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고싶어요 명동성당을 찾은 한 조문객이 성당 입구에 전시된 김수환 추기경의 사진을 만지고 있다. 연합뉴스 | ||
지난 16일 한국사회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종교계의 큰 어른이었던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했다. 그동안 노환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던 김 추기경은 결국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이날 오후 6시 12분께 세상과 영원한 이별을 고했다.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은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였다고 한다.
‘너와 너희 모두를 위하여’라는 자신의 사목 표어처럼 김 추기경은 종교계의 큰 어른으로서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정의와 양심에 입각해 바른 길을 제시해 왔으며 일생 동안 낮은 곳에서 사랑과 용서, 나눔과 평화를 몸소 실천해왔다.
87세로 마감한 김 추기경의 삶은 한마디로 사랑의 실천이었다.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소통하며 그들의 고통을 함께 끌어안으며 낮은 자의 삶을 지향했다. 평생을 검소하고 소박하게 생활하며 힘없고 어려운 사람들 편에서 살아온 김 추기경이었지만 그는 항상 더 낮아지지 못함을 미안해하고 부끄러워했다. 실제로 김 추기경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한 번도 제대로 가난해본 적 없다며 통탄했다고 한다.
김 추기경은 평소 높은 교회 담벼락 안에 머무는 사제로서의 삶 대신 세상과 소통하는 ‘세상 안의 교회’를 주장해왔다. 그는 70~80년대 격동기를 지나오면서 시대의 아픔을 함께 나누었으며 ‘지학순 주교사건(1974)’ ‘3·1 명동사건(1975)’ ‘동일방직 노조 탄압사건(1978)’ ‘오원춘 사건(1979) 등 중대한 시국 사건에서도 항상 신앙인의 양심을 걸고 정의의 편에 섰다.
김 추기경은 서슬퍼런 군사정권의 폭압에도 굴하지 않는 강직함을 보여 한국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버팀목이 되기도 했다. 1987년 6·10항쟁 당시 시위대를 연행하기 위해 경찰이 명동성당 진입을 시도했을때 김 추기경이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또 그 뒤에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학생들은 그 뒤에 있을 것이오. 들어오려거든 나부터 밟고 가시오”라고 하면서 버틴 것은 그의 ‘비폭력주의’를 드러내주는 유명한 일화다.
1987년 1월 26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서울대 박종철 군 추모미사 강론에서 김 추기경은 “이 정권에게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느냐’라고 묻고 싶습니다. 이 정권의 뿌리에 양심과 도덕이라는 게 있습니까. 총칼의 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하느님께서는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물은 것처럼 ‘네 아들, 네 제자, 네 국민인 박종철 군이 어디 있느냐’라고 묻고 계십니다”라며 군부독재정권을 향해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김 추기경은 ‘사형제’에 대한 소신 있는 발언으로 ‘용서’의 삶을 강조하기도 했다. “사형은 용서가 없는 것이죠. 용서는 바로 사랑이기도 합니다. 여의도 광장 질주범에게 사랑하는 손자를 잃은 할머니가 그 범인을 용서한다는데 왜 나라에서는 그런 것을 받아들이려하지 않습니까.”
김 추기경은 1922년 5월 8일 대구시 남산동 225-1번지에서 부친 김영석(요셉)과 모친 서중하(마르티나)의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868년 무진박해 때 체포돼 순교한 조부 김보현(요한) 대부터 신앙을 이어온 집안에서 성장한 김 추기경은 일제의 천주교 탄압을 피해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옹기장사를 하는 아버지를 따라 잦은 이사를 해야 했다.
김 추기경은 처음부터 성직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은 아니었다. 김 추기경은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라는 회고록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읍내 상점에 취직해 5~6년쯤 장사를 배워 독립한 후 25세가 되면 장가를 갈 생각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하지만 어머니는 당시 군위보통학교에 다니던 김 추기경과 그의 형 동환을 불러놓고 신부가 될 것을 권했다.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난 아들이 성소를 받길 원했던 것이었다.
결국 보통학교 5년 과정을 마친 김 추기경은 1933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에 진학함으로써 성직자로서의 첫걸음을 시작한다. 이후 서울의 소신학교인 동성상업학교에 입학한 김 추기경은 대구대교구장의 명령으로 졸업하던 해인 1941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상지대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했다.
2차 세계대전으로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학업을 혜화동 성신대학(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 복학해 마친 김 추기경은 1951년 9월 15일 대구 계산동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됐다. 이때 김 추기경의 나이는 서른. 열세 살에 어머니에게 등을 떠밀리다시피해서 소신학교에 들어간 지 18년째되는 해였다.
하지만 성직자로서의 길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김 추기경은 “결혼해서 처자식과 오순도순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고 고백하며 “한때 오케스트라 지휘자를 동경한 적도 있다. 많은 어휘를 함축해 아름답게 표현하는 시인도 부럽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김 추기경은 회고록에서 사제가 되기까지의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 이명박 대통령이 김수환 추기경의 시신이 안치된 명동성당에서 조문하고 있다.(위) 사진공동취재단 김수환 추기경을 조문하기 위해 명동성당에 몰려든 인파.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김 추기경이 세상의 유혹과 갈등을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어머니였다. 사제가 된 후 그의 어머니가 내린 제1 계명은 ‘젊은 여자를 식모로 둬서는 절대 안된다’였다. 하지만 자서전에서 김 추기경은 이를 지키지 못했다고 한다. 첫 부임지인 안동본당에서 천거받은 식모가 하필이면 젊은 여성이었던 것이다. 성당 책임자에게 사정을 얘기했지만 ‘이 사람밖에 없는데 어떡하죠? 어머니의 뜻이 그러시더라도 저를 믿고 쓰십시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당시 어머니의 명령과 현실 사이에서 무척이나 곤혹스러웠다는 김 추기경은 어머니께는 이 사실을 끝내 고백하지 못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안동본당 주임신부로 첫 사목을 시작한 김 추기경은 대구교구장 최덕홍(요한)주교의 비서, 대구교구 재경부장, 해성병원 원장 등을 역임했다. 1955년 6월 경북 김천 본당 주임 겸 성의중·고교 교장으로 근무할 당시에는 웃을 때 코가 벌름거린다해서 ‘인자하신 콧님’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권위를 앞세우지 않고 학생들과 격의없이 어울렸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3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일선 본당 신부생활이었지만 생전 김 추기경은 ‘꿈처럼 아름다웠던 시절’이라고 회상했다.
김 추기경은 1956년 독일 뮌스터 대학 유학길에 오른다. 유학시절 요셉 회프너 교수에게 배운 ‘그리스도 사회학’은 그리스도 사상에 입각한 인간관과 국가관을 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실제로 김 추기경은 훗날 “회프너 교수에게 배운 이론적 토대가 없었더라면 이념 논쟁으로 요동쳤던 70~80년대 한국사회를 헤쳐오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1964년 귀국한 김 추기경은 주간 가톨릭시보 사장을 거쳐 1966년 마산교구가 설정되면서 마산교구장으로 임명됐으며, 5월 29일 주교가 됐다. 그리고 1968년 제12대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된 김 추기경은 취임사에서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며 가난하고 봉사하는 교회, 한국의 역사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을 제시했다.
김 추기경은 1969년 4월 28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된다. 당시 김 추기경의 나이는 47세로 전 세계 추기경 134명 중 최연소였다. 98년 서울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난 김 추기경은 평소 유머와 여유를 잃지 않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였다.
2003년 11월 서울대에서 열린 강연에서 “삶이 뭔가에 대해 너무도 골똘히 생각한 나머지 기차를 탔다 이겁니다. 기차를 타고 한참 가는데 누가 지나가면서 ‘삶은 계란, 삶은 계란’이라고 하는 거죠”라고 말해 좌중이 폭소를 터뜨린 일화도 있다. 또 외국어에 능통하기로 소문난 김 추기경에게 ‘몇 개 국어를 하는지’를 물어보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나는 두 가지 말을 잘하는데, 하나는 거짓말이고 하나는 참말이야.”
김 추기경은 <태조왕건>과 <여인천하> 같은 사극을 즐겨봤으며 감명깊게 본 영화로 <서편제>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쉰들러리스트> <포레스트검프> 등을 꼽았다고 한다. 애창곡은 ‘애모’ ‘사랑해 당신을’ ‘저 별은 나의 별’ ‘등대’ 등이었다.
연예인과 관련된 일화도 유명하다. 김 추기경은 수많은 사람들 이름을 일일이 기억할 정도로 놀라운 기억력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1998년 당시만 해도 조영남과 조용필을 헛갈려할 정도로 연예인은 잘 몰랐다고 한다.
내로라하는 유명 연예인은 몰랐던 김 추기경이었지만 인순이처럼 격려와 위로가 필요한 연예인은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인순이가 겪어온 삶의 애환에 대해 아낌없는 지지와 공감을 보였다는 것이 김 추기경을 지켜본 이들의 얘기다.
김 추기경의 아호는 ‘옹기’다. 그의 호가 알려진 것은 2002년 ‘장학회’ 설립을 제안받은 김 추기경이 자신의 아호를 따 ‘옹기 장학회’를 설립하면서부터. 옹기를 ‘좋은 것과 나쁜 것, 심지어 오물까지 담을 수 있는 것’이라 평한 김 추기경은 그야말로 옹기 같은 삶을 살았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너무도 좋아하면서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게 많아 감히 읊어볼 생각도 못했다’는 김 추기경의 고백은 도덕성을 상실하고서도 얼굴 붉힐 줄 모르는 우리들을 숙연케 만든다.
노년에 운전면허증을 따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고 싶어했던 김 추기경은 ‘김삿갓’을 꿈꿨던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이 마저도 고령인 자신의 건강을 염려할 주변 사람들을 생각해서 포기할 정도로 주변 사람들은 배려하는 성품의 소유자였다.
2007년 여름 한 언론과의 일문일답에서 김 추기경은 스스로를 ‘바보’라 했다. 동성중·고교 개교 100주년전에 내놓은 자화상의 제목도 ‘바보야’였다.
“하느님은 위대하시고 사랑과 진실 그 자체인 것을 잘 알면서도 마음 깊이 깨닫지 못하고 사니까”가 그 이유였다. 전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받았던 김 추기경이었지만 그는 항상 스스로를 ‘모자란 사람’으로 여기고 낮췄다.
평소 생명나눔을 강조했던 김 추기경은 생전 서약대로 각막기증을 함으로써 마지막까지 사랑과 나눔을 실천에 옮기고 떠났다. 김 추기경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선물도 ‘나눔의 사랑’이었던 것이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