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생활이 10년 차인 추신수도 한국 사람을 만나면 으레 한국 식당을 찾게 된다. 경기를 마치고 늦은 저녁 식사를 위해 시애틀 다운타운가를 돌아다니다 우연히 한국인이 운영하는 ‘포차’를 발견했다. 식사가 된다고 해서 들어간 그곳에는 경기장에서 방금 나온 매리너스 팬들과 한국인들이 식사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추신수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식사 주문을 하는데 추신수가 무척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날 팀은 시애틀을 상대로 9-0 대승을 이끌었지만 추신수는 4타수 무안타에 삼진도 2개나 당했다.
“오늘 우리 팀에서 안타 한 개 못 친 사람은 저랑 사이즈모어밖에 없을 거예요. 경기 끝나고 라커룸에서 사이즈모어에게 ‘오늘 우리 뭐 한 거지?’라고 말했더니 그 친구도 한심한 모양이더라고요. 사이즈모어는 안타를 못 치고 타점을 올리지 못해도 연봉이 높으니까 별 걱정이 없죠. 전 아니잖아요. 하루하루 성적에 일희일비해야 하는 상황이다보니까 오늘처럼 빈손으로 경기를 마치면 미칠 것 같아요.”
올시즌에 운명을 걸고 있는 그로선 매 경기가 ‘전쟁’을 치르는 기분일 것이다.
“밥 먹기 전까지만 괴로워하고 밥 먹고 나선 잊어버릴 거예요(웃음). 제가 <일요신문>에 연재하는 일기에는 성적에 초연한 듯 ‘똥폼’을 잡지만 사실 저도 그저 인간일 수밖에 없어요. 메이저리그에서 최저 연봉(42만 달러)을 받는 선수이다보니 몸값을 키우려면 올해 정말 잘해야 해요.”
성적 때문에 너무 힘들어하는 추신수를 상대로 인터뷰를 진행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제대로 된 인터뷰는 다음날 낮 경기 후에 다시 만나서 하기로 하고 간단히 맥주 한 잔씩 비우고 헤어졌다.
다행히 이튿날 추신수는 첫 타석에서 안타를 기록하고 1득점을 올려 클리블랜드가 10-3으로 연승 행진을 벌이는 데 기폭제 역할을 했다. 경기 후 사복으로 갈아입고 기자 앞에 나타난 추신수의 얼굴은 전날보다 한결 밝은 표정이었다. 이번에는 한인들이 모여 사는 시애틀 외곽의 페드럴웨이로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페드럴웨이는 한때 추신수가 머물렀던 타코마 바로 인근 지역이다.
모처럼 찾은 시애틀의 한인 타운을 보며 감회에 젖은 듯한 표정을 짓는 추신수. 무빈이가 태어날 당시 경제적으로도 굉장히 힘든 시절이라 추신수한테 시애틀은 많은 의미를 안겨 준다.
“2005년 초에 무빈이가 태어났는데 그때 통장에 100달러 밖에 없었어요. 마음 같아선 내 아이한테 좋은 걸로만 다 사주고 싶었지만 돈이 없다 보니까 그럴 수가 없더라고요. 아내는 아내대로 고생하고 전 저대로 힘들었고…, 그런데 죽으란 법은 없나 봐요. 2005년 4월 생애 최초로 빅리그에 올라섰으니까요. 비록 15일 만에 다시 내려오긴 했지만 그 짧은 경험이 제가 더 야구를 잘해야만 한다는 동기부여를 갖게 해줬죠.”
추신수의 태극기 사랑은 대단하다. 글러브는 물론이고 방망이에도 태극기 스티커를 붙였다. 부산에서 제작하는 국산 배트를 사용하는 추신수가 태극기가 선명히 박힌 배트를 휘두르는 모습이 TV 화면으로 잡힐 땐 가슴 한 구석이 찌르르해지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순수한 마음으로 봐 주셨으면 좋겠어요. 누군 가식이다 뭐다 하실 수도 있겠지만 제가 좋아서 하는 행동이거든요. 솔직히 한국에 있을 때는 그런 애국심을 잘 몰랐어요. 그런데 이렇게 외국에 나와서 선수 생활을 하다보니까 제 행동 하나하나가 한국에 대한 이미지로 연결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동료 선수들이 더 관심 있게 보더라고요. 한국에 대해 이런저런 질문도 해오고. 저도 태극기가 그려진 방망이로 야구를 하면 왠지 없던 자신감도 생기는 것 같고 그래요.”
추신수는 지난 WBC 대회를 통해 한국 타자들의 실력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김태균(한화)과 김현수(두산)에 대해선 깊은 인상을 갖게 됐다고.
“보통 타율이 좋으면 파워가 낮고 파워가 좋으면 타율이 낮거든요. 그런데 두 선수는 두 가지를 다 갖고 있더라고요. 특히 현수는 공을 맞추는 능력이 탁월했어요. 이치로처럼 공을 끝까지 보고 치더라고요. 현수랑 태균이 하는 걸 보면서 많이 배웠어요. 특히 (이)대호는 한국 최고의 거포라 그런지 자심감이 돋보이던데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대호가 야구한 게 저 때문이란 걸.”
야구부에 입단하기 위해 부산 수영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던 추신수. 3학년 학급에 들어가 전학온 인사를 하는데 그때 교실 맨 뒷줄에 앉아 있는 한 친구가 눈에 띄었다.
“체격이 엄청 크더라고요. 제가 이전 학교에서 싸움도 많이 하고 ‘짱’ 노릇을 했거든요. 덩치 큰 애를 보니까 그 애를 꺾어야 제 존재가 인정을 받을 것 같았어요. ‘넘어야 할 산’처럼 생각했죠. 그 애가 대호였어요. 야구부 감독님께 체격 좋은 애가 우리 반에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당장 데려오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대호가 야구하는 거 싫다고 하더라고요. 아무래도 그때 가정 형편이 어렵다보니까 야구를 할 엄두가 안 났겠죠. 결국 설득 끝에 야구를 하게 됐는데 제가 나서지 않았다고 해도 언젠가는 대호가 야구를 했을 거예요.”
추신수에게 가장 큰 ‘숙제’인 병역 문제와 관련해 솔직한 심경을 물었다. 지금까지 추신수는 군대 얘기만 나오면 ‘당분간은 야구에만 전념하겠다’며 즉답을 회피해 왔기 때문이다.
“지금도 어려워요. 그 문제는. 제가 뭐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잖아요. 굉장히 민감한 부분이고. 사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어떻게 생각이 안 나겠어요. 제 인생에 가장 큰 문제인데. 한국 팬들이 좋은 얘길 많이 해주시더라고요. 어떤 분은 국적을 옮겨라, 시민권을 따라, 국가에서 병역 면제를 해줘야 한다는 등 여러 반응들을 보이셨어요. 저 대신 군대 두 번 갔다오겠다는 분도 있었고요(웃음). 감사하고 고마워요. 절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이런저런 방법들을 고려하고 있지만 아직은 시간이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끝까지 한 번 가보려고요. 그러다보면 어떤 해결책이 나오지 않을까요?”
팀의 에이스로서 부산고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추신수는 2000년 롯데 신인 우선지명 대상이었다. 그러나 당시 추신수와 아버지는 롯데의 무성의한 태도에 실망을 느꼈고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추신수를 잡으려고 뛰어들면서 추신수는 미국 진출로 마음을 돌렸던 것이다.
“당시 부산고 조성옥 감독님이랑 아버님이 구단 관계자들을 만나셨는데 절 잡기 위한 최소한의 반응을 느끼지 못한 뒤 크게 실망하셨더라고요. 그래서 시애틀로 방향을 튼 거예요. 삼촌(박정태)이 롯데에서 야구하는 걸 보면서 꿈을 키웠어요. 삼촌과 한 팀에서 야구하는 꿈을. 아쉬움은 많이 남지만 그때 롯데에서 절 안 잡아줬기 때문에 제가 지금 이곳에서 야구할 수 있는 거잖아요.”
추신수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다시피한 양귀헬멧. 그러나 내년부턴 양귀헬멧을 쓴 추신수를 보기 힘들 것 같다. 추신수는 “구단에다 내년부턴 한쪽 귀 헬멧을 쓰겠다고 말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다른 선수들과 똑같이 쓰고 싶어서다”라고 말한다.
추신수랑 페드럴웨이로 오기 전에 시애틀 다운타운에 위치한 그의 숙소 근처에 들른 적이 있었다. 호텔 인근 한 상점에서 티타늄 목걸이(운동선수들이 많이 하고 다니는 목걸이)를 주문하기 위해서였는데 메이저리그의 유명 선수들의 사인볼이 전시돼 있는 틈으로 추신수의 사진과 사인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추신수는 자신을 ‘이제 겨우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풀타임을 경험한 수준’이라고 자세를 낮췄지만 시애틀 현지에서 느낀 추신수의 위상은 진정한 메이저리거, 바로 그 자체였다.
시애틀=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