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일 새로 임명된 김재철 사장이 출근하려다 MBC 노조에 가로막혀 발길을 돌리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우여곡절 끝에 김 사장이 새 선장으로 선임됐지만 MBC의 혼란은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김 사장의 선임을 두고 MBC 노조가 ‘방송장악의 결정판’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권에서는 연일 ‘코드’ 인사 의혹을 제기하며 압박수위를 높이고 있다. 민주당은 “김 사장의 임명은 MBC 사상 초유의 굴욕적 인사”라며 “낙하산 임명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당 차원에서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진보신당 역시 “김 사장은 이 대통령과 친분이 두텁고 친여 행보를 지속적으로 해온 인사로서 공영방송의 수장으로 도저히 용인될 수 없는 인사”라고 힐난했다.
여론의 반발도 거세다. 시민사회단체는 김 사장의 선임을 ‘정권의 낙하산 인사’로 규정하고 ‘공영방송 MBC 사수 시민행동’을 결성한 데 이어 언론학자들의 연구모임인 ‘미디어공공성포럼’도 “MBC의 정치적 독립성을 훼손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에 즉각 사퇴해야 한다”는 성명을 냈다. MBC 노조 측은 무기한 출근저지 투쟁뿐만 아니라 필요할 경우 총파업까지 단행하겠다는 초강경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MBC 사태의 ‘태풍의 눈’으로 부상한 김 사장의 언론 인생을 되짚어 봤다.
예상대로였다. 3월 2일 오전 8시 50분경 김 사장은 첫 출근을 위해 여의도 MBC 본사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1일 밤부터 철야농성에 돌입한 노조원들에게 가로막혔다. 50여 명의 노조원들은 “청와대 낙점받은 김재철은 물러가라”며 막아섰고, 김 사장은 이들 앞에서 자신은 결코 ‘낙하산 사장’이 아님을 강조했다.
김 사장은 “청와대 낙점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31년 동안 회사에 다닌 선배인데, 제가 왜 낙하산입니까? 위기에 처한 MBC를 구하러 왔습니다”라고 항변했지만 노조의 반응은 냉담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 이근행 본부장은 “청와대 낙점을 받았다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 아닙니까. MBC를 어떻게 구하시겠다는 겁니까”라고 맞받아쳤다. 이 본부장은 한발 더 나아가 “김 사장은 각본대로 방문진에 충성맹세를 한 끝에 사장이 된 것이다. 김재철 출근저지로 노동조합의 투쟁이 본격화될 것이다”며 김 사장을 압박했다.
김 사장이 신임 사장으로 낙점된 것은 2월 26일이다. 그는 면접 과정에서 ‘PD수첩 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하고 불법파업을 용납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져 노조와의 갈등을 예고한 바 있다.
김 사장 선임을 둘러싼 MBC의 갈등은 이명박 대통령과 김 사장의 각별한 관계에서 기인한다. 사회 권력을 감시·비판해야 하는 공영방송의 수장이 친정부 성향을 지닌 인물일 경우 정부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과 감시와 견제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감이 증폭되고 있기 때문이다. MBC 일각에서는 김 사장이 시사프로그램에 대한 ‘순치’ 작업을 단행하고 정권의 친정체제를 구축, MBC가 ‘정권의 아바타’로 전락할 것이라는 경고의 목소리도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친정권 인사라는 ‘태생적인 결함’을 안고 있는 김 사장은 면접 직후부터 불편한 질문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면접을 마친 김 사장에게 기자들은 ‘대통령과의 친분이 보도에 영향을 주지 않겠느냐’고 다그쳤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과의 친분에 대해 부인하거나 여러 가지 변명을 하는 대신 “한 번 쌓은 친분은 끝까지 간다”며 세간의 논란에 개의치 않겠다는 반응을 보여 눈길을 끌었다.
출근 첫날인 2일에 이어 또다시 노조원들에게 출근을 저지당한 김 사장은 3일 오전 MBC본사 앞 주차장에 설치된 천막 사무실에서 첫 업무를 시작했다. 40㎡(약 12평) 크기의 천막 사무실에서 업무보고를 받은 김 사장은 노조의 항의 방문에 “MBC를 권력으로부터 지켜내는 것은 물론 방송문화진흥회의 과도한 간섭도 물리치겠다. 진정성을 믿고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설득했다.
실제로 김 사장은 4일 오전 이근행 노조위원장을 서울 여의도 MBC 본사 사장실에서 만나 황희만 보도본부장과 윤혁 TV제작본부장을 교체하기로 합의한 뒤 이날 오후 방문진 이사회에 참석해 이 같은 인사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사회가 김 사장의 제안을 강력히 반대하고 있어 김 사장과 노조의 대치 국면이 해소될지 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한 상황이다.
방문진은 지난 2월 8일 당시 엄기영 MBC 사장의 뜻과 달리 두 본부장을 선임했으며 엄 전 사장은 이에 반발해 사퇴를 결정한 바 있다. 노조 측은 두 본부장의 교체가 이뤄지면 사장 출근 저지 투쟁을 철회하기로 합의했으나 교체안이 통과되지 않은 만큼 김 사장의 출근을 계속 저지한다는 방침이다.
경남 사천 출신인 김 사장은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한 뒤 웨일즈대에서 매스커뮤니케이션 석사학위를 받았다. 1979년 보도국 기자로 MBC와 인연을 맺은 김 사장은 1994년 도쿄특파원, 정책보좌역, 보도국 부장, 보도제작국장, 울산MBC 사장을 거쳐 2008년 청주MBC 사장을 역임했다.
김 사장의 사장 응모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울산MBC 사장으로 재직하던 지난 2008년 1월에도 사장 공모에 나섰다가 엄기영 전 사장에게 고배를 마신 바 있다. 노조는 친 MB계로 알려진 김 사장을 ‘블랙리스트’로 올려 놓기도 했다. 당시 노조는 김 사장이 한나라당 행사에 공공연히 참석해왔던 것을 지적하며 정치적 편향성을 심각하게 문제삼았다. 하지만 김 사장은 전 사원에게 “저로서는 (이 대통령과) 부인할 수 없는 오랜 친분관계가 있다”고 시인하면서도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정치인들과도 친밀한 관계가 동시에 있다. 회사가 부여한 제 직무의 결과일 뿐”이라 밝힌 바 있다.
▲ 출근저지투쟁을 벌이고 있는 노조와 대화하는 김 사장(위), 김 사장이 출근이 가로막히자 천막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 ||
이 대통령과 김 사장의 친분은 1996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정치부 소속으로 국회를 처음 출입했던 김 사장은 국회에 막 입성한 초선의원이었던 이 대통령과 각별한 정을 쌓았다고 한다. 두 사람은 고려대 선후배 사이인 데다가 신참 국회출입기자와 초선의원이라는 공통적인 정서가 맞아떨어지면서 친해진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상황을 아는 기자들은 “그때 국회 출입기자들은 초선의원 이명박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유독 김 사장은 MB와 가깝게 지냈고 그 인연을 오랫동안 이어온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두 사람은 이 대통령이 1998년 2월 선거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아 의원직을 사퇴한 이후에도 의리를 지키며 변치 않는 친분을 유지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2007년 울산MBC 사장이었던 김 사장이 모친상을 당했을 때 대선준비로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이 대통령은 직접 조문을 할 정도였다. 또 취임 후인 2008년 7월 이 대통령이 충청북도 도청에 업무보고를 받기 위해 방문했을 때 김 사장은 청주문화방송 사장 신분으로 청주공항 활성화 방안을 직접 브리핑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 사장의 친정권 배경을 두고 섣불리 판단하기에는 이르다는 지적도 있다. 방송과 보도를 향한 김 사장의 신념과 소신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가 정권의 꼭두각시로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란 관측을 내놓고 있다. 생각처럼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얘기다. 특히 공영방송의 책임과 위상을 절감하고 누구보다 MBC에 강한 애정을 갖고 있는 김 사장이 재임기간 동안 자신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코드’ 인사 논란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정도와 소신을 지킬 것이라는 전망도 적지 않다.
실제로 20년 전 기자신분이었던 김 사장은 누구보다 정권의 입맛과 무관한 행보를 지향하는 방송의 정치적 독립성을 갈망하던 인물로 알려졌다. 김 사장은 지난 1990년 9월 13일자 MBC노보에 ‘다시 생각해도 부러운…영국 BBC’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통해 방송의 정치적 독립성과 자율성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피력한 바 있다.
김 사장은 또 보도제작국 소속 기자신분으로 지난 1989년 7월 29일부터 1990년 7월 26일까지 1년간 영국 카디프대학에서 연수를 받을 당시 “공영방송의 간판으로 60년이 넘도록 한결같은 명예와 품위를 지켜온 BBC는 과연 어떠한 방송인가. 설립 당시 주무장관이 방송내용과 운영을 BBC에 전적으로 일임하고 정부가 개입하지 않은 것이 옳다고 하는 불간섭 원칙을 천명한 이래 60년이 넘도록 역대 정부와 의회가 이 전통을 지켜오고 있다”며 BBC의 정치적 독립성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당시 김 사장은 1985년 발생한 BBC 다큐멘터리 불방 논란을 거론하기도 했다. 이는 BBC가 북아일랜드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단체쪽 인터뷰가 포함된 다큐멘터리를 방송하려하자 방송 주무장관이 ‘테러리스트의 주장을 방송하는 것’이라며 BBC 경영진에 방송금지를 요구했던 사건이다. 당시 BBC 기자들은 편집권의 독립성 침해라며 취재와 제작을 거부한 채 24시간 파업에 들어가는 등 반발했고, 이후 브리탄 국무상이 좌천되고 결국 프로그램은 당초 예정됐던 것보다 90초가 늘어난 채 전파를 타게 됐다. 김 사장은 이 사건에 대해 “방송에 대한 기자와 PD의 열정은 물론이고 BBC의 공신력 유지를 위한 정부의 결단도 돋보였다”고 높이 평가했다.
김 사장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카리스마’와 ‘강한 리더십’을 내세우기보다는 내부융합과 인간관계를 중요시 여기는 친화력을 지닌 인물로 평가된다. 또 잔정이 많고 인간적인 그에게 스스럼없이 고민을 토로하는 등 유독 따르는 후배들이 많았다고 한다. 울산MBC 사장과 청주MBC 사장으로 근무하면서는 수익사업 발굴에 노력을 기울여 경영면에서도 남다른 수완을 발휘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 사장은 노조와 일부 여론의 반발을 무마시키는 것 외에도 풀어가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가장 시급한 것은 급감하고 있는 광고수익 문제 해결과 동시에 급변하는 뉴미디어 환경에서 MBC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경영상태를 호전시키는 일이다. 추후 종합편성채널(종편)이나 미디어렙(방송광고대행사)이 가시화되면 광고판매를 둘러싸고 더욱 치열한 경쟁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노조와 단체협약 개정, 지역MBC 광역화 문제도 논란거리다.
특히 1년 남짓한 짧은 임기 내에 가시적인 경영실적을 내야 하는 무거운 과제를 떠안은 김 사장이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숙제는 말할 필요도 없이 현재 정면으로 대치하고 있는 노조를 끌어안고 정상적인 관계회복을 하는 등 조직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김 사장은 우선 ‘낙하산 논란’에서 벗어나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대통령과의 친분과는 별도로 공영방송의 수장으로서의 확고한 의지를 피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MBC의 방송 자율화와 정치적 독립성을 굳건히 지켜나가겠다는 의지를, 실천 가능한 방안을 담아 보여줌으로써 신임을 얻어야 하는 지적이다.
김 사장은 과연 현재의 위기를 슬기롭게 돌파할 수 있을까. 20년 전 영국 BBC의 정치적 독립성과 방송 자율성을 부러워하며 한국 공영방송의 앞날을 우려했던 ‘기자 김재철’의 소신과 자존심은 여전히 살아 있을까. 격랑에 휩싸인 ‘김재철호’의 앞날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