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서울시장이 광화문 청계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있다. 박원순 시장 페이스북 페이지 캡처.
안철수 국민의당 전 상임대표도 같은날 국회 정론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연 뒤 박 대통령 하야를 공식 요구했다. 안 대표는 격앙된 목소리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대통령을 앞세워 국가의 예산·인사·안보 정책을 사유화한 중대한 국가범죄 행위다. 더 이상 박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아니다. 더 이상 헌법을 파괴할 권리는 없다. 국민의 자존심을 짓밟을 권한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안 전 대표 역시 그동안 내각 총사퇴를 주장해왔다. 하지만 박 대통령 개각 이후 하야 운동에 동참했다. 야권의 유력 대선주자들이 한 목소리로 박 대통령 하야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정치권 일각에선 ‘김병준 카드가 야권발 하야 행렬에 불을 지폈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박 대통령은 최근 김병준 청와대 전 정책실장을 국무총리 후보자로 내정했다. 국민의당의 한 비서관은 “박 대통령이 우리를 무시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새누리당 지도부와 협의를 안 했다는 점도 문제다. 김 후보자의 총리 지명을 새누리당 지도부가 몰랐다는 사실 때문에 당내 분위기가 더욱 격앙됐다. 김 후보자가 아무리 참여정부 사람이라도 청와대는 야당과 한 마디 상의 없이 결정을 내렸다. 박 대통령은 역시 변하지 않았다는 말들이 오갔다. 안 전 대표가 하야를 치고 나온 배경도 이와 무관치 않다”고 설명했다.
문재인 전 대표도 우회적으로 박 대통령 하야를 요구했다. ‘최순실 게이트’가 여야 정치권에 한바탕 폭풍을 일으킨 뒤 문 전 대표는 거국중립내각 카드를 주장해왔다. 하지만 문 전 대표는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을 방문한 자리에서 “현재 국민의 압도적 민심은 박 대통령의 즉각 하야, 퇴진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 민심을 잘 알고 있고 민심에 저도 공감한다”고 설명했다. 박 대통령을 향해 하야 주장을 자제하는 입장을 견지했던 문 전 대표도 하야 정국에 동참할 뜻을 내비친 것이다.
민주당 일각에서는 “문 전 대표 하야 촉구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들리고 있다. 민주당의 한 당직자는 “문 대표는 체급이 좀 크다. 더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한다. 체급이 큰 사람이 이야기하면 ‘이미 대통령 된 것처럼 행동한다’는 역공을 당한다. 체급이 크면 역공도 세다.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다른 당직자도 “사실 문 전 대표는 굳이 ‘오버 페이스’를 할 필요가 없다. 무리해서 나서지 말아야 한다. 문 전 대표 지지율이 상승하고 있다. 지지율이 떨어지는 후보는 적극적인 목소리로 존재감 부각시킬 수 있는 국면이지만 문 전 대표까지 하야를 주장할 이유는 없다”고 말했다.
야권의 군소 주자들은 벌써부터 ‘하야 정국’ 선명성 경쟁에 돌입한 모양새다. 김부겸 민주당 의원은 11월 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매일매일 국정을 엉망으로 만든 증좌가 쏟아져 나오는 마당에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대통령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야당은 하야 투쟁으로 나서야 하는 선택을 강요받은 셈”이라고 박 대통령을 향해 일침을 가했다. 박 대통령 하야를 지속적으로 주장해온 이재명 성남시장 역시 “‘박근혜새누리 망국연합‘ 탄핵하고 해체해야 한다. 이제 박근혜는 대통령이 아니라 헌정질서 파괴 사범 800억대 재산범죄를 저지른 중범죄자일 뿐”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야권 대선주자들의 정치적 부담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도 하야 정국의 배경으로 풀이된다. 민주당의 한 비서관은 “여론이 점점 들끓고 있다. 이전보다 많은 국민들이 압도적으로 박 대통령 탄핵이나 하야에 찬성한 상황이다. 대선주자들 입장에서 하야는 당연히 좋은 카드다. 그동안 역풍을 걱정해서 간을 좀 봤지만 지금은 망설이거나 주저할 필요가 없다. 하야를 부르짖는다고 ‘대통령 자리가 내 것이다’라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하야 카드의 부담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 하야가 현실화된다면 차기 대권구도도 요동칠 전망이다. 헌법 제68조 2항은 “대통령이 궐위된 때 또는 대통령 당선자가 사망하거나 판결 기타의 사유로 그 자격을 상실한 때에는 60일 이내에 후임자를 선거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공직선거법 제35조 5항은 ‘선거의 실시 사유가 확정된 때’를 ‘대통령의 궐위로 인한 선거는 그 사유가 발생한 날’로 정의했다. 박 대통령이 하야한 직후부터 60일 이내에 대통령 선거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부분은 지방자치단체를 이끌고 있는 잠룡들의 대권행에 ‘빨간불’이 켜질 수 있다는 점이다. 공직선거법 제53조 1항에 따르면 지방자치단체장이 대선후보가 되려면 원칙적으로 선거일 90일 전까지 그 직을 그만두어야 한다. 하지만 제53조 2항은 예외 조항을 두고 있다. 지자체장이 ’보궐선거 등‘에 입후보하는 경우 선거일 전 30일까지 사직하면 된다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이 하야한다면 박원순 서울시장, 안희정 충남도지사, 이재명 성남시장은 대통령 보궐선거에 입후보할 수 있다. 이들은 대통령 선거일 전 30일 전까지 물러나면 된다. 하지만 문재인 전 대표 등 다른 잠룡에 비해 대선 준비 시간이 부족할 수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정치평론가는 “대선이 바로 실시되면 야권 후보들이 난립할 수 있다. 문 전 대표와 안 전 대표 등 유력 야권주자가 유리하다. 하지만 거꾸로 유승민·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에게 기회가 올 수도 있다. 두 사람이 경쟁해서 단일후보를 만들어내면 여권이 호기를 잡는다. 지금 야당이나 범민주세력은 하야 정국에 대해 경계심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