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는 맹 장관 내정자 인선 배경에 대해 “언론과 당, 국회, 정부 등에서 보여준 정무적 판단력과 폭넓은 식견, 포용적이고 열린 자세 등 국무위원으로 필요한 역량을 갖춘 것으로 판단됐다”고 밝혔다. 청와대는 또 최 수석 발탁과 관련해 “국제적 감각과 상황판단 능력이 뛰어나 G20 정상회의 등 국제 공조와 경제부처 간 협조체계 강화에도 핵심적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피력했다.
하지만 야권은 맹 내정자와 최 수석이 ‘친 MB’ 인사로 분류되고 있다는 점에서 ‘재활용 인사’ ‘회전문 인사’라는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특히 청와대가 해군 초계함 침몰 사태로 정국이 어수선한 상황에서 행안부 장관과 경제수석 인사를 전격 발표한 것은 ‘여론의 주목을 덜 받기 위한 꼼수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천안함 정국’으로 온 나라가 뒤숭숭한 와중에 핵심 요직에 발탁된 맹 내정자와 최 수석이 걸어온 인생역정을 되짚어 봤다.
▲ 맹형규 행안부 장관 내정자 | ||
청와대서 내각으로 회전문 열고 또 왔네
‘정치 1번지’로 통하는 서울 종로에서 태어난 맹 내정자는 서울 경복고를 거쳐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할 때까지 학창시절을 줄곧 서울에서 보냈다. 맹 내정자는 1972년 대학 졸업과 함께 국내 최초의 종합통신사였던 합통통신에 입사하면서 언론인의 길을 걷게 된다. 1980년 언론 통폐합 과정에서 합동통신이 연합통신(연합뉴스 전신)에 흡수합병될 때까지 그는 이곳에서 정치부와 외신부에서 초년 기자생활을 보냈다. 이후 연합통신 런던 특파원과 논설위원을 역임하는 등 16년 세월을 연합통신에서 보냈다.
1988년 <국민일보> 워싱턴 특파원으로 자리를 옮긴 맹 내정자는 1990년 SBS 워싱턴 특파원을 거쳐 1991년부터 95년까지 SBS 간판뉴스인 8시 뉴스 앵커를 맡으면서 대중적 인지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23년간 언론인의 길을 걸어온 맹 내정자가 정치권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은 1996년이다.
맹 내정자는 한나라당으로부터 거듭 러브콜을 받자 하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겨보기로 하고 96년 15대 총선 출마(서울 송파)를 결심한다. 처녀 출마한 15대 총선에서 금배지를 단 맹 내정자는 이후 16, 17대 총선에서 잇달아 당선되면서 3선 중진 반열에 올랐다. 맹 내정자는 정치 입문 후 한나라당 대변인, 총재 비서실장, 기획위원장, 정책위 의장 등 주요 당직을 두루 거치면서 원만한 일처리로 신망을 얻었다. 맹 내정자는 정치권에서 ‘신사’로 통한다. 백봉신사상 초대 수상자이기도 하다. 이는 맹 내정자가 여야를 망라하고 정치권 인사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만큼 맹 내정자는 온화한 이미지와 함께 당적과 계파를 넘는 폭넓은 대인관계가 최대 강점으로 꼽힌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대선 때 중립을 표방한 맹 내정자를 2008년 6월 현 정부 두 번째 정무수석으로 전격 발탁한 배경에는 그의 폭넓은 대인관계와 원만한 성격이 자리잡고 있다.
통신사와 SBS 간판 앵커를 거쳐 정치권에 입문한 뒤 승승장구했던 맹 내정자가 순탄한 길만 걸어왔던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2006년 지방선거 때 일찌감치 의원직을 내놓고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로 올인 승부를 펼쳤으나 당내 경선에서 오세훈 후보에 패했다. 18대 총선 공천 과정에서는 ‘현역 물갈이’ 태풍에 휘말려 탈락하는 쓰라림을 맛보기도 했다. 정치권 일각에선 현 여권의 양대 축인 친이계와 친박계 어느 쪽도 아닌 중립적 성향을 견지했던 맹 내정자가 18대 총선 공천에서 탈락하자 정치 인생이 끝나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맹 내정자는 현 정부 출범 직후부터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참여하면서 정치 재기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는 인수위 시절 컨트롤타워 역할을 했던 기획조정분과 간사를 맡아 당선인 비서실-인수위-여당 간 불협화음을 최소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인수위 핵심 간사를 맡아 이 대통령으로부터 신임을 얻은 맹 내정자는 쇠고기 수입 파동으로 이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이 급락한 시기에 청와대 정무수석에 발탁돼 국정 안정에 일조했다. 정무수석에 이어 이번 인사에서 행안부 장관에 내정되면서 그는 명실상부한 현 정부 실세로 거듭나고 있다.
현 정부 실세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만큼 맹 내정자가 짊어져야 할 책무도 무겁다. 무엇보다 그는 여야 정치권이 사활을 걸고 있는 6월 지방선거를 주도하는 주무장관이라는 점에서 막중한 임무를 안고 있다. 또 여권이 추진하고 있는 행정구역 개편 작업도 진두지휘해야 한다.
이에 따라 맹 내정자는 장관 발탁 직후인 3월 31일 서울 창성동 청사에 임시 집무실을 마련하고 행안부 1, 2차관과 실국장 10여 명을 접견하는 등 개략적인 업무파악에 들어갔다. 맹 내정자와 행안부 고위간부들은 이날 지방선거, 재정조기집행, 행정구역 개편 등 올 상반기 중에 처리해야 할 굵직한 현안에 대해 의견을 나눈 것으로 전해졌다.
맹 내정자는 또 각 실국별, 분야별로 업무파악에 나서고 있다. 국회 인사청문회를 대비하는 한편 조속한 업무수행을 위한 준비단계에 돌입한 것으로 풀이된다.
청와대는 맹 내정자 발탁과 관련해 “부드럽고 유연하면서도 신뢰와 원칙을 중시하는 성품은 공직사회의 기강을 확립하고 중앙과 지방의 유기적인 협조체제를 강화함으로써 지방행정구역 개편 등 행정안전부의 각종 현안 과제를 효과적으로 추진할 것”이라며 기대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
하지만 야권은 맹 내정자 발탁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야권은 6월 지방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대통령의 최측근을 주무부서인 행안부 장관에 내정한 것은 관제선거를 하겠다는 여권의 노림수가 투영돼 있을 것이란 의혹을 강하게 제기하고 있다. 야권은 또 이번 인사는 이 대통령이 측근 인사들을 재배치한 ‘재활용 인사’ ‘회전문 인사’라고 비판하고 있다. 야권 일각에서는 현 정부의 좁은 인재풀의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인사라고 폄하하고 있는 실정이다.
청와대가 행안부 장관과 경제수석 등의 중요한 인사를 ‘천안함 정국’으로 어수선한 틈을 타 전격 발표한 것과 관련해 비판적 시각을 희석시키기 위한 꼼수가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행안부는 4월 2일 맹 내정자에 대한 인사청문 요청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공식적인 인사청문 요청서가 접수되면 국회는 5일 이내에 해당 상임위원회에 회부하게 되고 20일 이내에 임명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따라서 맹 내정자의 경우 국회 행정안전위원회가 열리는 4월 13~19일 사이에 임명절차가 마무리될 것으로 예상된다.
18대 총선 때 공천 탈락 수모를 극복하고 현 정부 청와대 정무수석에 이어 행안부 장관에 발탁되면서 화려한 ‘부활의 날갯짓’을 하고 있는 맹 내정자가 행안부의 산적한 현안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그의 행보에 정치권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
▲ 최중경 경제수석 내정자 | ||
수출만 아는 외고집 ‘강만수 파워’로 부활
“수출, 수출, 수출. 이것밖에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정책 관료라고 할 수 있겠나.”
3월 30일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에 내정된 기획재정부 차관 출신 최중경 전 필리핀 대사가 지난 2004년 재정부 전신인 재정경제부 국제금융국장으로 일할 당시 최 수석과 비슷한 연배의 재경부 간부가 내렸던 평가다. 최 수석(내정자)에 대해 이러한 평가를 한 이들은 이 간부 한 명만이 아니다. 최 수석과 1년 내외 차이를 보이는 고시 선후배들은 최 수석을 경원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최 수석이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면 다른 것은 전혀 거들떠보지 않는 호불호가 명확한 성향을 가지고 있어 껄끄러운 존재라는 것이다.
경제수석에 내정된 직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최 수석은 ‘고환율주의자 아니냐’는 의미의 질문에 “비서로서 대통령의 뜻을 잘 받아서 전달하고, 제대로 실행되는지 점검해 보완할 점이 있는지를 챙겨보는 역할을 할 뿐”이라고 답변했다. 하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은 주변의 이러한 평가와 무관치 않다.
최 수석이 환율정책에 민감하게 된 것은 1997년 외환위기 당시의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때문이라는 관측이 적지 않다. 그는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재경원 금융협력과장으로 국제통화기금(IMF)과 구제금융 협상에 참여했다. 협상 막판 은행 폐쇄안을 내놓은 IMF 측에 최 수석은 “이건 사기야, 협상무효다”라고 외쳤다. 직선적인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 정책 실패에 대한 책임감과 상처가 표출됐다는 것이다.
김영삼 정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과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를 열기 위해 무리한 원화 강세 정책을 펼쳤다. 원 달러 환율이 700원대를 기록하면서 국민소득은 1만 달러가 넘었지만 1996년 경상수지 적자는 231억 달러에 이르렀다. 하지만 당시 재경원 관료 중 누구도 이것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명학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이때부터 그는 환율을 꼼꼼히 챙기게 됐고, 고환율 정책을 통해 경상수지를 흑자로 만들어 놓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가지게 됐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향이 여실하게 드러난 것이 노무현 정부 재경부 국제금융국장 시절에 펼친 역외선물환시장 개입과 이명박 정부 재정부 차관 시절에 시행한 수출 위주의 고환율 정책이다. 2003년 노무현 정부 초기, 카드사태 등으로 경제 회복은 지지부진했다. 그나마 버텨주던 수출도 환율이 하락하면서 빨간 불이 들어왔다. 1260원 선이던 환율이 한 달 만에 1200원 선 아래로 미끄러졌다.
최 수석은 당시 “어설프게 외환시장에 개입하는 것은 개입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 결과가 좋지 못하다면 내가 책임을 지겠다” “발권력을 동원해서라도 환율을 방어하겠다”는 등 강도 높은 발언과 함께 시장에 개입했다. 손실이 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역외선물환(NDF)시장에까지 뛰어들어 환율 하락을 방어했다. 당시 마지노선인 1140원은 ‘최중경 라인’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하지만 이 선이 무너지면서 1조 8000억 원의 손실을 정부에 안겼다. 그 결과 2005년 보직을 내놓고 세계은행(WB)으로 ‘유배생활’에 들어갔다. 예상을 뛰어넘는 강도 높은 개입에 외환시장 참가자들로부터 ‘최틀러’라는 별명을 얻은 것과 기업들의 수출이 증가한 것이 성과라면 성과였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 직후 강만수 대통령 경제특별보좌관의 부름에 응해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합류한 최 수석은 재정부 1차관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당시 그는 “지난 2년간 900원대이던 환율이 비정상적이었다”면서 고환율 정책을 지휘했다. 그러나 유가 등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면서 물가가 치솟았고,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고환율 정책을 위해 외환보유액을 사용한 것이 고스란히 국내 경제를 옥죄는 부메랑으로 작용했다. 결과는 차관으로 복귀한 지 4개월 만의 낙마였다.
수출밖에 모르는 반쪽자리 관료라는 평가를 받고 있고, 고환율 정책 실패를 두 번이나 겪었음에도 최 수석이 지속적으로 ‘부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재정부 당국자는 “최 수석이 호불호가 갈리는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모시는 사람에 대한 충성심이나 자기 사람을 챙기는 것만큼은 따라갈 사람이 없다. 이 때문에 최 수석을 한 번 마음에 둔 사람은 그를 다시 쓸 수밖에 없다. 강만수 특보가 최 수석을 다시 찾은 데는 다 이유가 있다”고 전했다. 최 수석은 사무관 시절부터 강 특보를 가장 존경하는 선배 공무원이라고 밝혔고, 강 특보도 자신의 저서에서 헌신적 공무원으로 최 수석을 꼽았다.
최 수석은 자신의 일에 대한 확신과 열정, 아이디어가 남다르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는다. 그는 재정부 차관에서 물러나 필리핀 대사라는 외교관직을 난생 처음 맡았음에도 지난 3월 22일 필리핀 방송 IBC의 <업 클로즈 앤드 퍼스널>이라는 토크쇼에서 주는 ‘임팩트 워어드’의 외교부문상을 수상했다.
최 수석의 상황판단과 정책 아이디어, 추진력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 하나. 외환위기 후폭풍을 겪던 2000년 하반기 회사채 만기가 대거 집중되면서 자금시장이 신용경색 위험에 빠졌다. 자칫하면 기업들이 우르르 무너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금융정책과장이던 최 수석은 ‘프라이머리 CBO’(신용등급이 낮은 개별 기업이 새로 내놓은 회사채를 모아 신용보증기금이 보증한 뒤 발행하는 회사채담보부채권)와 ‘회사채 신속인수제도’(한 기업의 회사채 만기가 집중적으로 도래할 경우 회사채의 80%를 산업은행이 총액 인수하는 제도)라는 정책을 내놓아 위기를 넘겼다.
정부 관계자는 “최 수석이 만들어낸 프라이머리 CBO제도는 OECD가 정부개입의 성공사례로 소개할 정도로 적절한 정책이었다”면서 “고환율주의자라는 인상이 깊게 박혀 있지만 일에 대한 추진력이 남다르다. 경제수석에 내정된 것도 청와대에서 이를 높이 평가한 때문”이라고 두둔했다.
이준석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