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피드스케이팅 500m에서 나란히 금메달을 따낸 모태범(왼쪽)과 이상화. 이는 대회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연합뉴스 | ||
한국 최초의 스피드스케이팅 남·녀 금메달리스트가 된 모태범과 이상화는 전형적인 신세대다. 귀에는 피어싱으로 멋을 내고, 미니홈페이지를 즐겨 찾으며, 경기 전 음악을 듣고 긴장을 풀고, 기자회견 중에도 쉴 새 없이 날아드는 문자메시지를 확인하느라 휴대폰을 만지작거린다.
땅으로 내려오면 발랄한 젊은이가 되지만, 스케이트를 신고 얼음 위에 서면 진지한 올림픽 영웅으로 돌변하는 두 메달리스트들을 들여다본다.
# 무명의 히어로 ‘모태범’
지난 12월, 그리고 1월. 태릉선수촌에서는 2010 동계올림픽 선수단 미디어데이가 진행됐다. 올림픽에 출전할 각 종목 선수단이 각오를 밝히고, 기자들의 질문을 받는 행사다.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단 차례. 언론의 관심은 이규혁과 이강석, 여자부 이상화에게 집중됐다. 그 주변에서 ‘뻘쭘하게’ 앉아있던 선수 가운데 한 명이 바로 모태범이었다.
한 달 뒤, 한국에 스피드스케이팅 사상 첫 금메달을 안기며 밴쿠버의 깜짝 영웅이 된 모태범은 “그때 솔직히 서운했다. 하지만 주위의 무관심이 오히려 부담을 덜어줘 금메달로 이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모태범은 그렇게 스피드스케이팅 대표팀에서 ‘주변인’이었다.
은석초등학교 2학년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한 모태범은 중·고등학교 시절 각종 주니어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따내며 자질을 보이다 잠실고등학교 시절 처음으로 대표팀에 발탁됐다.
사춘기 때는 키가 작아 고민이었다. 중2 때까지 160㎝ 중반밖에 되지 않았다. 키 크는 약까지 먹을 정도로 애를 태우다 중3 때부터 1년 사이에 10㎝가 넘게 컸다. 지금은 단거리에 알맞은 178㎝가 됐다.
국제무대에 이름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보니 밴쿠버의 외신 기자들은 16일 남자 500m가 끝난 뒤 “모태범이 누구냐”고 아우성들이었다.
사실 모태범도 이규혁·이강석 등 유명 선배들에 가려 있었지만 숨은 실력자였다. 김관규 스피드스케이팅 대표팀 감독은 “모태범이 지난 연말부터 상승세를 탔다. 금메달까지는 기대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번 올림픽을 앞두고 ‘조커’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털어놨다.
운동을 하면서 슬럼프 한 번 없었다. 어릴 때부터 착실히 스케이트 선수로서의 경력을 쌓아갔다. 2006년 독일 세계주니어선수권에서 남자 1500m 우승으로 국제무대에 이름을 알린 모태범은 처음에는 1000m와 1만 5000m 등 중거리 종목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2007년 토리노 동계유니버시아드 남자 500m까지 3위에 입상하며 동메달 2개를 따내 성인 무대에 도전하기 시작해 2008-2009 시즌 성인 대표팀에 합류했다.
지난해 11월 네덜란드 헤렌벤에서 열린 월드컵 2차 대회가 전초전이었다. 1000m에서 개인 첫 동메달을 따내며 성인 국제 대회에 처음 입상했다. 특히 1000m에서는 꾸준히 국제대회에서 성적을 거두며 샤니 데이비스(미국)에 이어 세계랭킹 2위에 올라있다. 이 사실 또한 이번에 500m 금메달을 따낸 뒤 주목받기 시작했다. 500m도 1000m 훈련 가운데 하나로 뛰었는데 뜻밖에 금메달을 가져다준 것이다.
그렇다면 성격은 어떨까. 금메달을 딴 뒤 태극기를 몸에 두르고 춤을 추는 모습이나, 시상대 위에서 당당하게 브이자 포즈를 취하는 건 영락없는 당찬 신세대다. 무명에서 스타가 된 순간만큼은 마음껏 즐기는 모습이 역력하다. 김 감독은 “활발하기는 한데, 보기와 달리 말은 많지 않고 조용하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모태범 자신이 밝히는 성격은 어떨까. 모태범에게 ‘자신을 소개해달라’는 외신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위험한 것을 정말 좋아하고,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좋아하며, 스릴을 즐기는 평범한 학생입니다.”
한국에 돌아오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5000m 은메달을 딴 친구 이승훈과 함께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는 것이다. 이유는 “이제 스타가 됐으니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보는지가 궁금해서”다.
# 악바리 스케이터 ‘이상화’
2006년 2월. 토리노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 2차 레이스를 마친 휘경여고 2학년 이상화는 눈물을 흘렸다. 전광판에 뜬 3위라는 결과를 보고 동메달을 딴 줄 알았다. 하지만 마지막 조 경기가 남아 있었다. 1차 레이스에서 1·2위를 기록했던 주노바(러시아)와 왕만(중국). 결국 이들의 경기 후 이상화는 5위로 밀려났다. 3위 런후이(중국)와는 불과 0.17초 차였다.
딱 4년 뒤, 이상화는 세계를 제패했고 다시 울었다. “그때는 아쉬움의 눈물이었고, 이번에는 기쁨의 눈물”이라고 말했다.
모태범과 달리 이상화는 밴쿠버로 출발하기 전부터 기대를 모았다. 여자 스피드스케이팅에서 첫 올림픽 메달을 딸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안겨줬다. 하지만 그것이 금메달일 줄은 몰랐다.
이상화는 은석초등학교 1학년 시절 스케이트를 처음 탔다. 오빠 상준 씨와 함께 시작했던 스케이트에 남다른 재질을 보였다. 당시 이상화를 본 대표팀 김관규 감독은 “어릴 때부터 정말 잘 탔다. 어떻게 초등학생이 저런 기록을 낼 수 있나 생각했었다”고 돌이킨다.
현재 여자 500m 세계기록은 세계랭킹 1위 예니 볼프(독일)가 갖고 있는 37초00이다. 웬만한 성인 선수들은 37~38초대에 달린다. 그런데 이상화는 초등학교 6학년에 41초, 중학교 시절 40초대에 진입했다. 그만큼 타고난 스케이터라는 평가를 받는다.
“타고난 힘이 워낙 세다. 여느 남자 선수 못지 않다”는 것이 김 감독의 평가다.
하지만 아픔 없이 이뤄지는 성과는 없는 모양이다. 잦은 발목 인대 부상은 이상화가 올림픽에 도전하는 데 가장 큰 적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전지훈련에 나섰다가 인대가 끊어질 위기까지 겪었던 이상화는 올림픽을 코앞에 둔 지난해에도 발목 인대 부상으로 고전했다. 꾸준한 재활과 보강 훈련으로 부상을 딛고 올림픽에 나섰다.
2007년 한국체대에 입학한 뒤에는 선수촌이 아닌 학교에서 운동을 했다.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기 위해서였지만, 그 과정에서 이상화의 기록은 39초대로 뚝 떨어져 국가대표 선발전에서도 밀려났다.
하지만 슬럼프를 딛고 일어섰다. 그 과정도 만만치 않았다. 힘을 키우기 위해 웨이트트레이닝을 남자 못지않게 소화했다. 스쿼트(역기를 들고 앉았다가 일어나는 운동)를 무려 170㎏까지 든다. 웬만한 성인 남자도 100㎏을 들기가 쉽지 않다면 그 무게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대표팀 이규혁도 “상화가 역기 드는 걸 보면 여자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아무리 놀려도 끄떡도 않는다”고 말한다.
스케이트 훈련은 남자 선수들과 같이 했다. 스피드를 따라잡기 위해서다. 이상화가 금메달을 딴 뒤 이규혁, 이강석, 문준 등 대표팀 ‘오빠’들의 이름을 차례로 부르며 “고맙다”고 했던 이유다.
슬럼프를 딛고 일어난 이상화는 올림픽을 앞둔 2009-2010시즌 38.5초대로 자신의 기록을 되찾은 뒤, 이번 올림픽에서 1차 레이스 38초24, 2차 레이스 37초85로 우승을 차지했다.
4년 전 기억 때문이었을까. 올림픽을 앞두고 세계스프린터선수권대회에서 종합우승을 차지하며 어느 때보다 더 큰 기대를 받았던 이상화는 이번에도 어느 정도 중압감을 느꼈다.
금메달을 따낸 이상화는 대회를 마친 뒤 준비 과정을 이렇게 소개했다.
“(모)태범이가 하필 제 경기 전날 금메달을 따서, 기쁘기도 했지만 부담돼서 잠이 안 오더라고요. 밴쿠버에 도착한 뒤에도 평소 듣던 댄스 음악 말고 클래식을 들었더니 주위에서 ‘너 왜 그러느냐’고 놀리던데요. 하지만 꿋꿋하게 들었죠. 제목이요? 음, 그런 건 잘 몰라요.”
밴쿠버=김은진 스포츠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