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내 사랑 내 곁에>를 찍으며 20여 kg을 감량한 뒤 아직 예전 몸무게로 돌아오지 못해 얼굴이 핼쓱한 김명민. 연합뉴스 | ||
연예계에는 김명민처럼 높은 시청률(또는 관객수)이 보장된 ‘흥행 메이커’들이 여럿 더 있다. 그렇지만 김명민의 영향력은 시청률(혹은 관객수)과 같은 단순한 수치로 끝나지 않는다.
‘이순신 신드롬’ ‘장준혁 신드롬’에 이어 ‘강마에 신드롬’까지, 그가 연기한 캐릭터는 하나같이 엄청난 파급력을 발휘하며 새로운 사회 현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번엔 그가 영화 <내 사랑 내 곁에>로 돌아왔다. 루게릭병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남성을 연기한 그는 또 한 번의 엄청난 호평을 받고 있다.
20여kg을 감량하며 혼신을 다해 연기한 김명민의 투혼, 촬영하며 정말 루게릭병 환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는 열정이 스크린을 통해 그대로 묻어난다. 이제야 비로소 이순신, 장준혁, 강마에가 아닌 ‘김명민 신드롬’이 시작된 것이다.
서울예대 연극과를 졸업한 96년, 김명민은 4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SBS 공채탤런트 6기로 뽑히면서 무난히 연예계에 데뷔했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어렵게 공채 탤런트가 됐을지라도 스타가 될 수 있는 기회는 기수마다 서너 명에 불과하다. 단역으로 시작해 단역으로 끝나 버리는 공채탤런트도 부지기수다.
김명민 역시 데뷔와 동시에 단역을 주로 맡는 무명 배우 시절을 거쳐야만 했다. 기회는 2000년이 돼서야 왔다. MBC 미니시리즈 <뜨거운 것이 좋아>에 처음으로 주연으로 출연해 그해 신인상까지 거머쥔 것.
이 작품을 통해 영화관계자들의 눈에 띈 김명민은 영화 <소름>으로 충무로에 데뷔한다. 이 작품에 상대역으로 출연한 고 장진영은 스타로 발돋움했지만 김명민은 여전히 무명의 자리를 지켜야만 했다.
운도 없었다. <소름>에서 보여준 연기력을 인정받아 3~4년 동안 3편의 영화에 연이어 출연했지만 모두 촬영 도중에 영화가 ‘엎어지고’(제작이 중단되고) 말았다. 다시 그가 연예관계자들에게 주목을 받은 것은 2004년. KBS 드라마 <꽃보다 아름다워>에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하면서부터다.
진정한 기회는 <꽃보다 아름다워> 종영 직후에 찾아왔다.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이성주 PD가 직접 전화를 걸어와 이순신 역할을 제안한 것.
당시 김명민은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캐스팅돼 열심히 연습한 뒤 첫 촬영 현장에 갔는데 거기서 다른 배우가 대신 캐스팅됐다는 얘길 들은 경험도 여러 번 있었던 터라 믿기지 않았다”면서 “이순신 역할이 너무 매력적이고 탐이 났지만 또 언제 다른 배우로 바뀔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리 기쁜 일만은 아니었다”고 얘기한다.
게다가 당시 김명민은 배우의 길을 포기하고 아내와 함께 뉴질랜드 이민을 준비 중인 상황이었다.
4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공채탤런트가 되고도, 첫 주연을 맡은 드라마로 신인상까지 받고도, 고 장진영을 스타로 등극시킨 영화에 상대역으로 출연하고도 스타가 되지 못한 김명민, 그에게 남은 길은 단 하나 배우가 되는 것뿐이다.
연예계엔 정말 매력 있는 연예인이 많다. 당연히 매력적이니까 인기를 먹고 사는 연예인이 됐겠지만 같은 연예인이 봐도 눈에 띌 만큼 풍부한 매력의 소유자들이 연예계엔 참으로 많다. 그렇지만 김명민의 경우 냉정하게 얘기해 매력적인 남성은 아니다.
본인 역시 이 부분을 인정한다. 언젠가 인터뷰에선 스스로를 “지루하고 따분한 사람”이라 표현했을 정도다.
영화 <내 사랑 내 곁에>를 홍보하는 과정에서 엉뚱한 이슈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김명민의 ‘무릎팍도사’ 출연 여부였다. 결국 출연은 무산됐다.
그 이유에 대해 김명민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부러 안 나가는 것은 아니고 나가도 특별히 할 말이 없기 때문”이라며 “그런 자리에서는 아무래도 배우의 사생활을 주로 궁금해 하시는데 제겐 알려드릴 만큼 대단한 사생활도 없다”고 얘기한 바 있다.
▲ 영화 <내 사랑 내 곁에> | ||
<내 사랑 내 곁에>를 촬영할 당시엔 배역에 온전히 몰입하기 위해서 숙소에서도 커튼을 드리우고 실내를 항상 어둡게 만들어 놓고 가족들과도 연락을 완전히 끊고 지냈다.
그러다 보니 불면증과 우울증이 찾아왔고 체중 감량 역시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건강에 치명적일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후반부 장면들은 실제로 몸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 본인도 어떻게 연기를 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날 정도란다.
분위기 메이커, 또는 매력 있는 남성으로 분류되는 배우들은 큰 소리로 웃다가도 카메라가 돌기 시작하면 금세 캐릭터에 빠져 들어 연기에 집중한다.
반면 김명민은 카메라가 돌거나 말거나 계속 캐릭터 안에 빠져 있다. 그러다 보니 촬영 현장에서도 ‘매력 있다’는 소리를 듣기는 무척이나 어렵다.
반면 김명민은 배우로선 그 누구보다 ‘매력 있는 배우’로 구분된다. 후배 배우들이 존경하는 배우로 가장 많이 언급하는 배우 가운데 한 명이 바로 김명민이다.
결국 ‘매력 없는 남자’가 됨으로써 ‘매력적인 배우’가 된 것이다.
배우 김명민의 가장 큰 장점은 완벽주의다. <하얀거탑>에서 천재적인 외과의사 장준혁을 표현하기 위해 시간이 날 때마다 손놀림을 연습했다는 그는 엄청난 연습으로 어지간한 외과의사 손놀림을 따라갈 정도의 수준에 이르러 촬영에 돌입했다.
까다로운 수술을 앞두고 그가 수술 과정 손놀림을 공중에서 미리 그려보는 장면은 일반 시청자들보다 외과의사들이 더 감탄했다는 후문이다.
<베토벤 바이러스>에선 천재적인 지휘자로 변신한 그는 촬영 석 달 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하루 2시간에서 6시간가량 지휘 연습에 매달렸다. 너무 연습에 몰입해 어깨 근육이 심하게 뭉쳐 마사지까지 받으러 다녀야 했을 정도다.
단순히 지휘봉을 휘두르는 연습만으로 천재를 표현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냥 보는 것도 어렵다는 지휘자용 스코어 악보를 김명민은 15곡이나 전부 외웠을 정도다.
천재 외과의사와 천재 지휘자를 연이어 소화한 그에게 주어진 새로운 미션은 죽음을 향해 외롭게 나아가는 루게릭병 환자였다. 루게릭병 환자의 경우 외과의사나 지휘자처럼 연습해서 만들어지는 캐릭터는 아니다.
단순하게 보자면 이번 작품을 위해 그가 가장 매진한 부분은 영화 촬영 일정에 맞춰 루게릭병이 심해지는 데 따른 체중 감량이었다.
연기에 도움을 얻기 위해 만난 실제 루게릭병 환자들의 가느다란 손목을 본 뒤 그는 루게릭병 환자의 디테일을 최대한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단다.
이로 인해 촬영 후반부에는 정말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의 상황이 돼 계속 누워있다 겨우 일어나 촬영에만 임했을 정도였다. 심지어 의사들이 김명민의 계속된 체중 감량을 말렸을 정도다.
연출을 담당한 박진표 감독까지 “이건 루게릭병 다큐가 아닌 영화”라며 그를 만류했다. 어찌 보면 완벽주의, 또 다르게 보면 집착일지도 모른다. 그런 열정이 배우 김명민이 연기를 완성시킨 게 아닐까.
배우 김명민은 매번 맡는 역할마다 사회적 이슈가 되며 하나의 신드롬을 양산해냈다.
대통령 리더십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가열돼 있던 2005년 그는 이순신이라는 인간적이면서도 올곧은 새로운 리더의 전형을 선보이며 ‘이순신 신드롬’을 불러일으켰고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의 기운이 몰려들기 시작한 2007년엔 맨주먹으로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 조직 사회에서 몸부림쳤던 장준혁의 모습이 ‘장준혁 신드롬’을 만들어 냈다.
또한 할 말은 다 하는 나쁜 남자의 전형을 선보인 ‘강마에 신드롬’은 금융 위기로 시작된 최악의 경제 위기인 2008년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윗사람의 눈치를 보며 직장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오늘날의 남성들, 가장들의 속을 시원하게 긁어줬다.
또한 장준혁과 강마에는 천재적인 실력을 겸비한 전문직 종사자인 ‘21세기형 히어로’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엔 김명민 신드롬이다. 오랜 무명의 시절을 거치며 스타가 될 기회마저 여러 차례 놓쳤지만 결국 최고의 배우로 거듭난 김명민의 모습은 사회 양분화가 심화되어 가는 요즘 세상 서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어 준다.
매력과 사교성이 성공을 위한 최우선 덕목인 양 알려진 요즘 한국 사회에 우직하게 자기 일에만 최선을 다하는 대다수의 보통 직장인들에게 매력 없는 남자지만 매력적인 배우 김명민은 진정으로 매력적인 직장인의 모습을 새롭게 설정해준다.
또한 21세기 신인류로 분류되는 워커홀릭들에게 집착에 가까운 완벽주의자 김명민이 그들의 대변자이기도 하다.
이렇듯 배우 김명민은 주어진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하며 배우로 열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만으로 다양한 신드롬을 만들어 21세기 초 한국 사회를 주도해왔다.
그는 또 새로운 작품을 통해 또 다른 신드롬을 만들어 갈 것이며 그에 발맞춰 한국 사회 역시 변화해 갈 것이다.
신민섭 기자 leady@iyo.co.kr
▲ 영화 <소름>. | ||
고 장진영과의 연기인연
영화배우 고 장진영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출연작 및 함께 호흡을 맞춘 배우들에게도 관심이 집중됐다. 그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끈 인물은 김명민이었다. 두 배우 모두 별다른 인기와 지명도를 갖지 못하고 있던 시절 함께 영화 <소름>에 남녀 주인공으로 출연했기 때문이다.
고인은 이 영화를 통해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스타덤에 올랐지만 김명민은 그 이후에도 몇 년 동안 무명 시절을 더 보내야만 했다. 그렇지만 이제는 김명민 역시 연기파 배우로 분류되며 최고의 스타가 됐다. 이런 인연이 있지만 그는 고인의 빈소를 찾지 못했다. 당시 촬영차 홍콩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
김명민은 당시 상황을 “홍콩에 도착한 날 오후 비보를 접했는데 정말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며 “당시 어리석었던 나를 생각하니 너무 눈물이 났다”고 얘기한다. 도대체 뭐가 어리석었단 말일까.
고인은 <소름>을 연출한 윤종찬 감독와 매우 가깝게 지냈고 이후 다시 <청연>에서 다시 한 번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그럼에도 윤 감독이 배우들의 연기력을 끌어 올리는 방식이 무척 자극적이었다며 원망하는 얘길 자주 했다.
<소름> 촬영 당시 윤 감독이 “둘 중 하나만 (연예계에서) 살아남을 것”이라며 거듭해서 두 신인 배우의 라이벌 의식을 자극했던 것. 그러다 보니 두 주연 배우는 다른 영화 속 남녀 주연배우와 달리 제대로된 앙상블을 만들어 낼 수가 없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영화 <소름>의 남녀 주인공이 앙상블보다 대립이 강조되는 설정이긴 했다.
김명민 역시 당시를 ‘너무 전투적이었다’고 회상한다. 배려심은커녕 자신의 욕심만 채우기에도 정신이 없었다고. 게다가 영화가 개봉된 뒤 고인이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스타로 등극했지만 여전히 무명으로 남은 김명민은 윤 감독이 얘기한 둘 가운데 살아남지 못한 한 명으로서의 비애감을 느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 만큼 고인이 세상을 떠나자 더 큰 미안함이 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고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얘길 듣고 너무 미안한 마음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당시 너무 부족했던 나는 질투만 하기 바빴지 제대로 된 축하도 해주지 못해 너무 후회스러워요.”
신민섭 기자 leady@i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