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하나를 해도 대충 하는 법이 없고 투철한 책임감으로 주어진 임무를 100% 완수하는 사람들이다. 대표적인 인물은 독일의 철학자 칸트. 그는 시계 없이도 점심식사 시간과 산책 시간을 철저히 지킨 것으로 유명했다. 오죽하면 주변 사람들이 칸트가 산책하는 것을 보고 시계를 맞췄겠는가. 그런데 ''한국 축구의 아이콘'' 박지성(28·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 칸트와 같은 부류인 완벽주의자라면 믿으시겠는가. 칸트만큼은 아니겠지만 옆에서 지켜본 박지성은 항상 완벽을 추구하고 있다. 적어도 ‘축구선수’ 박지성의 범주 안에서는 말이다.
#준비된 대표팀 은퇴 선언
지난 14일 파주 축구대표팀트레이닝센터(NFC). 태극전사들의 단체 인터뷰 중 박지성이 폭탄 발언을 했다. “이번 남아공월드컵이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월드컵이 될 것 같습니다.”
듣는 사람은 귀를 의심해볼 만한 놀라운 얘기였지만 박지성의 표정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무덤덤했다. 오히려 그는 “2014년이 있지만 그때까지 체력이 버텨주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라며 이유까지 친절히 설명했다.
인터뷰 중 나온 돌발 발언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동안 보여준 행동과 언행을 돌아볼 때 박지성은 절대 이런 얘기를 가볍게 하는 사람이 아니다. 박지성은 왜 남아공월드컵을 앞둔 시점에서 대표팀 은퇴 얘기를 꺼냈을까.
완벽주의자 박지성의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축구대표팀의 한 관계자는 “엄청난 활동량이 장기인 (박)지성이가 자신의 장점이 사라질 경우 대표팀에 더 머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은퇴 얘기를 꺼낸 것 같다”며 미래를 내다본 완벽주의자의 발언으로 해석했다.
박지성의 한 측근 역시 “(박)지성이는 오래전부터 대표팀 기여도가 떨어진다고 판단되면 언제라도 물러나겠다는 얘기를 했다“며 ‘완벽주의자 박지성''에 힘을 실었다. 이 측근은 “(박)지성이가 은퇴 발언을 하기 전 (이)영표, (정)경호 등 주변 동료들과 먼저 얘기를 나눴다. 아마 단단히 마음 먹고 얘기 했을 것”이라며 은퇴 발언까지도 미리 준비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귀띔했다.
▲ 지난 17일 이란전에서 동점골을 넣은 뒤 포효하는 박지성. 허정무 감독의 손주들을 위한 엉금엉금 세리머니도 미리 준비했다. 연합뉴스 | ||
그렇다면 박지성은 진짜 완벽주의자일까. 주변 사람들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그렇다.
박지성의 ‘베프(베스트프렌드)'로 알려진 정경호(29·강원)는 “평소 생활을 보더라고 지성이는 완벽주의자에 가깝다. 절대로 돌발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경호에 따르면 박지성은 술을 마시더라도 절대 흐트러짐이 없다. 또 계획되지 않은 지출은 하지 않는다.
한발 더 나아가 사회 분위기에 맞춰 소비를 한다고 한다. 행여나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경호는 “지난 대표팀 휴가 때 만나서 밥을 먹으러 가는데 비싼 곳은 가지 말자고 하더라. 축구 선수인 만큼 보통 먹는 것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 편인데 지성이가 먼저 ‘경제가 좋지 않은데 우리도 아껴야 하지 않겠느냐'며 가격이 적당한(?) 곳으로 갔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해 봐도 박지성의 완벽주의자 성향을 알 수 있다. 지난 5월 특집 인터뷰를 위해 맨체스터를 방문했을 때다. 질문을 받은 박지성은 쉽게 대답하는 법이 없었다. 자신의 대답이 어떤 파급 효과를 낼 것인지 고민한 뒤 답변하는 모습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원더걸스가 좋으냐 소녀시대가 좋으냐'는 질문이었다. 딱딱했던 인터뷰장의 분위기 전환을 위해 던진 질문이었는데 박지성의 대답은 걸작이었다. “이건 나 죽으라는 거죠. 어느 한 쪽을 택하면 다른 쪽 팬클럽 분들이 저를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라고 해명했지만 사실은 자신의 선택에 따른 후폭풍을 예견한 답변 거부였다.
박지성이 어느 한 쪽을 택했다고 가정해보자. 한마디 한마디가 신문에 보도되는 박지성이 만약 ‘소녀시대보다 원더걸스가 좋다'고 말했다면 연예계에 미치는 파장은 엄청났을 것이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과 거스 히딩크 감독 중 선택해 달라'는 질문과 ‘맨유 유니폼과 국가대표팀 유니폼 중 어느 것이 더 소중한가'라는 질문에도 박지성은 똑같이 ‘노코멘트'로 일관했다. ‘오프더레코드(보도하지 않는다는 조건)'라는 단서를 달아도 박지성의 굳게 닫힌 입은 열리지 않았다.
▲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축구선수' 박지성은 유소년 시절부터 완벽주의를 추구했다. 2006년 발간된 그의 자서전 <멈추지 않는 도전>을 보면 알 수 있다. 박지성은 발등 구석구석마다 적어도 3000번씩 공이 닿아야 감각이 생기고 다시 3000번이 닿아야 어느 정도 컨트롤할 수 있다는 어린 시절 코치의 말에 따라 운동장은 물론 집에서도 컨트롤 연습에 집중했다.
수원공고 시절에는 짧은 거리의 패스와 단거리 달리기를 하루도 빼먹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은 슈팅과 멋진 드리블 연습을 했지만 박지성은 융통성이 없다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기본기에 충실했다. 어렸을 때부터 완벽을 추구하며 연습한 결과 세계 수준의 체력과 기본기를 갖춘 지금의 박지성이 완성된 것이다.
# 축구장에서의 존재감
박지성은 ‘퍼펙트 주장'이다. 지난해 10월 아랍에미리트연합(UAE)전을 앞두고 생애 처음으로 주장 완장을 찬 박지성이지만 마치 준비한 듯 새로운 리더십을 꺼내 보였다. “경기장 안팎에서 즐겁게 경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겠다”는 공약을 내건 그는 선후배의 가교 역할을 하는 동시에 친구처럼 편한 ‘무권위의 리더십'을 몸소 실천했다.
선수들의 몸 관리에 도움이 된다며 코칭스태프에 훈련 스케줄을 미리 알려달라고 요청했고 경기장으로 가는 길에는 버스에서 댄스 음악을 틀어달라고 요청했다. 선수들의 긴장감을 풀어주겠다는 박지성의 아이디어였다.
그렇다고 카리스마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11월, 사우디아라비아 원정을 갔을 때다. 박지성은 선수들을 모아놓고 “우리는 여기 놀러온 게 아니라 이기러 왔다. 후회를 남기지 말자“며 짧지만 강한 메시지를 남겼다.
당시 이근호(24·주빌로)는 “마음을 다잡는 계기가 됐다”고 주장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 때문이었을까. 대표팀은 이근호와 박주영의 골로 2-0으로 이겼다. 19년간 이어진 사우디아라비아전 무승 징크스도 시원하게 날려버렸다.
대표팀 막내들은 ‘완벽을 추구하는' 박지성과 함께 생활하는 것 자체가 행운이라는 반응이다. 김치우(26·FC서울)는 “합숙 중 (박)지성이 형이 영국 생활과 맨유의 훈련 분위기를 자세히 얘기해줬다. 형 얘기를 듣다보면 ‘더 잘해야지'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라고 말했고 기성용(20·FC서울)은 “(박)지성이 형의 행동 하나하나가 교과서다. 그라운드 안에서나 밖에서나 완벽을 추구하는 (박)지성이 형의 모습에 항상 반성하게 된다”고 밝혔다.
성남에서 주장을 맡고 있는 김정우(27)도 “모든 면에서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는 (박)지성이 형을 보면서 팀을 좋은 분위기로 이끌 수 있는 아이디어를 많이 얻고 있다. 많은 선수들이 (박)지성이 형의 완벽한 준비 자세를 배울 필요가 있다“고 ‘퍼펙트 박지성'에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렸다.
김종력 스포츠칸 축구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