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이 박연차 게이트 수사 결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불법자금 수수 혐의가 불거져 나오자 탄식하듯 한 말이다. 지금까지 검찰 수사를 야당 표적 수사라며 비판해왔던 민주당이 이런 탄식을 한 것은 그만큼 검찰 수사의 강도가 세다는 뜻이다.
아직 수사가 진행 중이지만 깨끗한 이미지로 개혁을 주장했던 노 전 대통령이 불법자금 수수를 시인하고 사과하면서 전 정권 로열패밀리에 대한 사법처리 수순이 기정사실화되고 있어 향후 엄청난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대한민국에 성수대교가 무너진 듯한 충격을 주고 있는 박연차 게이트 수사를 진두지휘하는 인물은 이인규 대검 중앙수사부장이다. 이 부장은 2002년 서울중앙지검 형사9부장 시절 SK그룹 비자금 사건 수사로 ‘기업의 저승사자’로 불리면서 언론의 주목을 끌었던 인물이다.
그랬던 그가 자물통으로 불렸던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입을 열면서 ‘정치인의 저승사자’로 떠오르고 있다.이 부장은 사실 서울중앙지검 형사9부장이 될 때까지 그다지 기자들의 주목을 끌던 인물이 아니었다. ‘검찰의 꽃’이라고 부르는 법무부 검찰1과장을 지냈다는 경력 말고는 주목받을 만한 경력은 없었다.
초임검사 시절 서울지검에 근무한 이후 대검 중수부에 파견 갈 정도로 수사실력을 인정받기는 했지만 그는 법무부 검찰1, 2, 4과장을 역임한 기획통으로 분류됐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는 형사9부장이 되자마자 특유의 ‘저돌성’으로 언론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170㎝가 안 되는 크지 않은 키에 80㎏이 훌쩍 넘는 몸무게의 소유자인 이 부장은 일자몸매에 걸맞게 불도저 같은 스타일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다.그가 2002년 형사9부장이 되면서 처음으로 한 수사는 주금가장납입 사건이었다. 주금가장납입은 기업이 창업을 할 때 납부해야 하는 자본금을 사채업체에게 빌려 납입한 뒤 법인등기를 받은 후 이를 다시 사채업자에게 돌려주는 편법.
법인 설립을 하면서 벌이는 일종의 상법위반 사기사건이었다. 당시 검찰로서는 처음 수사한 새로운 사건이었다. 그런데 수사 결과는 놀라왔다. 그 즈음 설립된 80% 이상 기업이 이와 같이 자본금을 위장납입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많은 사채업자가 구속됐고 기업 법인들이 기소됐다.
새로운 사건을 개척한 그는 기업비리에 천착했다.이후 그는 자신을 스타검사로 만들어준 SK그룹 비자금 사건을 수사했다. 5대그룹 가운데 하나인 SK그룹 회장실을 압수수색한 데 이어 최태원, 손길승 회장 두 명을 모두 구속기소했다.
김앤장의 최고 변호사를 선임한 SK그룹과의 법리공방에서도 그는 유죄를 받아냈다. 부당내부거래행위를 통해 최 회장에게 이익을 고의적으로 줬다는 증거를 바탕으로 SK 측의 방패를 모두 뚫어낸 것이었다. 그동안 대부분 기업수사는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는 대기업 회장들을 구속기소해 유죄판결을 이끌어내는 나름의 개가를 거뒀다.
이 부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SK 회장실을 압수수색한 그는 여기서 대선자금의 단초를 잡았고 이를 토대로 대선자금 수사를 기획했다. 그게 바로 2003년 송광수 검찰총장과 안대희 중수부장(현 대법관)이 진두지휘한 대선자금 수사의 시초다.
당시 검찰 수사로 한나라당의 ‘차떼기식’ 대선자금 모금이 처음 언론에 공개됐다. 이후 한나라당에 대한 비난이 쇄도했고 한나라당은 여의도 당사를 팔고 천막당사시대를 맞았다. 또 정치자금 모금 방식이 바뀔 정도로 이 수사는 한국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권력의 시녀라는 비판을 받아온 검찰로서는 최초로 일반인들로 구성된 팬클럽이 생길 정도로 수사 성과가 상당했다.수사의 단초를 제시한 이 부장은 대선자금 수사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안대희 전 중수부장을 비롯해 당시 중수부 관계자들은 대선자금 수사 종료 후 수사의 1등 공신을 묻는 질문에 이구동성으로 이인규 중수부장을 꼽았다.
당시 수사 검사였던 한 관계자는 “이인규 청장(당시 원주지청장)이 찍었던 기업을 압수수색해서 가져온 자료가 수사에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이 부장이 찍은 기업에서 가져온 압수수색물은 정치인에게 준 돈에 대해 자물통을 채우던 기업들의 입을 여는 지렛대 역할을 했다.
압수수색 자료는 대부분 후계자 구도나 지주회사 설립 등 경영권 방어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온 기업들의 장부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만큼 이 부장은 기업의 아픈 곳을 잘 알았던 것이다.이런 이유 때문인지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이인규 원주지청장이 대선수사팀에 근무하는 것을 반대했다.
SK그룹 수사처럼 ‘통제불능’의 수사를 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고 한다. 강금실 당시 법무장관은 이와 관련해서 송광수 총장과 심한 말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그만큼 당시 이인규 청장은 참여정부에게도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참여정부가 이인규 중수부장에게 부담을 느낀 배경은 바로 SK그룹 비자금 수사였다. 대기업 회장실까지 뒤지는 검찰의 수사가 경제 발전에 방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이 반대 논리였다. 당시 참여정부 출범 후 그의 직속 상관들마저 SK 수사의 부적절함을 비판하는 말을 쏟아냈다. 그는 고립된 것처럼 보였다.
▲ 이인규 부장이 2003년 SK 비자금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 ||
이 부장이 원주로 내려간 2003년 9월 청와대 총무비서관인 최도술 씨 전격 구속으로 대선자금 수사가 시작됐다. 최 씨가 SK로부터 당선축하금 명목으로 거액을 받은 게 단초가 됐다. 이 부장은 원주에서 서울로 곧바로 복귀한다.
최 씨가 구속되는 단초를 발굴한 사람의 현장복귀는 당연하다는 것이 검찰 논리였다. 복귀 후 그는 대선자금 수사팀 현장반장 역할을 맡았다.대선자금 수사 과정에서 이 부장은 노 전 대통령의 ‘코털’을 건드렸다. 노 전 대통령의 비서 출신이던 여택수 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대목에서였다.
법원은 어찌된 일인지 롯데그룹에서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청구된 여택수 씨의 구속영장을 두 번이나 기각했다. 당시 롯데그룹 수사 담당이 이인규 청장이었다. 그러나 이 청장은 뚝심 있게 세 번째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결국 여 씨는 구속됐다.
당시 청와대에서는 도주와 증거인멸 우려가 없는데도 대통령 최측근의 한 사람인 여 씨의 영장을 세 번이나 청구했다며 이인규 청장을 비판하는 분위기였다. 그렇지만 여 씨가 받은 돈이 열린우리당 창당자금으로 쓰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열린우리당은 여의도 당사를 팔고 영등포 청과시장으로 급히 당사를 옮기는 수모까지 겪어야 했다.
이 일화만 놓고 봤을 때 이 부장은 이번 수사에서도 혐의만 있다면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대선자금 수사 이후 이 부장은 승승장구했다. 이 부장은 그 뒤 검찰총장을 측근에서 보좌하는 대검 범죄정보(범정)기획관으로 임명됐다.
범정기획관은 사정 정보를 모두 취합해 매일 아침 총장에게 직보하는 역할을 맡는다. 총장의 눈 역할을 하는 자리다. 깐깐하기로 소문났던 송 당시 총장이 얼마나 이인규 부장을 아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부장은 1년 후인 2004년 서울고검으로 발령이 났지만 바뀐 검찰 수뇌부들 역시 그를 다시 대검으로 불러 미래기획단장을 시켰다. 검찰에서 그의 위상은 이미 달라져 있었다. 이후 그는 서울지검 3차장을 거쳐 대검 중수부장이 됐다.
가장 경쟁이 치열한 사시 23, 24회 출신 중에서 그는 수많은 경쟁자를 따돌리고 사정의 컨트롤 타워라고 할 수 있는 대검 중수부장에 오른 것이다.이인규 부장이 중수부장까지 오게 된 것은 8할이 그의 승부근성 때문이다. 그는 애당초 특수수사와 거리가 먼 형사부의 부장이었다.
형사부는 특수부처럼 독자적으로 수사를 인지하기보다는 경찰 등에서 넘어온 사건을 처리하는 비인기 부서였다. 김대중 정권 때 특수부장은 ‘호남 검찰 인맥’이 거의 독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기 용인 출신인 그가 특수부에 발령 받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당시 형사9부는 금감원 등에서 넘어오는 고발사건 가운데 특수부가 관심이 없는 단순 사건을 처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형사부이면서 나름 특수부 흉내를 내는 부서쯤 되는 셈이다. 하지만 그는 형사9부를 완전히 ‘리노베이션’했다. 당시 특수부는 병역비리 수사에 올인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특수부가 화이트칼라의 부정부패를 수사하지 않고 정치수사에 얽매있을 때 그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그의 승부수는 바로 먹혀들었다. 당시 그가 모셨던 서울 중앙지검 2차장은 이후 중수부장에 오르기까지 했던 박영수 전 서울고검장이었다.
제주 출신인 박영수 차장 역시 특수수사의 사령탑인 서울지검 3차장 물망에 오르다 물을 먹은 상황이었다. 그렇게 인사에서 물을 먹었던 두 사람은 SK그룹 수사라는 합작품을 만들었고 그 결과 두 사람은 나란히 중수부장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가 만약 형사9부장에 만족하고 특수수사꺼리가 되지 않는 금감원 고발사건이나 처리했다면 오늘의 그가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승부수는 우선 조직적으로 형사9부를 금융조세조사부(금조부)로 변모시킨 것이다.
▲ 임채진 검찰총장(가운데)과 이동 중인 이인규부장.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
노태우 정부, 김영삼 정부, 김대중 정부 시절 지역중심의 편중 인사로 검찰은 권력의 시녀라는 조롱을 받아왔고 검사는 판사에 비해 권위가 떨어진다는 인상을 사회 전반에 심어줬다.이런 격차는 법률시장에서도 그대로 적용됐다. 판사들이 옷을 벗고 나가면 로펌과 기업 등에서 높은 몸값을 받았지만 검사들은 검사장 이상 출신이 아니면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 부장이 그룹총수를 구속시키고 검찰이 계속해서 기업 수사를 하자 검찰 출신 변호사들의 몸값이 폭등하기 시작했다.기업에서는 앞 다퉈 검찰 출신 법률실장을 뽑기 시작했다. 이들은 기업 사건을 로펌에 맡기는 ‘키맨 ’역할을 하게 된다. 법률시장의 70%가 이런 기업들의 사건이기 때문에 검사 출신들의 영향력은 법률시장에서 상당히 커지게 됐다.
이번 박연차 회장 비자금 사건을 두고 당초 검찰 주변에서는 박 회장에 대한 수사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견해였다. 우선 검찰과 국세청이 박 회장을 둘러싸고 알력싸움을 벌였다. 총력을 다해도 시원찮을 판에 사정기관끼리 자중지란으로 수사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게다가 박 회장의 스타일도 수사를 낙관할 수 없는 변수로 꼽혔다. 박 회장은 과거 한보사태의 장본인인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과 비교될 정도로 통이 크지만 입은 무겁다는 평가를 받아왔다.하지만 닫힌 기업인의 입을 여는 게 주특기인 이 부장은 달랐다. 이 부장은 현장중심의 압수수색물과 특유의 돌파력으로 의리파 박 회장의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침묵했던 박 회장이 입을 열자 그에게서 불법자금을 받은 수많은 정치인들 튀어나왔다. 거기에 노 전 대통령도 포함된 것이다.그렇다면 과연 박연차 게이트는 노 전 대통령의 사법처리라는 화룡점정을 끝으로 마무리될까.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먼저 이 부장의 성격과 지금까지의 수사 패턴을 보면 향후 수사는 여권 핵심부로 더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는 시각이다.
즉 구 권력을 넘어 새로운 권력까지 수사가 가능하다는 관측이다. 그러지 않고선 수사 흐름상 한나라당 소속 지자체장과 한나라당 의원들 이름이 나오다가 갑자기 노 전 대통령 불법자금이 튀어나올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대선자금 수사로 검찰 위상을 끌어 올렸듯이 이번 수사를 이명박 정부 이후 떨어진 검찰 권위를 되살리는 불쏘시개로 이용할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미 이 대통령의 친구인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과 이종찬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박 회장과 가까운 사이라는 점이 부각됐다.검찰은 천 회장을 최근 출국금지 조치했다. 또 구속된 추부길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이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을 만나 박 회장의 선처를 부탁했다는 의혹도 불거져 나오고 있다.반면 이 부장이 노 전 대통령 사법처리 선에서 이번 수사를 마무리할 것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경동고 출신인 이 부장은 정동기 청와대 민정수석과 장다사로 민정비서관과 고등학교 동문이다. 고등학교 동문이 포진한 청와대 쪽의 뜻을 거스르면서 수사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것이다.또 철 지난 사건으로 MBC를 압수수색하고 YTN 현직 기자들에 대해 영장을 청구하는 검찰의 최근 행태를 놓고 볼 때 ‘과연 검찰이 살아있는 권력을 향해 칼을 뽑을까’라는 회의론도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나 이 부장은 수사와 관련해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차라리 겨울이 따뜻했네. 4월은 잔인한 달”이라며 “무소처럼 앞만 보고 가겠다”라고 말했다. 두주불사형의 호방하고 선이 굵은 이 부장이 기자들 앞에서 T.S. 엘리엇의 시까지 인용한 것은 어떤 뜻일까.아마도 노 전 대통령의 소환 및 사법처리가 끝나는 2주 후면 시구의 숨겨진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정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