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세청장에 내정된 백용호 전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이 관계자는 공통점으로 세 가지를 꼽았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 집념, 실용.
“이명박 대통령과 백 전 위원장님은 어려운 환경을 딛고 자수성가한 사람들입니다. 이 때문에 사생활은 굉장히 소박하죠. 반면 업무적인 측면에서는 실용을 추구하고 목표를 이루려는 집념이 대단합니다.”
이 때문일까. 백 내정자는 이명박 대통령의 의중을 가장 잘 파악하는 인물 중 하나로 꼽힌다. 관가에서는 백 내정자의 임명은 그만큼 국세청 개혁에 대한 대통령의 의지가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하고 있다. 향후 백 내정자의 행보에서 이 대통령의 개혁에 대한 의지를 엿볼 수 있을 것이란 말도 나온다.
위기에 빠진 국세청호를 이끌 새로운 선장으로 부름 받은 백용호 내정자의 인생, 업무 스타일 그리고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MB와의 만남 등을 돌아봤다.
백용호 내정자가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했던 기간은 약 1년 4개월. 그를 식당에서 만났던 인사들은 까다로웠던 내정자의 입맛 탓에 애를 먹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입맛이 까다로운 때문도 비싼 음식을 찾기 때문도 아니었다. 백 내정자는 최고급 스테이크에도 호텔 중식당의 코스 요리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유독 보리밥에 된장찌개만을 고집했던 것. 마시는 물도 항상 S 사에서 나오는 것만 찾았다. 백 내정자는 호텔 식당에서도 메뉴에 없는 보리밥과 된장찌개를 찾아서 같이 식사를 하는 상대방이 당황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백 내정자의 이런 소박한 식생활은 불우했던 어린 시절과 연관이 깊다.
백용호 국세청장 내정자는 1950년 충남 보령에서도 변두리에 속하는 산골에서 태어났다. 유소년기에 그는 전체 가옥이 20여 채가 되지 않는 작은 마을에서 자랐다. 이 마을에서는 읍내를 오고가는 버스도 하루에 세 차례에 불과했다.
어린 시절 그에게 ‘가난’은 그림자와 같았다. 아버지가 ‘구멍가게’ 장사를 하면서 가족들이 근근이 먹고 살 수는 있었지만 부자가 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불운은 비단 경제적인 것에만 그치지 않았다. 백 내정자는 한참 어머님의 보살핌이 필요하던 사춘기 시절인 중학생 때 어머니를 심장병으로 떠나보내야만 했다. 어머니는 이미 그가 초등학생일 때부터 몸져 누워 있었고 할머니가 그와 동생을 돌봤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백 내정자의 파란만장한 학창 생활이 시작됐다. 그는 충남에서 태어났지만 중학교는 광주(광주서중), 고등학교는 익산(남성고)에서 나온 흔치 않은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가 익산 남성고를 나오게 된 것은 결혼한 고모가 군산에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적어도 고등학교 시절 이후 백 내정자는 공부에 있어서만큼은 언제나 남들보다 앞서가는 수재였다. 10대의 나이에도 자취를 해야 하는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각오로 공부에 매진해 장학금을 받으며 고교과정을 무사히 마쳤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아버지는 아들이 안정적인 공무원 자리인 면서기나 경찰이 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성적에 최상급이었던 그는 공부를 해서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겠다는 결심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다. 백 내정자는 서울대학교에 넉넉히 합격하고도 남을 실력이었으나 학비문제로 중앙대학교를 택했다. 당시 중앙대에서는 전국의 우수한 학생을 선점하기 위해 특차 전형을 실시했고 그는 여기에 합격해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백 내정자는 덕분에 학비는 물론 생활비 걱정 없이 대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대학입학 3년 반 만인 1980년. 백 내정자는 중앙대 정경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후 곧바로 외환은행에 취직했지만 1년 2개월 만에 임철순 당시 중앙대 이사장의 권유로 은행을 그만두고 유학길에 올랐다. 우수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전액 장학금으로 학비를 대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는 1982년 미국 뉴욕주립대에 진학했고, 여기서도 우수 학생으로 장학금을 놓치지 않았다. 뉴욕주립대에서도 그의 논문은 최우수 논문으로 꼽힐 정도로 학자로서도 그의 실력은 탁월했다. 백 내정자는 입학 4년 만에 박사학위를 획득하는 또 한 번의 인생역전을 일궈냈다. 그리고 만30세의 나이에 한국에 들어와서 이화여대 최연소 남자교수로 임명됐다. 남들이 20년에 걸쳐 할 일을 백 내정자는 불과 10년 만에 이뤄냈던 것이다.
영원히 학자의 길을 걸을 것 같았던 그가 마흔한 살 때 이명박 대통령과 조우하면서 다른 길을 가게 된다. 두 사람이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1996년 15대 총선 때다. 당시 백 내정자는 신한국당 서울 서대문 을,이 대통령은 종로구 후보로 나섰다. 인근 지역구여서 서로 안면을 트게 된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백 내정자는 낙선했지만 이 대통령은 국회의원에 당선된 것.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이 대통령은 선거법 위반으로 항소심에서 벌금형을 받고 의원직을 상실할 위기에 놓이자 사퇴하고 1998년 미국행을 택한다. 당시 미국으로 떠나기 전 몇 개월은 이 대통령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 중 하나였다. 이 대통령은 자신이 1994년에 만든 동아시아연구원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그때 이 대통령의 말동무가 돼 준 사람이 국회의원 낙선 후 이곳의 연구원으로 지내던 백 내정자였다. 두 사람은 15년이란 적지 않은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여러 면에서 ‘코드’가 맞는다는 것을 느꼈고 이후 세대를 뛰어넘는 ‘우정’을 쌓았다.
다음은 백 내정자가 공정위원장 재임 시절 이 시기를 회상하며 한 말이다. “예전부터 이명박 대통령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도움이 되고 싶어 다가갔습니다. 대한민국의 기업 풍토에서 어떻게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사람이 까다로운 정주영 회장에게 발탁돼 전문경영인으로 클 수 있었을까 궁금했어요. 그 캐릭터를 배우고 싶었지요.”
▲ “우리는 소망라인” 백용호 내정자는 이명박 대통령 외에도 같은 소망교회 출신인 강만수 국가경쟁력위원장과 밀접한 사이다. | ||
두 사람의 각별한 인연은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이 되면서 더욱 두터워졌다. 2002년 이 대통령이 서울시장에 취임하자 그는 핵심 브레인으로서 서울시정개발 연구원장이 됐다. 그는 재임 당시 박사급 연구원을 대거 영입함으로써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을 명실상부한 서울시의 싱크탱크로 만들었다. 청계천 개발, 대중교통 개편, 시민의 광장 조성, 뉴타운 개발 등 이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 일군 상당수 업무들이 시정개발연구원을 통해 세상에 공개됐다.
이 대통령이 시장 임기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대선전에 뛰어든 2006년 6월부터는 바른정책연구원 원장으로 학계의 MB맨들을 규합해 대선공약을 개발하며 뒷받침했다. 바른정책연구원은 이 대통령의 정책자문 그룹 중에서도 가장 핵심그룹으로 꼽히고 있으며 현재도 이곳 출신 인사들이 정부 주요 요직에 포진되어 있다.
두 사람이 끈끈한 인연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공감’할 수 있는 경험이 많았기 때문이다. 어려운 가정환경이 그랬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집념 하나로 이겨냈다는 점이 그랬다. 또한 젊은 시절의 눈물겨운 고생이 성공의 발판이 됐다는 것도 비슷하다. 두 사람은 항상 최연소란 수식어를 꼬리표처럼 달고 다녔다. 이명박 대통령이 35세의 나이로 최연소 현대건설 사장이 됐던 것처럼 백 내정자도 최연소로 이화여대 남자교수로 발탁됐으며, 이명박 정권 첫 장관급 인사 때도 그는 ‘최연소 장관’으로 이름을 올렸다.
불우한 가정환경을 딛고 자수성가한 공통점 때문일까. 두 사람은 업무 스타일마저도 비슷하다. 특히 ‘실용’을 강조하는 것이 그렇다.
백 내정자와 자주 대면했던 공정위 한 관계자의 말이다.
“처음에 백 내정자가 공정위원장으로 왔을 때는 내부의 불만이 많았습니다. 가뜩이나 이명박 정권 들어 공정위의 역할이 축소될 것이라는 우려가 많았는데 (백 내정자가) 공정거래법 전문가가 아니었지 않습니까. 실제로 위원장 시절 초기에는 조직 장악이 잘 안 됐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직원들의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업무 이해도가 놀라울 정도로 빠르고 카리스마가 대단했죠. 조직을 급속도로 장악해 나가더라구요. 보고는 ‘항상 요점만 간단히’였고 형식적인 것을 굉장히 싫어했습니다. 조직을 빠르게 장악할 수 있었던 데는 주로 하위직들한테 신뢰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백 내정자는 고위직에게는 완벽을 요구하고 굉장히 엄격했는데 하위직들에게는 언제나 너그러웠죠. 이런 소문이 나면서 백 내정자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죠.”
실제로 백 내정자는 지난해 말 각 기관 노조에서 실시하는 업무평가에서 전체 조직장 중 3위를 거뒀다. 노조 입김이 다른 부처보다 세다는 점을 감안하면 굉장히 준수한 성적이라는 게 공정위 직원들의 평가다.
일단 백용호 내정자에 대해 국세청 직원들은 기대감을 나타내고 있다. 국세 행정에선 비전문가지만 본인 스스로가 업무 파악을 완전히 하기 전에는 함부로 조직을 흔들지 않고 신중을 기하기 때문에 크게 우려할 바 없다는 분위기다. 그가 ‘공정거래’ 비전문가임에도 불구하고 공정위원장으로 호평을 받았던 것도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전문가의 조언을 구하는 등 겸허하고 신중한 면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백 내정자는 공정위 시절 기업관련 업무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관련해서 구설수에 오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특히 공정위에서 부과하는 과징금이 기업과의 조율 과정을 거쳐 낮아지는 경우가 아예 없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오해의 소지를 만들지도 없었다.
하위 직원들에 대한 이해가 깊다는 것은 국세청 직원들이 가장 기대하는 부분이다. 특히 백 내정자는 내부고발 등에 대해 상당히 관대한 것으로 알려지자 얼마 전 한상률 전 청장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파면된 직원이 극적으로 구제될 수도 있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그러나 백 내정자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없는 건 아니다. 공정위의 또 다른 관계자는 백 내정자는 공무원 이미지보다는 정치인 이미지가 강하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정치인들이 언론 동향에 민감한 것처럼 백 내정자도 공정위 위원장 시절부터 언론에 많은 신경을 써왔다고 한다. 본인과 관련한 언론보도에 상당히 관심을 가졌으며 보좌진에서도 이 부분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이 때문에 대변인실의 역할 또한 굉장히 중요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백 내정자는 현 정권과 각을 세우는 언론과도 자주 인터뷰하며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왔다.
백 내정자가 ‘리틀 MB’라 불릴 정도로 대통령과 가깝다는 점도 ‘양날의 검’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공정위 시절에는 그가 최연소 장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측근이란 점 때문에 비교적 외풍에 시달리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공정위와 달리 국세청은 권력기관에 가깝기 때문에 갖가지 외풍이 심한 조직이다. 권력자와 가깝다는 것은 외풍을 잘 막을 수도 있지만 쉽게 노출될 수도 있다는 의미도 내포돼 있다.
이를 의식한 듯 백 내정자는 내정 발표 이후 “국세청은 권력기관이 아닌 단순 행정기관”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백 내정자는 이 대통령 이외에도 현 정권 실세들과 각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백 내정자는 이 대통령이 다니고 있는 소망교회 출신으로 역시 같은 교회에 다니는 강만수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과도 밀접한 사이인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남성고 출신의 백 내정자는 역시 같은 고등학교 출신의 현 정권 숨은 실세 김백준 총무 비서관과도 친한 사이인 것으로 전해진다. 백 내정자가 국세청장으로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이런 부분들을 얼마나 잘 컨트롤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 국세청 관계자들의 말이다.
세간의 예상을 깨고 국세청장에 내정된 백용호 내정자. 본인조차도 발표 당일 아침에 내정소식을 통보받았을 정도로 그의 국세청행은 전격적이었다. 한 국세청 고위 관계자는 “내부에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위층은 거의 ‘패닉’ 상태에 빠졌다”고 말했다.
과연 그가 대통령의 측근이라는 비아냥과 비전문가라는 비판을 극복하고 위기의 국세청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또한 각종 비리에 연루돼 불명예 퇴임을 한 전임 청장의 전철을 밟지 않고 무사히 트랙을 내려올지도 그를 지켜보는 또 하나의 ‘관전포인트’가 될 전망이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