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트럼프 멘붕’에 빠져 있는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요즘 도널드 트럼프(70)와 함께 급부상하고 있는 ‘알트-라이트(alt-right)’가 주목받고 있다. ‘알트-라이트’란 이름 그대로 ‘대안(alternative) 우익(right)’ 혹은 ‘신우익’을 뜻하는 것으로, 기존의 전통적인 보수운동에 반하는 새로운 극우 운동이다.
그동안 비주류로 인식됐던 ‘알트-라이트’가 당당하게 “이제는 우리가 미국의 주류다”라고 외치고 있는 이유는 바로 트럼프의 당선 및 인선 때문이다. 다름이 아니라 선거 캠프 최고경영자(CEO)였던 극우 성향의 스티브 배넌을 수석전략가 겸 고문으로 임명했기 때문. 배넌은 전형적인 보수 성향의 엘리트로, ‘알트-라이트’ 운동을 하는 온라인 극우매체인 ‘브레이브바트’를 창립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배넌이 백악관에 입성하게 됨으로써 자연히 목소리가 커진 ‘알트-라이트’는 현재 트럼프를 등에 업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겠노라고 예고한 상태다.
주류 언론과 전통적인 보수주의를 거부하면서 반무슬림, 반이민, 인종주의, 국가주의를 자처하는 ‘알트-라이트’는 과연 그들의 주장대로 새로운 보수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저 일부 극우성향 집단이 떠들어대는 하나의 현상에 그칠까.
우리나라에 ‘일베’가 있다면 미국엔 ‘4챈’ ‘8챈’이 있다. 트럼프가 선거운동 당시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클린턴 비방 사진의 출처가 바로 ‘8챈’이었다.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던 ‘알트-라이트’가 주류 언론을 통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사실 트럼프 때문이었다. 선거운동 당시 트럼프가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힐러리 클린턴을 비방하는 사진의 출처가 다름아닌 ‘8챈’이었던 것. 이 사진이 문제가 됐던 이유는 클린턴과 나란히 있는 육각형 별모양 때문이었다. 유대인을 상징하는 육각별 안에는 ‘역대 가장 부패한 후보’라는 글이 써있었고, 뒤에는 달러 사진이 배경으로 깔려 있었다. 이에 곧 유대인이 돈, 부패와 연관되어 있다는 편견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비난이 쏟아졌으며, 트럼프는 이런 비난에 두 시간 만에 해당 트윗을 삭제했다.
논란이 된 이 사진의 출처를 추적한 웹사이트 ‘믹(Mic)’의 기자인 앤서니 스미스는 “그 이미지는 ‘8챈’에서 처음 올라온 것이었다”고 말하면서 “트럼프가 이 사이트의 게시판에 있던 이미지를 공유한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스미스가 확인한 것을 <BBC>가 보도했고, 이어서 다른 매체들도 연달아 보도하면서 그때까지만 해도 낯설기만 했던 ‘알트-라이트’는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주목받기 시작했다.
젊은 백인 남성이 주를 이루는 것으로 알려진 ‘알트-라이트’는 인터넷을 기반으로 활동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백인우월주의나 극우 보수주의와는 다르다. 때문에 결집력이 떨어지며, 중앙조직도 없다. 하지만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인터넷 게시판이나 채팅방을 이용해 유머나 카툰, 이미지를 생산 및 유포하는 방식으로 활동한다는 점에 있다. 이를 가리켜 ‘밈(Meme)’이라고 부른다.
도발적이고 자극적인 ‘밈’은 좌파우파를 가리지 않고 자신들의 적으로 간주되는 모두를 대상으로 한다. 적에 대한 유해물을 올리고 공유하는 것이야말로 이들이 주로 활동하는 방법이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과연 이들이 진지한 활동단체인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저 전통적인 보수를 표현하는 또 다른 방법일 뿐, 새로운 운동은 아니라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밈’으로는 ‘개구리 페페’가 있다. 초록색 개구리 캐릭터인 ‘페페’는 싱글싱글 웃고 있는 얼굴을 하고 있으며, ‘알트-라이트‘에 의해 주로 히틀러, 트럼프, 혹은 보수주의적인 인물로 묘사되곤 한다. 하지만 ‘페페’는 본래 매트 푸리의 만화인 <보이스 클럽>에 등장하는 개구리 캐릭터였다. 누리꾼들 사이에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2005년 ‘마이스페이스’를 통해서였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페페’는 트럼프나 극우주의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2015년 전까지만 해도 ‘페페’는 ‘배트맨 페페’ ‘마트 계산원 페페’ 등으로 다양하게 변화되면서 누리꾼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으며, 슬픔, 절망, 기쁨 등 인생의 다양한 감정을 나타내는 캐릭터로 사랑받았다. 심지어 가수 케이티 페리 등 유명인들도 ‘페페’를 이용해 감정을 표현하곤 했었다.
‘페페’의 상징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백인우월주의자들이 사용하면서부터였다. 2015년 말부터 ‘4챈’의 게시판 가운데 하나인 /r9k/에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성격이 변했던 것. 착한 캐릭터에서 거대한 초록색 괴물로 변한 ‘페페’는 나치와 동일시되거나 반유대인, 반이민, 반무슬림을 상징하는 캐릭터로 변형됐다.
만화 캐릭터인 개구리 페페가 2015년 말 마침내 트럼프와 결합하면서 ‘페페=트럼프’라는 이미지가 형성됐다.
그리고 2015년 말, 마침내 트럼프와 결합하면서 ‘페페=트럼프’라는 이미지가 형성됐다. 이런 이미지를 알고 있었던 듯 트럼프 본인도 트위터를 통해 ‘페페’와 합성된 자신의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이와 관련, 공화당 컨설턴트인 셰리 제이콥스는 “초록색 개구리는 백인우월주의자들이 선전활동으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가 ‘알트-라이트’로부터 뭇매를 맞기도 했다.
‘페페’가 이렇게 전혀 엉뚱한 캐릭터로 인기를 얻게 되자 ‘페페’의 원작자인 푸리는 “매우 안타깝다”며 유감을 나타내고 있는 상태. 그러면서 그는 “가장 좋은 대응 방법은 무시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알트-라이트’의 기원은 불분명하지만 스미스는 “2008년 오바마 당선 직후 열린 우파 철학자인 폴 고트프리드의 강연에서 단초를 찾아볼 수 있다”고 추측했다. 고트프리드는 당시 강연에서 이런 성격의 보수적인 활동가들을 가리켜 “설립기금 없이 존재하는 독립적인 우파 지식인들”이라고 말한 바 있다. 또한 그는 “우리 단체는 젊은 사상가들과 활동가들로 이뤄져 있다. 만일 독립적인 우파 조직이 존재해야 한다면 우리가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스미스는 “당시 미국에서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하자 갑자기 이런 우파들이 그늘 속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단체를 조직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고트프리드는 자신의 이런 아이디어가 훗날 SNS에서 익살스런 누리꾼들에 의해 명맥이 유지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알트-라이트’의 우두머리격이자 ‘브레이트바르트’의 편집자인 밀로 이아노폴로스는 ‘알트-라이트’의 주축을 이루는 젊은 누리꾼들에 대해 “트럼프가 이들에게 다시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고 말한다. 그동안 정치에 무관심했던 청년들이 트럼프 덕분에 다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트럼프의 백악관 입성으로 과연 앞으로 ‘알트-라이트’가 얼마나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활동을 할지는 아직 지켜봐야 하는 것이 사실. 하지만 SNS에 여러 개의 ‘알트-라이트’ 계정을 보유하고 있는 이안 데이비스는 “‘알트-라이트’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자유주의자부터 남성운동가, 기독교신자, 전통주의자, 네오나치도 있다”고 말하면서 “내 경우 무슬림 이주민들에 대한 반대 입장으로 이 단체에 가입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렇게 다양한 계층을 폭넓게 수용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백인우월주의 단체인 큐클럭스클랜(KKK)처럼 흰 복면만 쓰지 않았을 뿐 인터넷 뒤에 숨어있는 익명성이 보장된다는 점에서 어쩌면 이들의 움직임은 앞으로 우려하는 것보다 더욱 활발해질지 모른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불안에 떨고 있는 소수인종들…트럼프 당선 이후 증오범죄 급증 지난 14일 미국 시애틀에서 벌어진 반트럼프 시위. 학생들이 ‘Black Lives Matter’(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라는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모두를 위한 대통령이 될 것.” 비록 트럼프가 당선 수락 연설에서 이렇게 밝히긴 했지만 미국 내 소수인종들은 트럼프 당선 후 내내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수천 명이 거리에서 ‘반트럼프 시위’를 벌이고 있는가 하면, 일부 소수집단들은 인종주의자들로부터 심심치 않게 공격을 받고 있다. 실제 트럼프 당선 후 무슬림, 흑인,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한 증오범죄는 급증한 상태. 가령 조지아주의 무슬림 교사는 “히잡으로 목을 매달아 버리겠다”는 협박 쪽지를 받았는가 하면, 미시간대학의 무슬림 학생은 “히잡을 벗지 않으면 불에 태워버리겠다”는 위협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 트럼프 당선 후 미시간의 중학생들은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워라”는 구호를 외쳤으며, 펜실베이니아의 청소년들은 트럼프 사진을 들고 “화이트 파워”라고 외치면서 학교 복도를 행진하기도 했다. 등하교시 혹은 출퇴근시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소수인종들을 위한 ‘동행 서비스’ 사이트도 개설됐다. 뉴욕의 ‘아랍 아메리칸 협회’의 부회장인 카일라 산투수오소가 시작한 이 서비스는 자원봉사 형태로 운영되며, 길거리에서 협박이나 위협을 느끼고 있는 소수인종, 이민자, 성소수자들과 이들을 동행해줄 사람을 연결시켜준다. 현재 이 서비스는 사이트를 개설한지 불과 4일 만에 6255명이 등록을 했을 정도로 호응을 얻고 있다. 또한 남부빈곤법률센터의 회장인 리처드 코헨은 “트럼프 당선 후 인신공격 및 협박 등 증오범죄가 300건가량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물론 모든 사건이 트럼프 당선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단정짓긴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코헨은 “트럼프가 현재 발생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조금은 더 책임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의 과거 발언들이 백인우월주의자들을 자극한 건 사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령 지난 8월, 미국 나치당 대표인 로키 스헤이더는 “트럼프의 승리는 백인우월주의자들과 같은 사람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