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엽(33,요미우리 자이언츠) | ||
임창용이 소속돼 있는 야쿠르트 스왈로즈 홈구장인 메이지진구구장 건너편에는 실내연습장이 따로 마련돼 있다. 한마디로 보조연습장 규모다. 지난 4월 14일, 야쿠르트 스왈로즈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3연전 첫날, 아침부터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오후에는 제법 빗줄기가 거셌다.
비로 인해 홈팀인 야쿠르트는 진구구장이 아닌 실내연습장에서 훈련을 시작했고 오후 3시 30분경 원정 경기를 하러 온 요미우리 자이언츠 선수들이 나타나자, 자연스럽게 연습장을 비워주고 떠났다. 내심 기대했던 이승엽과 임창용과의 만남은 이뤄지지 않았다. 연습을 마친 임창용은 뒷문으로 빠져나가고, 선수단 버스에서 내린 이승엽은 중앙현관문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결국 계속된 비로 경기는 취소됐고 이승엽과의 인터뷰는 훈련을 모두 마친 후에 이뤄졌다.이승엽은 요즘 컨디션 조절보다 마음을 다스리는 데 더 신경을 쓰고 있다며 복잡한 심경을 에둘러 설명했다.
“개막하고 몇 게임 안 했지만 생각대로 잘 되지 않고 있어요. 이제 겨우 9게임(4월 14일 현재) 치렀어요. 앞으로 130게임이 넘게 남았는데 지금 성적에 큰 의미를 두지 않으려고 해요. 벌써부터 포기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이승엽은 자신의 성적에 따라 기상도가 극심하게 변하는 언론의 보도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30~40게임 지나서도 지금과 같은 모습을 보인다면 그땐 언론의 비판을 수용하겠지만 지금의 성적을 놓고 시즌 전체를 평가한다는 건 너무 이르다는 생각에서다.
“일희일비하지 않으려고 나름 노력 많이 해요. 성적만 좋으면 이런 얘기 할 필요도 없죠. 모든 건 성적이 나쁠 때, 기대만큼 충족시키지 못할 때 여러 가지 말들이 나오는 겁니다. 사실 미디어에서는 그냥 좋다, 나쁘다 하고 지적하면 끝이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선수는 참 많은 감정을 갖게 돼요. 속으론 ‘빨리 잊어버려야지’하면서도 잘 안 되는 일이거든요. 저도 사람이에요. 자꾸 같은 곳을 찌르고 때리면 아프고 상처 날 수밖에 없어요.”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고 승승장구하며 스포트라이트 한가운데 있었던 시간은 모두 과거일 뿐이라고 정리했다. 선수한테 가장 중요한 건 ‘오늘’이고 그 다음 중요한 게 ‘내일’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러면서 훌륭한 선수는 안 좋은 일을 얼마만큼 빨리 잊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의미 있는 말이 이어졌다.
이승엽이 시범경기 동안 보여준 성적은 타율 0.302(53타수16안타)에 홈런 8개, 17타점이다. 개막 전만 해도 요미우리 팬들은 ‘크레이지 모드’ 운운하면서 이승엽이 전성기 때의 모습을 재현할 거라 잔뜩 기대감을 드높였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달랐다.
“시범경기 때는 투수들 컨디션이 정상이 아니잖아요. 전 한국에서부터 빠르게 페이스를 올려 100%의 몸 상태로 시범경기에 임했으니까 성적이 좋게 나왔겠죠. 시범경기 때 자신감을 찾은 건 사실입니다. 엄지손가락 부상에서도 완쾌했고 겨울 동안 훈련을 착실히 했기 때문에 이번 시즌은 정말 자신 있었거든요. 지금 성적이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단, 안타 한 개도 못 치는 날에는 주위 반응이 뜨거워 좀 신경이 쓰이는 편이죠.”
올 시즌 이승엽의 타격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상대 투수가 집요하게 몸쪽 공을 공략하기 때문이다. 이승엽이 몸쪽 공에 약하다는 걸 캐치하고 죽기살기로 몸쪽으로만 공을 던지는 것. 사실 이승엽의 왼손 엄지손가락 부상도 몸쪽 공에 대응하다가 생긴 부상이었다. 그래서 기자가 역시 올 시즌의 화두도 ‘몸쪽 공’이 아니냐고 묻자, 이승엽은 ‘맞다’고 대답한다.
“몸쪽 공을 치려고 하면 안 되거든요. 그 공을 잘 골라내야 해요. 몸쪽으로 던지려다 실투가 되는 공을 잡아야 하는데 실투를 치면 파울이 되니까…. 그런 좋은 볼을 파울 치면 그 타석은 어렵다고 봐야 해요. 그런 걸 ‘미스숏’이라고 하는데 미스숏을 줄이고 파울을 안 내는 게 가장 큰 ‘숙제’입니다. 여기 투수들은 몸쪽 공을 던져도 제구력이 돼요. 그게 한국과 틀린 점이죠.”
이승엽도 몸쪽 공에 대비한 훈련을 이전부터 해왔고 지난 겨울에도 했었고 스프링캠프를 거쳐 지금도 쭉 하고 있다. “일단 (몸쪽 공을) 안 쳐야 해요. 안 치는 연습도 해봤어요. 그런데 그게 생각처럼 되지 않아요. 방망이가 돌아가는 건 순간적인 반응이니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연습해야 해요. 연습을 하다보면 순간적으로 감이 오거든요. 갑자기 감이 올 때 그걸 놓치지 말고 갖고 가야 하는 거죠.”
▲ 사진=이은석 프리랜서 | ||
한마디로 ‘플래툰 시스템에서 길을 잃다’가 된 것. 이에 대해 이승엽은 모든 원인을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이전에는 (하라 감독이) 안 그랬잖아요. 2006년에는 너무 자주 나가서 쉬고 싶을 때가 있을 정도로 절 많이 챙겨주셨어요. 남을 탓할 게 아니라 제 자신을 탓해야죠. 프로는 성적으로 평가받는 곳인데 성적이 안 나와서 그러는 걸 제가 서운해 할 수 없는 거잖아요.”
일부에선 하라 감독과 이승엽과의 신뢰 관계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는 지적에 이승엽은 “그건 저도 알 수 없어요. 설령 그렇다고 해도 제가 먼저 그렇게 생각해서 득 볼 게 없잖아요.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저한테 좋지 않겠어요?”라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지바 롯데 시절에도 발렌타인 감독의 플래툰 시스템에 고전한 바 있는 이승엽에게 그때랑 지금과의 차이가 뭐냐고 질문하자 “더 부담이 되죠. 모든 사람이 보고 있고. 가장 큰 차이는 요미우리란 팀에 소속돼 있다는 거겠죠. 요미우리 팀은 달라요. 모든 게. 그래서 부담도 더 커지는 것 같아요”라고 설명한다.
2003년 친정팀 삼성 라이온즈의 구애를 정중히 거절하고 지바 롯데로 입단했던 이승엽. 어느새 6년의 시간이 흘렀다. 과연 ‘국민타자’ 이승엽이 외국에서 용병으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한마디로 힘들어요(웃음). 한국에 있을 땐 친구들 만나서 밥도 먹고 맥주도 한잔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잖아요. 물론 여기에도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한국과는 사뭇 느낌이 다르죠. 사회 친구도 없고. 외로워요 많이. 가끔 한국에서 보낸 시간들이 생각나요. 경기 끝난 후 숙소에서 모여 야구 얘기하고 장난치고, 편하게, 사람 냄새 나게 살았던 그 시간들이 그리워요.”
항상 반듯하고 모범생의 이미지가 강했던 이승엽이었다. 쉽게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도 않고 마음 약한 모습도 보이지 않는 그였다. 그런데 기자랑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그가 한국에서 선수 생활했던 시간들을 풀어내면서 ‘요미우리 이승엽’이 아닌 ‘인간 이승엽’의 모습을 보여줬다.
“여기선 한국에서 야구할 때처럼 부드럽고 여유 있는 야구가 안 돼요. 요미우리 선수들 자체가 다른 팀 선수들과는 다르다는 인식을 갖고 있거든요. 미디어와 팬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받는 팀이다 보니 성적에 따라 영향을 안 받으려야 안 받을 수가 없어요.”
이승엽은 현재 붙박이 주전으로 뛰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애써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경기장에 갈 때마다 항상 출전할 거란 믿음을 갖고 나가요. 그랬다가 뛰질 못하면 많이 아쉽죠. 선수는 게임에 나가야 살아있는 걸 느끼잖아요. 실망하기엔 아직 이르지 않나요? 페이스 잘 끌어올려서 제 자리를 굳혀야죠.”
만약 2003년으로 돌아간다면 그때도 지금과 같은 선택을 했을 것 같느냐고 물었다. 이승엽은 주저없이 ‘그렇다’고 말했다.“한국에선 안 뛰었을 거예요. 외국 무대에 꼭 도전해 보고 싶었어요. 물론 욕심처럼 메이저리그 진출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일본이든, 어디든 나갔을 겁니다. 절 잘 모르시는 분들은 지금 제가 ‘어렵다, 힘들다’ 하는 걸 행복한 비명이라고 하실 거예요.
그런데 진짜 힘들어요. 요즘 참 많은 걸 느끼고 배우고 있어요. 태어나서 한 번도 안 해본 경험을 일본에서 2~3년 동안 다 해본 것 같아요. 이거야 말로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경험이죠 뭐(웃음).”‘국민타자’한테 지금도 야구가 어렵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야구는 정답이 없다’였다.
“이전에 선배들이 야구는 하면 할수록 힘들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땐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몰랐어요. 지금요? 절대 공감하고 있죠(웃음). 그래서 (야구가) 사랑스럽기도 하고 얄밉기도 해요. 사실 한국에선 실패를 모르고 살았잖아요. 일본에서 새삼 야구의 희로애락을 알게 됐어요. 야구 한 날보다 앞으로 할 날이 적게 남았지만 야구 그만두는 날까진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러니까 크게 실망도, 크게 기뻐하지도 마세요. 믿음을 갖고 절 지켜봐주시면 고마울 것 같아요.”
인터뷰가 끝난 후, 이승엽은 17일, 주니치 드래곤스와의 원정경기에서 1루수 겸 6번 타자로 선발 출장해 연타석 홈런을 날리며 팀의 5-3 승리를 이끌었다. 이번 홈런은 이승엽 개인적으로 한일 통산 451홈런이었다. 이승엽의 환한 얼굴이 그리운 인터뷰였다. 마음의 짐을 내려 놓고 야구를 즐길 수 있는 그날이 돌아온다면, 요미우리 4번타자로 도쿄돔에 다시 서게 된다면, 그의 얼굴에 웃음꽃이 필 수 있을까.
도쿄=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