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정권교체가 이뤄진 상황에서 여야는 초반 기선제압을 위해 굶주린 사자들처럼 발톱을 세우고 무작정 덤볐다. 여야 모두 대선 뒤 처음 치르는 기 싸움에서 밀릴 경우 향후 정국 주도권을 내줄 수도 있는 상황이라 벼랑 끝 전술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이번 입법전쟁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하지만 다가오는 충돌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을 5선 경력 김형오 국회의장의 역할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파국만은 막았다’는 점에서 김 의장의 뚝심이 통했다는 평가가 있다. 하지만 개인의 이미지 때문에 일관성 없이 여야의 멱살잡이에 끌려 다니다 합의 도출마저 어렵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비판도 많다. 이번 사태를 통해 김 의장만큼 극단적인 냉온탕의 평가를 받는 사람도 없다. 김 의장의 입법전쟁 역할론을 되짚어봤다.
“박근혜 전 대표가 친이세력에 떨어져 있는 ‘트로이의 목마’ 김형오 국회의장을 입법전쟁의 늪에서 건져내 살려주었다.”
한나라당의 한 친이그룹 관계자는 흥미로운 말을 했다. 김 의장이 왜 ‘트로이 목마’일까. 사실 이번 두 차례의 입법전쟁에서 김 의장은 친이세력으로부터 완전히 ‘척’을 지고 말았다. 청와대와 여당의 계속되는 쟁점법안 직권상정 요구를 끝까지 뭉개며 ‘보신정치’로 일관하던 그를 보고, 친이세력에서는 ‘정말 이미지 관리 하나는 끝내주게 하는구나’라는 말도 서슴지 않고 나왔다. 물론 국회의장직에 오르는 동시에 당적을 떼기 때문에 여당과 김 의장 사이에 ‘채무관계’는 없다. 하지만 한나라당에서 5선의 은전을 입은 그가 갑자기 ‘중립’이라는 옷을 입는다 해도 몸은 여전히 여당 소속임은 부인할 수 없다.
여당에서는 김 의장을 이명박 대통령의 개혁정치를 완수하기 위해 ‘당연히’ 도움을 줘야 할 조력자로 생각했던 게 사실이다. 불과 1년여 전만 해도 여당의 정권 인수위원회 부위원장까지 지낸 그가 국회의장이라는 감투를 쓰자마자 그렇게 냉정하게 돌아서서 ‘딴 소리’를 할 줄 꿈에도 몰랐다고 한다. 한 친이 의원의 얘기.
▲ 국회 본회의장 앞에서 농성 중인 한나라당 의원들(왼쪽)과 국회 본관으로 진입하려는 민주당 의원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
사실 김 의장에 대한 친이세력의 평가는 애초부터 그리 좋지 않았다. 일단 친이세력은 그를 ‘친이’가 아닌 ‘친박’그룹으로 분류한다. 그리고 그 연원은 지난 2006년 7월 중순의 원내대표 선거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김 의장은 친박의 대표주자 김무성 의원을 누르고 원내대표에 오르면서 정치적으로 일취월장하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가 김무성 의원을 누르고 당선될 수 있었던 배경은 새 지도부가 강재섭 대표 등 당시의 ‘친 박근혜’ 인사들로 구성된 만큼 ‘확실한 친박’인 김무성 의원에 대한 견제심리가 작용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이때 김 의장은 범친박계였지만 오늘날 그를 국회의장직에까지 올려준 친이세력과도 친분을 맺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김무성 의원의 원내대표 당선을 저지하기 위해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의 측근들과 소장파들이 대거 그를 지원했기 때문이다. 이때 맺은 친이세력과의 인연으로 김 의장은 선대위 일류국가위원장, 인수위 부위원장 그리고 마침내 국회의장에 오르게 됐다.
그가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중용을 받았던 것은 ‘합리적 성품에 계파색이 엷어’ 향후 한나라당에서 활용할 폭이 넓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친이세력은 그를 ‘언제라도 박 전 대표 곁으로 달려갈 사람’으로 분류한다. 김 의원은 지난 2003년 6월 당 대표 경선에서 후보 6명 가운데 최하위로 낙선한 바 있다. 그뒤 2004년 3월 대통령 탄핵 사태 이후 한나라당이 최대의 위기를 맞자 그는 박 전 대표 밑에서 사무총장을 맡아 ‘오른팔’로 부상하며 정치적 재기에 성공했다. 이후 그는 17대 총선 선대본부장을 지냈고, 인재영입위원장 등 주요 직책을 맡았다. 당시 김 의장은 박근혜 전 대표와 가장 친한 의원으로 꼽히기도 했다.
특히 김 의장은 지난 2006년 7월 원내대표에 당선된 직후 “박 전 대표와는 과거에도 가까웠고 지금도 가깝다. 박 전 대표 밑에서 사무총장을 할 때 그의 애국심, 순수성 등에 인간적으로 매료됐다”라고 털어놓은 바 있다. 또한 그는 “대권후보 정도 될 만한 인물 한 명 만드는 데에는 수많은 세월과 수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여전히 우리 박근혜 전 대표가 한나라당에서 국민의 기대에 맞는 역할을 해나가리라고 생각한다”라며 박 전 대표에 대한 ‘무한 애정’을 드러낸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