘중간 평가’는 다소 엇갈린다.
일단 반 총장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들의 한결같은 평가는 ‘따뜻한 인간미’가 흐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유엔 사무총장이 회원국 192개국의 입맛에 모두 맞는 조정자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반 총장의 진실하고 따뜻한 인간성이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국가들의 간극을 그나마 조금씩 줄이는 데 일조를 하고 있다는 긍정적 평가가 나온다. 현재 유엔본부에서 한국인 스태프로 일하고 있는 A 씨는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반 총장의 인간미를 이렇게 털어놓았다.
“지난 2008년 1월 29일 반기문 총장이 아프리카 르완다를 방문했을 때 동행한 적이 있었다. 르완다는 1994년 동족끼리의 대학살 사건으로 수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했다. 반 총장은 당시 대학살 희생자들의 유가족들이 자신들의 생계를 위해 세운 기념품 공장을 방문했다. 그는 사건 당시의 끔찍했던 상황을 유가족들로부터 들으면서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반 총장은 즉석에서 자신의 돈으로 그 공장에서 생산되던 기념품들을 모두 구입해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놀란 적이 있었다.”
그 뒤 이 일화는 유엔 공보팀에 의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르완다를 방문해 지난 1994년 르완다 대학살 사건의 생존자 지원을 위해 사재 1만 달러를 기부키로 했다’라는 보도자료로 만들어진 뒤 전 세계에 전해지기도 했다.
반 총장은 사실 유엔에서 유난히 ‘눈물’이 많은 지도자로 꼽힌다. 그는 지난 2007년 12월 알제리의 수도 알제에서 발생했던 차량 폭탄 테러로 유엔 직원 10여 명을 한꺼번에 잃는 아픔을 겪었다. 그때도 반 총장은 직접 알제로 날아가 희생된 유엔 직원 가족들을 만나 뜨거운 눈물을 함께 흘렸다고 한다.
그런데 유엔 사무총장이 ‘자주’ 눈물을 흘리는 것을 두고 유엔 외교가 일각에서는 “외교 관례상 지도자가 자주 공개석상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좋지 않다”라는 말들이 나온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관례’보다는 반 총장의 따뜻한 마음씨를 결국 사람들이 더 이해하게 됐다는 게 중론이다. 앞서의 유엔 관계자 A 씨는 이에 대해 “반 총장을 곁에서 자주 보게 되는데 참 정이 많은 분이라고 생각한다. 르완다 희생자 가족들과도 그렇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꼭 자신의 아픔처럼 직접 몸으로 느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반 총장의 인간적 매력을 유엔 외교가에서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반 총장이 조정해주면 신뢰해도 된다’라는 일종의 믿음이 조금씩 생겨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여기에 유엔 직원들도 그의 따뜻한 인간미에 매료돼 그를 특히 존경하고 있다는 것도 반기문 총장의 리더십을 강화시키는 배경이 된다.
또한 반기문 사무총장은 지난 2007년 1월 첫 부임한 뒤 ‘한국식 개혁’을 소리 없이 실행해 호평을 받기도 했다. 반 총장은 취임하자마자 오전 8시 30분에 출근해 유엔 직원들을 바짝 긴장시킨 바 있다. 9시 30분이나 10시쯤 느긋하게 사무실 문을 들어서던 유엔 직원들은 사무총장이 8시를 전후해 출근하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 그런데 이런 ‘한국형 업무 스타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전언이다. 앞서의 A 씨는 이에 대해 “초기에만 해도 직원들의 불만이 상당했지만 이제는 직원들도 반 총장과 ‘라이프스타일’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편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라고 말했다. ‘한국인’ 반기문 사무총장 특유의 근면·성실함이 유엔에서도 그 자리를 튼튼하게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반 총장이 부임한 뒤 비능률·관료주의가 만연한 유엔의 업무 분위기도 점차 바뀌어가고 있는 셈이다.
▲ 지난해 7월 기후변화를 주제로 연설하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 ||
더구나 금융 위기 해소를 유엔 중심이 아닌 G20(G7+신흥개발국)이 주도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것에 대해서 일각에서는 “반 총장이 글로벌 이슈에 대해 전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유엔 사무총장이 그저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국지적인 분쟁 해결 정도에만 그 역할이 눈에 띌 뿐 이번 경제위기 해결에는 전혀 활동 공간을 찾지 못하고 있다”라는 비판도 하고 있다. 반 총장이 세계 모든 분쟁의 해결사 역할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세계 대통령’을 자임하는 그자리에서 국제적인 중요한 이슈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비판에는 겸허해질 필요가 있다. 특히 유엔 주변에서는 “반 총장이 전임 코피 아난 총장에 비해 카리스마가 부족해 추진력이 좀 떨어진다”라는 냉정한 평가도 나온다.
국회에서 외교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외교통상통일위원회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사실 유엔은 회원국 192개국이 모두 주인이고 사무총장은 그들의 이해관계를 그야말로 ‘조정’만 하는 역할을 한다. 일부에서는 유엔 사무총장을 ‘세계 대통령’이라고 하지만 알고 보면 그렇게 힘 있는 자리가 아니고 굉장히 제한적인 힘만을 행사하는 셈이다. 회원국 192개국이 모두 주인이기 때문에 사무총장(general secretary)은 영어 직함에서 ‘제너럴’(총괄하는)을 뺀 ‘시크리터리’(비서)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반 총장의 역할이 미미하다고 하는 지적은 유엔 사무총장의 역할이 태생적으로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오히려 당연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반 총장의 카리스마가 좀 떨어진다는 지적은 유엔 내부에서도 나오고 있다. 앞서의 유엔 관계자 A 씨는 이에 대해 “반 총장이 원래 외교 관료 출신이라서 말을 조심스럽게 하는 편이다. 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그는 거의 정해진 말만 한다. 대중을 휘어잡는 탁월한 언변이 별로 없다. 인터뷰도 딱딱하게 해서 외국 미디어에서는 그리 인기가 있는 편이 아니다. 조크를 해도 그냥 무덤덤하게 해서 주변이 어색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전임 코피 아난 총장은 탁월한 언변으로 좌중을 압도했다. 직원들을 확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강했던 것이다. 그런데 반 총장은 그런 점이 좀 부족한 것 같다. 이는 두 사람이 가진 리더십의 차이라고 본다. 하지만 때로는 강한 카리스마로 주변을 압도하는 ‘기’를 보여주어야 그 바탕에서 강한 추진력이 나올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반기문 사무총장은 1944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난 전형적인 ‘충청도 양반’이다. 그 시대 사람들이 그랬듯이, 좌중을 압도하는 세련된 서양식 조크의 기술은 아무리 연습해도 그의 몸에 배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우직하고 느린 충청도 양반의 기질이 그에게는 더 잘 어울린다. 192개국 사람들이 모인 인종의 용광로에서 그의 ‘느림’은 때로는 답답하고 카리스마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뚜벅뚜벅 걷는 그만의 느림은 언젠가 그 인종의 용광로에서 빛을 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2007년 1월 1일 8시, ‘이른 아침’에 첫 출근했을 때처럼.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