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1월 24일 노조의 출근 저지를 뚫고 KBS에 입성한 김인규 신임 사장의 취임식이 열렸다. 사진제공=KBS | ||
11월 19일 열린 이사회에서 김 사장은 5명의 사장 후보 중 이병순 현 사장과 결선 투표를 해, 1표를 얻은 데 그친 이 사장을 누르고 최종 후보자로 낙점됐다. 이날 이사회에서 야당 추천 이사 4명은 기권했다. 23일 이명박 대통령은 김 사장의 임명 제청안을 받아들였고, 노조의 완강한 반대와 저지 속에 24일 사장에 취임했다. 2006년 이사직을 끝으로 KBS를 떠난 지 3년 만에 화려하게 친정으로 귀환한 셈이다.
하지만 새로운 수장을 얻은 KBS는 또다시 거센 격랑에 휩싸이고 있고 ‘금의환향’한 김 사장 역시 노조 등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한 상태다. 야심찬 뜻을 밝히며 수장에 오른 김 사장은 출근 첫날부터 굴욕을 당했다. 200여 명에 달하는 노조의 강경한 출근저지에 막혀 사내 진입에 실패했던 김 사장은 두 차례 시도 끝에 이날 오후 2시 간신히 취임식에 참석했다. 그러나 반대파들은 여전히 김 사장의 ‘자진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김 사장은 예상했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취임사에서 그는 “일부에서는 내가 KBS를 장악하러 왔다고 주장하지만 결단코 사실이 아니다. KBS를 정치권력으로부터, 자본권력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왔다”며 “노조가 취임을 강력히 반대한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지켜봐 달라”고 당부했다. 출항하자마자 노조의 거센 반발 등에 부딪혀 가시밭길 항해가 불가피해 보이는 김 사장의 과거를 되짚어 봤다.
서울 출신인 김 사장은 경기고와 서울대 정치학과-대학원을 졸업한 전형적인 KS맨이다. 1973년 KBS 공채 1기 기자로 입사, 방송기자 생활을 시작한 김 사장은 이후 정치부장, 뉴욕지부장, 워싱턴특파원, 해설위원, 취재주간, 보도국장, 뉴미디어본부장 등을 역임하며 30여 년 동안 KBS맨으로 승승장구해왔다.
오랫동안 취재현장과 주요 보직을 거친 김 사장은 명실공히 방송계의 산증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로필이나 경력면으로 볼 때는 KBS 사장으로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특히 재직시절 그가 보여준 업무 추진력과 그로 인한 후배와 동료들의 두터운 신망은 그가 유력한 사장 후보로 올라가는 데 적잖은 영향력을 미쳤다. 실제로 김 사장이 보도국장을 마치고 떠나는 이임식 자리에서 보도국 후배들로부터 받은 기념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번개같은 판단, 명쾌한 직관, 두둑한 배짱, 채찍보다 더 아픈 질책이 만들었습니다.
98.1.5-주간 시청률 34.4%! 98.1.23 -일일 시청률 40.6%! 97.9.7-주간 시청 베스트 3위!
3대 기록을 남긴 김 선배께 부러움과 질투를 느낍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KBS뉴스의 영광을! 깨겠습니다. 그 기록을! -1998.4.26 KBS 보도국 후배일동’
KBS를 떠난 후 김 사장은 고려대 언론대학원에서 석좌교수로 재직하며 발을 넓혀나갔다. 방송영상정책과 공영방송의 이론과 실제에 대해 강의하며 후학양성에 나선 김 사장의 강의는 학생들로부터 상당히 큰 호응을 얻었다. 2005년 출간된 <방송인 김인규의 공영방송 특강(커뮤니케이션북스)>도 현장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김 사장의 강의에 반해버린 학생들의 추천으로 출간된 책이었다.
김 사장은 지난해 10월 KT, SK브로드밴드 등 ‘IPTV’ 업체들이 모여 결성한 한국디지털미디어산업협회의 초대회장으로 취임해 또 한번의 도약을 시도했다. 실제로 변화와 혁신은 김 사장의 가장 큰 장점으로 꼽힌다. 방송기자로 첫발을 내디딘 그는 뉴미디어본부장을 역임한 경력 덕분에 급변하는 디지털방송과 통신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와 폭넓은 식견을 두루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30년간 공영방송에 젊음을 바친 김 사장은 공영방송이 당면하고 있는 시급한 현안으로 선정성과 공정성 문제를 꼽고, 선정적 제작기법을 추방하고 공정성을 확보해야만 완성도를 높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특히 그는 방송저널리즘이 기자저널리즘과 PD저널리즘으로 대립 양상을 보이며 수십 년간 두 직종 간의 융합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우리나라의 기형적인 제작 시스템을 혁파해야 한다면서 기자와 PD가 더 이상 각각 ‘외발 자전거’를 타지 말고 힘을 합쳐 안전하게 ‘두발 자전거’를 함께 타고 프로그램을 제작해야 한다고 역설해왔다.
일찌감치 지상파 방송의 위기상황을 예언했던 김 사장은 방송과 통신이 융합하는 디지털·다매체·다채널 시대에 지상파 공영방송의 위상을 지켜나가기 위한 생존전략을 모색해오기도 했다. 이 때문에 점점 어려워지는 공영방송의 입지를 다지고 생존전략을 모색할 수 있는 해결사로 기대를 모으고 있기도 하다.
이번 사장 취임은 김 사장 개인으로서는 오랜 꿈을 이룬 셈이다. 김 사장이 KBS 사장 공모에 지원한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김 사장은 2006년 정연주 전 사장이 연임했을 때와 지난해 정 전 사장이 해임되고 이병순 사장이 선임될 때에도 응모한 바 있다.
이번에 김 사장이 선임된 데는 30년 넘게 KBS에서 쌓아온 폭넓은 경험 및 전문성이 높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민주적이면서도 합리적인 성격의 김 사장은 평소에는 온화하면서도 부드러운 성품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지만 위기시엔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십을 발휘한다는 평을 듣고 있다. 뉴미디어본부를 만들어 방송 통신 융합시대에 부합하는 발빠른 행보를 보인 것은 김 사장 특유의 추진력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 사진1> KBS 본관에서 김 사장의 취임을 반대하는 노조원들. 사진2> 11월 24일 오전 김인규 신임 KBS 사장이 탄 차량이 호위를 받으며 본관으로 진입하고 있다. 사진3> 노조원들의 출입 저지로 길이 가로막힌 김 사장. 결국 발길을 돌린 후 오후 비공개 취임식에 참석 | ||
그러나 김 사장의 KBS 사장 입성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지난 대선 때 이명박(MB) 대통령 후보 캠프에 몸담았다는 이유로 코드인사 논란에 직면했다.
김 사장은 2007년 대선 때 MB캠프에서 방송발전전략실장을 맡았고 이명박 당선자 비서실 언론보좌역을 지낸 바 있다. 김 사장이 MB 당선에 혁혁한 공을 세워 MB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다는 점 때문에 정치권 주변에선 그를 MB맨으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정치권과 세간의 코드인사 논란에 대해 김 사장도 의연하게 대처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그는 지난해 8월 실시된 KBS 사장 공모에서 공채 1기라는 상징성과 함께 사내 평판이 좋아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혔다. 하지만 코드인사 논란이 일자 곧바로 사장직 응모를 포기한 바 있다. 그는 지난해 8월 19일 KBS 사장직 응모를 포기하는 성명서를 통해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다. ‘KBS맨’ ‘방송인 김인규’라고 자부해왔는데 ‘낙하산 인사’ ‘정치인 김인규’ 등으로 매도되는 상황에서 새 정부에 정치적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사장직 응모를 포기한다는 내용이었다.
KBS 사내는 물론 정치권에서 ‘낙하산’ ‘코드인사’라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더 이상 자신을 둘러싼 소모적 논쟁이 확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게 김 사장의 주장이었다.
실제로 당시 김 사장의 KBS 사장 응모는 KBS만의 문제를 넘어 정치적인 논쟁으로 비화됐다. 당시 김 사장은 KBS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임을 거듭 강조하면서 “KBS 방송구조를 모르는 사람이 하는 개혁은 자칫하면 선무당이 사람 잡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KBS가 위기 상황까지 왔기 때문에 (KBS 출신) 누가 되든 개혁의 고삐는 늦추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김 사장은 KBS에 재직하던 당시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됐던 편파방송 시비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고 피력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8월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정연주 사장이 연임을 하려 했을 때 KBS 직원들이 자체적으로 여론조사를 한 모양이다. 그 여론조사의 결과를 토대로 연임을 막아달라는 제안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 그래서 그때 사장직에 응모한 것이다. 그러나 결국 여러 가지 한계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김 사장은 또 MB 캠프에서 활동했던 것과 관련해서도 적극적으로 해명했다. 그는 “대통령 선거 막바지에 MB 캠프로부터 방송전문가로서의 도움을 요청받았다. 당시 선거캠프에 몸 담는 것 자체가 방송인으로서의 약점이 될 것을 우려해 여러 차례 고사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결국 개인 문제에 앞서 10년 만의 정권교체라는 대의에 따르기로 결심하고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자원봉사자로서 공정한 선거방송을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고 밝혔다.
하지만 당시 사장 응모를 포기했던 김 사장이 1년여 만에 다시 돌아온 것에 대해선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일각에서는 “김 사장의 이번 사장 취임은 예고된 수순이었다”며 “자진사퇴하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실제로 김 사장은 지난해 사장응모 포기선언을 하면서 다음을 염두에 둔 전략적인 포기가 아니냐는 의혹을 산 바 있다. 이에 대해 당시 김 사장은 “1~2년 뒤를 염두에 뒀다면 그런 글(사장 공모 포기 성명서)이 나오기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라고 일축했다.
우여곡절 끝에 KBS 수장 자리에 올랐지만 그가 짊어져야 할 과제는 결코 만만치 않다. 김 사장 취임을 둘러싼 논란의 핵심은 과연 대통령 측근 인사가 공영 방송 수장으로 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여부다. 따라서 김 사장은 가장 우선적으로 ‘MB맨’이라는 꼬리표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대통령 특보를 맡았던 그가 KBS를 이끌어 갈 경우 KBS가 대통령 특보 방송 혹은 청와대 사내 방송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감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KBS 사장은 방송의 공정성 및 독립성 확보 문제와 직결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리다.
김 사장의 선결과제는 ‘낙하산 인사’ 논쟁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는 것이다. 자신 때문에 KBS가 정권의 하수인이 될 수 있다는 우려를 불식시킬 필요가 있으며 그래야만 자신의 체제도 안정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내부갈등을 원만하고 조속하게 해결하는 것도 김 사장의 과제다. 구성원들을 설득하고 사내에 만연해있는 불신과 갈등을 원만하게 해결하지 못할 경우 조직의 뿌리가 흔들릴 수 있을뿐더러 그가 추구하는 방송개혁도 차질이 생길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김 시장은 최근 흔들렸던 공영방송 KBS의 위상을 재정립하고 급변하는 미디어환경에 대처해야 하는 짐도 떠안고 있다. 우선 김 사장은 2012년 말까지 마무리해야 하는 디지털 방송 전환에 필요한 재원(약 4500억 원)을 확보하는 데 주력해야 할 것으로 보이지만 이외에도 현안은 도처에 쌓여 있다. 월 2500원으로 30년째 동결되어 온 수신료 현실화와 광고 비중 축소 등이 대표적인 예다.
KBS는 당초 올해 내에 1981년 이후 2500원에 묶여 있는 수신료를 4500∼4800원으로 인상해 전체 수입의 40%가 넘는 광고 비중을 20%로 줄이는 방안 등을 검토해 왔다. 하지만 수신료를 현실화하고 수천억 원의 투자가 요구되는 방송의 디지털 전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신뢰와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KBS가 하루빨리 공영방송의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국민적 공감을 얻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수신료보다 광고에 더 의존하는 KBS의 재원구조는 큰 문제로 지적되어 왔던 게 사실이다. 김 사장 역시 취임식에서 수신료 문제 및 KBS 개혁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김 사장은 “KBS의 최대 과제는 수신료 현실화이며 내년에 모든 역량을 다하겠다. 현재 전체 수입의 40% 수준인 광고를 완전히 폐지하려면 수신료는 6060원이 돼야 하고 광고 비중이 10%일 경우 5450원, 15%면 5140원, 20%면 4820원으로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공영방송을 위한 공정보도가 가장 중요한 가치”라며 “공정보도를 위한 노력과 함께 KBS ‘뉴스9’을 비롯한 뉴스 전반에 대해서도 과감한 개혁을 모색하려 한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김 사장은 조만간 재벌가와 사돈을 맺는 경사를 앞두고 있다. 재계에 따르면 김 사장의 장남은 12월 초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7남인 정몽윤 회장의 딸과 화촉을 밝힐 예정이다. 정치권 일각에선 ‘낙하산 인사’ 논란에 휩싸인 김 사장이 재벌가와 사돈을 맺게 될 경우 ‘언경유착’ 등 또다른 논란이 야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낙하산 인사’ 논란과 더불어 KBS의 산적한 현안을 떠안게 된 김 사장이 ‘MB맨’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공영방송 수장으로서 입지를 구축할 수 있을지 그의 향후 행보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