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7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삼성전자 기자간담회에서 당시 이재용 상무가 최지성 디지털미디어 총괄사장의 소개를 받으며 활짝 웃고 있다. 연합뉴스 | ||
이재용 부사장은 이번 인사를 통해 전무에서 부사장으로 한 단계 뛰어오르는 동시에 삼성전자의 최고운영책임자(COO·Chief Operating Officer)를 맡게 됐다. 지난해 4·22 삼성 쇄신안 발표 이전까지 이 부사장은 1년 6개월가량 최고고객책임자(CCO·Chief Customer Officer)로서 국내외 고객사와의 전략 제휴·협력 관계를 맡았었다. 이번에 맡은 COO는 CCO 역할을 포함해 삼성전자 경영을 총괄 관리하는 자리다. 사실상 CEO나 다름없다.
최지성 삼성전자 사장이 단독 CEO를 맡게 된 점 또한 삼성이 이재용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방증으로 볼 수 있다. 최지성 사장은 이재용 부사장의 ‘멘토, 가정교사’로 불려왔을 정도로 그룹 내 이 부사장의 대표적인 후견인이다. 이번 인사 이전까지 삼성전자에서 이윤우 부회장이 부품 부문을, 최 사장이 완제품 부문을 맡아 투톱체제를 이뤄왔다지만 사실상 실권은 최 사장에게 있었다. 지난 6월 이명박 대통령의 미국 방문 당시 최 사장은 삼성을 대표해 경제인수행단에 참여, 동행했던 다른 그룹 총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도 했다.
이번 인사를 통해 이윤우 부회장은 이사회 의장직을 맡아 사실상 경영일선에서 한걸음 물러나게 됐다. 최 사장은 과거 윤종용 전 부회장이 했던 것처럼 삼성전자의 경영을 최일선에서 진두지휘하게 된다. 과거 윤 전 부회장이나 이학수 전 전략기획실장이 이건희 전 회장의 대표적 가신으로 이재용 부사장이 넘기 힘든 존재였다면 최 사장은 이 부사장의 공식적인 총수 등극 과정의 첨병 역할을 할 조타수로 평가받는다.
삼성그룹의 핵심이랄 수 있는 삼성전자 경영을 총괄하게 된 이 부사장과 최 사장 조합은 지난 2003년 3월 최 사장이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DM)총괄 부사장이 될 무렵부터 본격화됐다고 한다. 이때부터 최 사장은 이 부사장의 해외 일정에 곧잘 동행하며 의견을 나누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이 부사장이 지난 2007년 1월 삼성전자 CCO를 맡아 해외시장을 빈번하게 누비게 되면서 삼성전자 해외 판매현장에 최 사장과 함께 있는 모습이 여러 차례 목격되기도 했다. 그 무렵 최 사장은 삼성전자 정보통신총괄 사장으로 직책을 옮겼다. 디지털미디어와 정보통신 등 삼성전자 첨단기술 현장의 노하우를 이 부사장에게 전수해주기 위한 인사라는 평가도 함께 나돌기 시작했다.
당초 최 사장이 오너 경영인의 후견인이 될 거라 예상했던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의 직설적이면서 꼬장꼬장한 성격 때문이었다. 최 사장이 삼성에 첫 발을 들여놓으면서 오너 경영인에 대해 일침을 가했던 일화는 아직도 유명하다. 지난 1977년 삼성그룹 연수원에서 4주간의 신입사원 연수를 마친 뒤 신입사원들이 돌아가며 소감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최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솔직히 (삼성 신입사원 연수에 대해) 실망했습니다. 현대에선 정주영 회장까지 직접 나와 신입사원들과 씨름한다는데 우린 이게 뭡니까.”
이랬던 최 사장이 오늘날 이재용 시대 조타수로 각광받게 된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그가 엔지니어가 아닌 문과 출신이란 점을 꼽곤 한다. 최 사장은 서울대 무역학과 출신으로 이 부사장의 서울대 선배가 된다. 이 부사장은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나왔는데 이과 출신의 쟁쟁한 엔지니어들이 득실거리는 삼성전자에서 문과 출신으로 성공한 최 사장의 이력이 이 부사장에게 크게 어필됐을 것이란 견해도 있다.
삼성전자에서 문과 출신이란 한계를 딛고 CEO 반열에 오른 최 사장과 관련된 일화는 제법 많다. 지난 1985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지사장 재직 당시 기술적 지식에 대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1000페이지 분량의 원어 기술교재를 달달 외웠다는 이야기는 재계인사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당시 그는 혈혈단신으로 진출한 이른바 ‘1인 지사장’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유럽 진출 첫해인 1985년 삼성전자 반도체를 혼자서 100만 달러어치나 팔았다. 1986년엔 500만 달러, 1987년 2500만 달러, 1988년 1억 2500만 달러어치를 팔아 해마다 500%씩 판매고를 늘리면서 ‘디지털 보부상’이란 별칭까지 얻었다. 1991년 귀국한 최 사장은 영업맨 출신으론 최초로 삼성전자 관리팀장에 올랐다.
▲ 지난 8월 21일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함께 조문하는 이건희 이재용 부자. | ||
두 사람의 유대관계는 지난해 4·22 삼성 쇄신안 발표 이후 이 부사장이 CCO를 그만 두고 해외업무를 통한 이른바 ‘백의종군’을 선언하면서 더욱 돈독해진 것으로 보인다. 특별한 보직 없이 해외 현장을 돌았던 이 부사장에게 해외주재원 경험으로 잔뼈가 굵은 최 사장의 조언이 큰 보탬이 된 것으로 관측된다.
최지성 사장에게 지금은 해체된 전략기획실(구조조정본부)의 전신인 삼성그룹 회장비서실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다는 점 역시 오너 경영인 이재용 부사장의 파트너로서 높은 점수를 받는 대목이다. 최 사장은 1981년부터 4년간 회장비서실 기획팀에서 근무했으며 1993년부터 1년간 비서실에서 전략1팀장(이사대우)으로 재직하면서 오너를 보좌하는 경력을 쌓았다.
올 초 이재용 부사장이 전무에서 부사장으로 승진할 것이라 소문이 나돌기도 했지만 삼성그룹 측은 “승진 연한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 부사장의 승진을 미뤘다. 대신 최지성 사장이 이윤우 부회장과 더불어 삼성전자의 투톱 체제를 이루는 위치에 올라 이 부사장에 대한 최 사장의 경영수업이 가속페달을 밟을 것이란 평을 낳았다. 당시만 해도 삼성전자의 대표이사는 최지성 사장이 아닌 이윤우 부회장이었지만 전자 내에서 비중이 높은 완제품 부문을 최 사장이 맡게 되면서 무게가 최 사장에게 기울었다는 관측이 주를 이뤘다.
이 부사장은 지난 5월 11일부터 5박 6일간 러시아와 독립국가연합(CIS) 지역의 판매현장을 돌아봤는데 당시 최지성 사장이 동행을 했다. 최 사장과 함께 해외무대에서 회사 CEO에 버금가는 활동을 펼치는 이 부사장을 두고 “조만간 최 사장과 투톱 체제를 이뤄 삼성전자를 이끌어갈 것”이란 예측이 나오곤 했다. 이번 인사를 통해 이 말이 적중한 셈이다.
현재 삼성그룹 안팎에선 이재용 시대 조타수 영순위로 주저 없이 최지성 사장이 꼽히곤 한다. 그러나 최 사장이 이재용 사단 영순위 자리를 계속해서 꿰차고 있을지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린다. 조만간 이건희 전 회장에 이어 삼성그룹 3대 총수직에 오를 것으로 보이는 이 부사장에겐 삼성전자 업무 파악 못지않게 그룹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시야와 판단력이 요구되는 까닭에서다.
이건희 전 회장의 총수 재직 시절 삼성전자 대표이사였던 윤종용 전 부회장보다는 회장비서실 출신 이학수 전 부회장에 대한 그룹 경영 의존도가 높았던 것이 사실이다. 삼성전자 업무에 밝은 인사보다 그룹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식견을 가진 인물에 대한 필요성이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이 부사장 주변에서 대두될 것이란 얘기다.
이재용 부사장 여동생들의 경영 보폭 확대 역시 향후 ‘이재용 사단’ 진용이 최지성 사장 같은 전자 업무 전문가에 국한되진 않을 것이란 전망을 부추긴다. 이 전 회장 맏딸인 이부진 호텔신라 전무는 그룹 지배구조 핵심인 삼성에버랜드의 경영전략 담당까지 겸직하면서 그룹 내 활동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둘째 딸 이서현 제일모직 상무도 이번 인사를 통해 전무로 승진했다. 이들의 약진은 오너일가 계열분리 가속화 관측을 낳고 있으며 이는 ‘업무형 스승’ 못지않게 ‘관리형 책사’가 이재용 부사장에게 필요할 것이란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이번 인사로 재무에 밝은 인사들이 대거 요직을 꿰차면서 이들이 향후 이재용 사단 내에서 최 사장과 파워게임을 벌일 가능성이 거론되기도 한다.
최근 들어 재계는 물론 정치권과 법조계, 스포츠계 등에서 이건희 전 회장에 대한 조기 사면 논의가 진행 중이다. 이를 두고 이 전 회장의 경영복귀 수순이란 해석까지도 등장한 상태다. 이는 이재용 부사장으로의 경영권 승계가 기정사실임에도 아직은 이재용의 삼성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적지 않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과연 이재용 부사장이 이건희 전 회장의 아성을 넘어서는 오너 경영인으로 비상할 수 있을지, 그리고 최지성 사장이 이재용 체제를 연착륙시키는 ‘제2의 이학수’가 될 수 있을지, 새 시대를 열어가는 삼성을 향한 세간의 시선은 한동안 식지 않을 듯하다.
뉴삼성 대표선수들 누구
승진잔치 속 비밀병기 두둥~
▲ 최도석 부회장(왼쪽)과 김순택 부회장. | ||
이런 가운데 다른 60대 시니어급 인사들과 달리 사장에서 부회장으로 승진한 최도석 삼성카드 부회장(60)이 주목을 받는다. 지난해까지 삼성전자 경영지원총괄을 맡으며 ‘삼성의 금고지기’란 별칭을 얻었던 최 부회장은 그룹을 대표하는 재무통이다. 이건희 전 회장의 신뢰가 두터운 것은 물론, 이재용 부사장과도 잘 통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항간에는 최 부회장이 10년여 전부터 이재용 시대를 대비한 차세대 인력 구축 작업을 진행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이재용 부사장이 그룹을 이끌어나갈 때 이를 보좌할 수 있는 신진 전문인력 양성에 최 부회장이 힘을 기울여왔다는 것이다.
이부진-서현 자매 계열분리설이 계속해서 번져가는 점 또한 향후 최 부회장 역할론에 더욱 시선이 쏠리게 한다. 그룹을 대표하는 전자와 금융부문이 이재용 부사장 몫으로 될 것이 확실시되는 가운데 그룹 내 금융계열사 최고위직에 오른 최 부회장이 이 부사장을 위한 금융 인프라 구축에 나설 것으로도 관측된다. 일각에선 이재용 사단 핵심 진용이 ‘전자 최지성, 금융 최도석’ 중심으로 꾸려질 것이라 보기도 한다.
김순택 삼성SDI 사장이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삼성전자 신사업추진단장으로 자리를 옮긴 점 역시 눈여겨봐야 한다. 종전까지 신사업추진단장이 사장급(임형규, 상담역 발령)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재용 시대에 대비한 신사업 발굴에 삼성이 힘을 쏟으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김 부회장이 재직하는 동안 삼성SDI는 브라운관 제조업체에서 2차전지 사업을 주력으로 하는 그린에너지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이 같은 능력을 높이 산 이건희 전 회장이 “10년 뒤 먹거리를 개발하라”는 명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김 부회장에 대한 신뢰가 남다르다고 한다.
이번 인사명단에 포함돼 있진 않았지만 장충기 브랜드관리위원장(사장)의 향후 역할도 관심사다. 장충기 사장은 그룹을 대표하는 기획통이다. 과거 전략기획실처럼 그룹 계열사 경영에 간섭할 수 있는 부서로 통하는 브랜드관리위원회의 수장이란 점에서 이재용 부사장의 오너 경영인 시대를 열어가는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할 전망이다.
이번에 부사장에서 사장으로 승진한 이상훈 삼성전자 사업지원팀장(사장)과 삼성전자 감사팀을 이끌어오다 신설된 경영지원실장 자리를 맡게 된 윤주화 사장도 눈에 띄는 인사들이다. 이상훈 사장의 사업지원팀은 삼성전자 내 사업부 간 투자 조정과 사업 기획 등을 맡는다. 과거 전략기획실 업무의 일부를 수행하는 셈이다. 이상훈 사장은 1999년부터 2002년 초까지 북미총괄 경영지원팀장(이사)으로 재직하면서 당시 미국 유학 중이던 이재용 부사장과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윤주화 경영지원실장(사장)은 올 1월 인사 이후 공석으로 남아있던 최고재무책임자(CFO·Chief Financial Officer) 역할을 맡는다. 윤 사장은 지난 1978년 삼성전자 입사 이후 1998년부터 삼성전자 경영지원실에서 삼성전자 안방살림 업무를 줄곧 맡아온 재무통으로 향후 삼성전자뿐 아니라 그룹 전체의 재무관리를 이끌 인재로 평가받는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