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욕 양키스로 이적한 뒤에 몸 만들기에 여념이 없는 박찬호. 홍순국 메이저리그 사진전문기자 | ||
―‘스프링’이란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날씨가 무척 추워요. 애리조나도 추웠는데 플로리다는 더 추운 것 같아요. 이런 날씨에서 운동하는 게 쉽진 않을 것 같아요.
▲뉴욕에서 플로리다로 넘어갈 때 폭설로 비행기가 결항되는 등 고생을 많이 했거든요. 그래도 플로리다는 따뜻한 지역이니까 나름 기대를 하고 비행기에서 내렸는데, 순간 비행기가 플로리다가 아닌 뉴욕으로 다시 돌아간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춥더라고요. 시차도 있고, 몸 상태도 그렇고, 빨리 적응해야 하는데 날씨가 추워서 몸에 무리가 오거나 부상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많았죠. 다행히 여기 도착한 이튿날부터 날씨가 따뜻해지니까 선수들이 나한테 더운 바람을 몰고 왔다며 더 반기더라고요(웃음).
―캠프에 합류하기 전 머리를 짧게 자르고 수염을 깨끗이 정리하는 등 몸과 마음의 준비를 하고 들어온 것 같아요. 양키스가 선수들의 장발이나 수염을 허용하지 않는다면서요?
▲원래 새로운 팀에 들어갈 때 머리도 단정히 하고 수염도 깎고 그래요. 양키스라고 해서 특별히 남다른 마음 가짐을 하고 온 건 아니에요. 수염은 98년도인가? 그때 어떤 선수의 건의로 기르기 시작했는데 투수가 수염을 기르면 타자한테 전달되는 이미지가 강해 보이나 봐요. 그때부터 조금씩 기르기 시작했죠. 한때 제 수염이 한국에서 유행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직접 확인한 건 아니고요(웃음).
―뉴욕 양키스는 모든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한번쯤 뛰고 싶어하는 팀이에요. 그래서인지 여느 때보다 박찬호 선수의 양키스 생활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아요.
▲전통이 있는 구단이고, 항상 좋은 선수들이 득시글거리니까 다른 팀 선수들도, 팬들도, 미디어도 양키스란 팀에 대해 관심이 많겠죠. 몇 년 동안 이 팀, 저 팀 많이 옮겨 다녔잖아요. 그로 인해 경험도 생기고, 다른 사람들이 날 어떻게 받아들일까보다 내가 어떻게 할까에 집중하니까 새로운 팀에 와도 마음이 편하고 금세 적응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선수 생활을 오래해서 그런지, 남미에서 온 젊은 친구들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선수들이 절 알아보더라고요.
―LA 다저스, 필라델피아, 뉴욕 양키스…, 모두 월드시리즈와 관련이 있는 팀들이에요. 그런데 흥미롭게도 박찬호 선수는 모두 이 팀들과 인연을 맺었다는 사실이죠. 우승반지는 끼지 못했지만 말예요. 항간에는 박찬호 선수가 우승 반지를 끼어보고 싶어 우승팀에 들어간다는 얘기도 있었어요.
▲약간 의도적인 게 있었던 것도 사실이에요. LA 다저스에 있을 때 필라델피아의 오퍼를 받고 무척 기분 좋았어요. 우승팀이란 사실 때문이었죠. 그래서 필라델피아로 옮겨가는 데 주저함이 없었어요. 그러다 지난 시즌 뉴욕 양키스와 월드시리즈에서 맞붙게 됐었죠. 우승 문턱까지 갔다가 결국엔 놓쳤는데, 이번엔 다시 뉴욕 양키스로 팀을 옮겨간 셈이죠. 양키스란 팀도 매력있지만 월드시리즈 우승팀이었기 때문에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그만큼 우승반지를 끼어보고 싶은 소원이 크다고 할 수 있어요.
―우승반지를 끼어보는 게 소원이라면 필라델피아도 그 가능성이 있는 팀 아닌가요? 필라델피아와 재계약을 했더라면 어떠했을까요?
▲물론 필라델피아와 계약했다면 그 팀이 가장 우승할 수 있는 확률이 높다고 말했겠죠.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할 수 있는 팀은 양키스만은 아니잖아요. LA다저스도, 세인트루이스도 다 유력한 후보팀들이에요. 사실, 시카고 컵스와 뉴욕 양키스를 놓고 많이 고민했어요. 그런데 둘 중 우승할 수 있는 확률이 높은 팀이 양키스였다는 거죠.
―지난 일이지만, 여전히 박찬호 선수가 필라델피아의 재계약 제의를 거절한 진짜 이유에 대해 추측이 분분해요. 필라델피아가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250만 달러의 연봉을 제시했는데, 지금 양키스와는 120만 달러에 계약한 거잖아요.
▲ 로이터/뉴시스 | ||
―지난 시즌이 끝난 후 구단과 협상을 벌이면서 선발 투수를 조건으로 내걸었어요. 그러다 정작 선발을 보장한 시카고 컵스가 아닌 불펜만 허용한 양키스랑 계약했어요. 말 못할 속사정이 있었나요?
▲컵스에서 제시한 선발 조건이 그다지 신빙성 있게 다가오지 않았어요. 컵스도 처음엔 구원투수를 원했었거든요. 지난해 필라델피아도 선발을 시켜주겠다고 해놓고 결국엔 불펜만 맡겼잖아요. 컵스도 그럴 확률이 높아 보였죠. 더욱이 선발을 맡기엔 시기적으로 너무 늦다는 판단도 한몫했어요. 불펜은 지금 들어가도 여유 있게 갈 수 있지만, 선발은 스타트가 늦었고 그런 상황에서 무리하게 몸을 만들다보면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만약 12월에 컵스에서 선발 오퍼가 왔었다면 당연히 컵스를 선택했을 겁니다.
―양키스 선수들의 천문학적인 몸값 사이에서 120만 달러의 연봉은 굉장히 작은 액수로 보여요. 연봉이 낮은 선수들은 팀에서도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죠. 트레이드나 방출에 대해서요.
▲물론 양키스 선수들 사이에선 무척 적은 연봉이죠. 그러나 이 팀에선 내가 어떻게 할까를 생각해야지,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할까를 고민하면 힘들어져요. 그리고 돈 많이 받고 야구 못하면 스트레스가 더 심하잖아요. 몸값이 낮으면 성적에 대해 큰 부담이 없는 편이고요.
―박찬호 선수는 팀운이 좋다는 얘기에 동의하시나요? 팀 복이 많은 선수라는 말인데.
▲그렇게 따지면 (김)병현이가 최고죠. 그 선수는 우승반지를 두 번이나 끼었잖아요(웃음). 난 병현이처럼 애리조나나 보스턴에서 우승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은데요?
―양키스 입단 소식을 전하는 국내 기자회견에서 추신수 선수한테 홈런을 맞아도 기분이 좋을 것 같다고 말했어요. 실제 그런 상황이 벌어져도 같은 마음일까요?
▲신수가 홈런을 못 치면 내가 잘 던진 것이고, 신수가 홈런을 치면 신수가 잘 친 거죠. 한국 팬들 입장에선 신수가 잘 치거나 내가 잘 던지거나 누가 되든, 좋은 플레이를 선보인다면 기분 좋지 않을까요? 우리 것은 좋은 거니까요(웃음). 투수는 정확하게 던져야 합니다. 신수라고 봐줄 수는 없겠죠. 정확하게 던졌는데 쳐내면 타자가 잘한 거죠.
―인터뷰 때마다 선수 생활의 마지막은 한국에서 하고 싶다고 했어요. 최근에는 지도자 생활에 대해 언급이 되던데, 한국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고 싶은 생각이 있나요?
▲분명히 말씀드릴게요. 원하는 팀이 있다면 선수 생활의 마지막은 한국에서 하고 싶어요. 이 부분은 제 소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지도자 생활은 프로팀 감독을 의미하는 게 아니에요. 야구 꿈나무들, 즉 유망주들을 위해 내 역할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참여하고 싶어요. 프로팀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는 건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자신의 홈페이지에 직접 글을 올리면서 근황을 전해주는 걸 즐겨하는 편이에요. 기자와의 인터뷰보다는 홈페이지를 선호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홈피에 글을 올리는 건 왜곡되지 않고 정확하잖아요. 기자의 마음을 거쳐서 전달되는 기사와 내가 직접 쓴 글과는 차이가 있지 않겠어요? 순전히 100% 내 마음이니까. 재미있는 건 기자가 쓴 글에는 댓글들이 장난 아니에요. 비난, 비판, 질투 등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글들로 도배가 되더라고요. 그러나 홈피는 정반대예요. 비난보다는 응원의 메시지들이 대부분이죠. 그래서 더 홈피에 대해 애착을 갖게 되는 것 같아요.
―지난해 필라델피아에서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어요. 불펜투수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는데, 이전과 뭐가 달라진 건가요?
▲가장 중요한 건 제구력이었어요. 제구력이 살아났기 때문에 좋은 피칭을 할 수 있었던 거죠. 투수들한테 가장 중요한 게 뭘까요? 제구력? 빠른 볼? 무브먼트? 이 셋 중에 가장 중요한 걸 꼽으라고 한다면 제구력입니다. 제구력은 투수의 진리와 같아요. 직구, 변화구, 아무리 잘 던진다고 해도 제구력이 받쳐주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에요.
―혹시 오는 11월 열리는 광저우 아시안게임 대표팀에 다시 발탁된다면 수락할 용의가 있나요?
▲한국야구대표팀이 국제대회에서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선수들의 분명한 목표 의식과 간절함이 좋은 팀워크와 성적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해요. 태극마크는 언제 어디서든 가슴 설레게 하는 의미를 주지만, 난 이미 대표팀에서 은퇴하겠다고 말한 상태이고 나보다 더 좋은 기량을 갖고 있는 후배들이 참가해야 정신적인 부분이나 팀워크면에서 더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고 믿어요. 뭐, 김인식 감독님이 다시 대표팀 감독을 맡으신다면 몰라도…, 하하 이 말은 농담입니다!
박찬호의 미래
“한국은 스포츠 강대국이다. 이런 나라에서 스포츠 출신의 리더가 많지 않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태권도 출신의 문대성 IOC 선수위원 외에 국제적으로 활동하거나 인정받는 스포츠 출신의 리더가 몇 명이나 되나? 개인적으로 스포츠 출신의 리더가 많이 나와서 스포츠 관리 시스템이 더욱 발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찬호는 야구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야구만 잘해서 부와 명예만 챙기고 은퇴하겠다는 마음도 아니다. 야구를 통해 이름이 알려졌고 국민적인 사랑과 관심을 한몸에 받은 만큼 그에 대한 보답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강하다. 그래서 그는 남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겨울에는 국내 프로팀 캠프에 들어가 선수들과 함께 생활하는 걸 즐긴다. 이유는 자신이 갖고 있는 정보를 나눠주고자 함이 크다.
“난 후배들을 가르치진 않는다. 메이저리그에서 배운 정보들을 후배들에게 제공하고 그들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화시키길 바란다. 그래서 후배들 앞에서 특강도 많이 하고 개인적인 질문을 받으면 정성껏 설명을 하려고 노력했다. 나 외에도 서재응, 최희섭, 김선우 등 메이저리그를 경험한 선수들이 한국에서 지속적인 정보 공유를 해나간다면 한국 야구가 점차 더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
박찬호는 야구 선수 외에 다른 종목의 선수들과도 폭넓은 교류를 갖고 있다. 특히 박지성, 양용은과는 자주 연락을 주고받으며 안부를 묻고 관심을 이어나간다.
“결국 난 인복으로 살아가는 셈이다. 인간관계처럼 소중한 게 또 어디 있겠나. 공주의 시골 촌에서 태어난 내가 이렇게 이름을 알리며 살 수 있는 배경에는 그 인간관계가 크게 작용했다. 태극마크를 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국, 미국 등 경쟁이 치열한 스포츠 세계에서 선수로 인정받고 대우받으며 사는 것 자체가 애국이고 대한민국을 알리는 것이다. 그래서 박지성이나 양용은 선수가 더 대단하고 멋지게 보인다.”
박찬호의 앞선 마인드, 여느 선수들과는 차원이 다른 생각을 전해 듣다보면 그가 궁극적으로 가고자 하는 길이 ‘스포츠 리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미 플로리다 탬파=이영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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