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농민이 사망했을 때 참모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머리를 숙여 국민들에게 사죄했다. “공권력은 특수한 권력입니다. 정도를 넘어 행사되거나 남용될 경우에는 국민들에게 미치는 피해가 치명적이기 때문에 공권력의 행사는 어떤 경우에도 매우 냉정하고 침착하게 행사되도록 통제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공권력의 책임은 특별히 무겁게 다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는 대통령이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시대를 살다보니 그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소통은 그리움이고, 그것은 우리가 일궈내야 할 과제가 되었다.
최순실 게이트를 보면서 참 많이 놀랐다. 선거 때 박근혜 후보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던 조윤선 장관조차 11개월 동안 대통령을 독대한 적이 없다 하니 대통령이 그 누구하고도 소통하는 것 같지 않다는 인상은 틀린 것이 아니리라.
그런데 불통의 대통령이 소통하는 여인이 있었다. 대통령 위의 대통령 최순실이 대통령의 권력을 등에 업고 독재자 노릇하며 나라 말아먹은 그림들을 보며 최순실에게 박근혜 대통령이 어떤 존재였는지 보는 것 같아 민망하기까지 했다.
최순실과 대통령은 어떤 사이일까. 진짜 소통은 마음 문이 열리는 것일 것이다. 힘들고 괴롭고 지친 시간을 보낼 때 아무도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여겨 마음 문을 꼭꼭 닫아걸고 눈물도 흘리지 못할 때 누군가 진심으로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 내 마음자락을 살펴주어 마음 문이 열렸다면 그런 소통의 관계를 계기로 또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것이 되지 않는다면 가짜 소통이고, 거짓 사랑이다. 더구나 그가 가진 권력을 나누기 싫어 둘 사이에 아무도 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 자가 심리적 갑일 때 불통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러한 거짓에 귀한 ‘나’를 의탁한 자, 괴로움에 들끓어야 하리라.
하야 얘기가 나온다. 문학 하는 친구가 물었다. 하야(下野)의 ‘야’자가 들 야(野)니? 합창을 하듯 남은 세 친구가 대답했다. 으응. 그러자 그 친구가 말했다. 그렇게 예쁜 말을 어떻게 줄 수 있어? 이 상황에.
그러고 보니 하야(下野)라는 말, 참 예쁘다. 그 말에는 바람 냄새, 흙냄새가 난다. 그 말은 왜 ‘나’는 그렇게 속을 수밖에 없었는지, 왜 ‘나’는 그렇게 ‘나’ 자신에 갇혀 지내면서도 권력을 놓을 수 없었는지, 폭로 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성찰하고 고백을 할 수 있는 자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