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환과 이효리는 연예계를 대표하는 ‘폴리테이너’(정치인 politician과 연예인 entertainer의 합성어)로 꼽힌다. 사회 문제와 정치 현안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가감 없이 밝히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유명 연예인이 ‘공인’이라는 이유를 들며 사회적인 이슈에 의견 내기를 꺼려하는 분위기가 팽배하지만 이승환과 이효리는 다르다. 이들의 관심 분야는 정치적 이슈부터 해고 노동자 문제, 반려동물 보호 운동까지 뻗어있기도 하다.
이승환과 이효리가 폴리테이너로서 이번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비판하는 모습은 긍정적인 효과로 이어지고 있다. 파급력을 가진 또 다른 대중문화 예술인들이 이에 힘입어 목소리를 내는 쪽으로 그 여파가 미친다. 대중문화 전반에서 일어나는 이런 움직임은 이번 사태에 깊이 개입한 차은택 감독을 떠올리며 더욱 아이러니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특히 이승환과 이효리는 과거 차은택 감독과는 뗄 수 없는 관계었던 사이. 가수와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오랫동안 인연을 맺었고, 해외 진출을 함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운명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이승환과 이효리가 국민의 마음까지 위로하고 있는 반면 차은택 감독은 대한민국 문화산업을 농단한 혐의를 받는 죄인이 됐다.
‘길가에 버려지다’ 뮤직비디오 화면 캡처.
# 차은택…1997년 이승환 뮤직비디오로 유명세
차은택 감독이 국정 농단의 주범인 최순실의 최측근으로 문화산업 전면에 나선 시기는 2014년이다. 그로부터 불과 3~4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유명 뮤직비디오 감독이자 CF 연출자로서 연예계에서 이름을 알려왔다. 실력자로 인정받으면서 자연스럽게 톱스타들과의 작업 횟수도 많았다.
차은택 감독은 이승환을 만나면서 유명세를 얻었다. 그 시작은 1997년 이승환이 발표한 노래 ‘애원’의 뮤직비디오부터다. ‘애원’ 뮤직비디오는 발표되고 20년이 지난 지금도 ‘성지’로 통할 만큼 유명하다. 당시 뮤직비디오 촬영지는 개통한 지 얼마 안 된 5호선 광나루역. 전동차가 역으로 들어오는 뮤직비디오 장면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의 형상이 나타나면서 이른바 ‘귀신소동’이 벌어졌기 때문. 일부러 귀신을 넣었다는 조작 의혹에 휘말려 이승환과 연출자인 차은택 감독은 곤욕을 치렀고, 전문 기관에 분석을 의뢰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차은택 감독은 2년 뒤 이승환의 또 다른 노래 ‘당부’의 뮤직비디오도 연출했다. 당시 뮤직비디오에서는 쓰이지 않았던 드라마 형식을 취했고, 이후 국내 뮤직비디오 제작 유행을 바꿔놓을 만큼 인기를 얻었다. 이승환과의 만남 이후 차은택 감독은 가수 조성모와 SG워너비, 싸이 등 인기 가수와 성악가 조수미의 뮤직비디오를 도맡아 연출했고 그렇게 연예계로도 자신의 영향력을 넓혔다.
차은택 감독은 이효리와도 인연이 상당하다. 이효리의 솔로 데뷔곡 ‘유고 걸’ 뮤직비디오 연출이 시작이다. 이후 이효리가 전성기 인기를 누리던 2000년대 초중반 모델로 활약한 휴대전화 애니콜 광고 시리즈도 차은택 감독이 연출했다.
이효리가 해외 진출을 모색하던 2007년에는 차은택 감독이 연출한 단막드라마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의 주인공을 맡았다. 이 드라마는 일본에서 방송되기도 했지만 한류 드라마로는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이효리와 차은택 감독의 인연은 약 3년 전부터 끊긴 것으로 보인다. 이효리는 약자의 편에서 목소리를 내는 사회적인 행보를 시작했고, 차은택 감독은 이후 최순실과 인연을 맺고 각종 문화산업의 이권에 개입하면서 국정까지 농단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현재 차은택 감독이 연루된 문화산업 이권 개입 및 인사권 관여의 문제는 일일이 나열하기도 벅찰 만큼 광범위하다. 독립 광고 대행사의 지분을 강탈하거나, 특혜로 얻은 광고의 하청을 주면서 제작비를 지급하지 않았다는 등의 혐의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문화체육관광부 장·차관 및 콘텐츠진흥원장의 인사권에도 그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의혹이 짙다. 차은택 감독의 ‘현재’와 이승환, 이효리의 상황은 극과 극이다.
11일 오후 차은택이 영장실질심사를 마치고 고개를 숙이고 서울중앙지법에서 나오고 있다. 임준선기자
# 이승환·이효리가 발표한 노래 ‘길가에 버려지다’
이승환은 얼마 전 자신의 SNS에서 차은택 감독의 이름을 언급했다. “(차)은택이와 잘 지낼걸. 왜 내가 연락을 끊었을까”라는 내용이다. 이 글이 작성된 데는 배경이 있다. 이승환이 글을 쓴 날, 차은택 감독이 문화체육관광부 장·차관급 인사를 좌지우지했다는 보도가 터져 나왔다. ‘연락하고 지냈으면 자신도 장관 자리 하나쯤 얻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이승환 식의 풍자다.
이승환은 최순실 국정 농단이 처음 알려진 직후부터 적극적으로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가장 먼저 행동으로 보여준 연예인이기도 하다. 이승환은 서울 잠실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 건물에 ‘박근혜 대통령 하야’라고 쓴 현수막을 설치했다가 인근 주민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에 철거당했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곧바로 법률 자문을 받은 그는 같은 내용의 현수막을 다시 제작해 건물 외벽에 또 걸었다.
이어 국민들을 위로하는 내용의 노래 ‘길가에 버려지다’를 제작했고 동료 가수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이효리는 이승환으로부터 함께하자는 연락에 응했다. 노래 작업에는 이효리의 남편이자 작곡가인 이상순도 참여했다. 이 음원은 무료로 배포됐고, 12월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민중총궐기대회에서 100만 명의 국민 앞에서 불렸다. 이승환과 이효리가 시작한 위로곡 프로젝트에는 현재 또 다른 가수들이 참여를 원하고 있다. 이승환은 37명(팀)의 가수들과 합심해 만든 ‘길가에 버려지다’의 두 번째 곡을 18일 공개한다.
이해리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