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정보사는 채권 회수 전문 회사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은 뒤 돈을 갚지 않는 사람들이나 휴대전화 요금 등을 내지 않은 사람들의 채권을 각 회사에서 싼값에 사들인 뒤 지속적으로 채무자를 독촉해 받은 돈으로 이익을 낸다. KEB하나은행과 SC제일은행을 제외한 시중은행 전체는 신용정보사를 자회사 형태로 두고 있다. 지난해 10월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시중은행 산하 신용정보사 포함 신용정보사는 총 24곳이다.
신용정보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은 약 2만 명에 이른다. 국민 2500명 중 한 명이 속칭 ‘떼인 돈 받아주는 사람’인 셈이다. 문제는 종사자 2만 명 중 절반이 위임직으로 비고용 상태에서 업무를 수행한다는 점이다. 위임직은 일정한 교육을 이수하고 시험에 통과한 뒤 신용정보협회가 부여하는 채권추심원 자격을 가진 개인사업자를 말한다. 고용계약이 없고 4대 보험 대상도 아니며 퇴직금조차 없다.
신용정보사는 개인사업자로 등록된 채권추심원과 6개월마다 위임계약을 맺는다. 은행과 카드사 등이 채권추심을 위임할 때 6~12개월로 위임계약을 맺는 탓이다. 일각에서는 신용정보사의 이런 행태를 고정비 최소화의 일환이라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신용정보사 전직 임원은 “채권물량이 철마다 변동폭이 커 신용정보사는 인건비나 퇴직금 등 고정비 최소화에 혈안이 돼 있다”며 “위임직을 잘 이용하는 게 업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실제 KB신용정보의 경우 2005년 8월 이전에는 위임직 모두 정규직이나 계약직의 업무였으나 같은 해 8월부터 위임직으로 분류했다.
실적에 따라 재계약 여부가 결정되지만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재계약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채권추심원 A 씨는 “잘사는 동네는 실적이 좋을 수밖에 없고 못사는 동네는 그렇지 못한 탓에 실적 기준으로 재계약 여부를 판단하지 않는다. 신용정보사 입장에서는 그냥 어느 정도 할당된 일만 잘 수행하면 쉽게 재계약해준다”고 말했다.
이런 신용정보업계에 미묘한 기운이 감지되기 시작한 건 지난해 7월 대법원이 일부 채권추심원의 근로자성을 인정하고부터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약 3년 동안 농협자산관리회사에서 위임직 채권추심원으로 근무했던 김 아무개 씨(55)가 대법원까지 간 퇴직금 청구 소송에서 승소한 뒤 퇴직금 청구 소송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파악된 채권추심원 관련 퇴직금 청구 소송만 총 156건, 소송자 1192명, 소송가액은 154억 원을 돌파했다.
법원은 신용정보사가 위임직 퇴사자와 위임계약 관계지만 대부분 소에서 위임직의 근로자성을 인정하고 있다. 소취하를 제외하고 종결된 소송 84건 중 85%에 해당하는 72건에서 법원은 위임직에 승소 및 조정·화해 판결을 내리고 신용정보사에 퇴직금 지급을 명했다. 사업자 신분으로 위임 계약을 맺었던 위임직 채권추심원이 근로자성을 인정받은 이유는 업무의 특성 때문이다. 신용정보사 위임직은 기한에 맞춰 구체적인 수행방법을 놓고 관리감독 아래에서 업무를 보며 평가까지 받는 형태가 많았다.
신용정보사 대상 퇴직금 청구소송내역이 담긴 블랙리스트.
문제는 채권추심원의 취업을 방해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며 발생했다. 최근 신한신용정보에서 재계약을 거부당한 B 씨는 재계약이 안 된 이유가 전 직장인 중앙신용정보에 자신이 제기한 퇴직금 청구 소송 내용이 블랙리스트에 올라 신한신용정보로 공급된 탓이라며 고소장을 접수했다.
<일요신문>이 입수한 블랙리스트에는 IBK신용정보(기업은행 계열), 농협자산관리회사, 신한신용정보, 우리신용정보, KB신용정보(국민은행 계열)를 포함 총 16개 신용정보사를 상대로 퇴직금 소송을 벌였던 1011명의 이름 등 소송 정보가 상세히 기록돼 있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소송자는 현재 업계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무직 상태로 나타났다. 일부는 ‘퇴직금 포기각서’ 및 ‘소 부제기 각서’를 작성한 후에야 새 직장과 계약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회사는 전 직원의 새 직장에 연락해 “해당 직원이 소를 취하하지 않을 경우 재계약을 하지 말라”고 부탁한 사실도 추가로 확인됐다. 비슷한 상황에 놓였던 위임직 3명의 녹취록에는 고려, 신한, 중앙, KB, MG, SM 등 신용정보사 인사 담당자들이 “타사에서 공유돼 상부에서 내려온 소송자 리스트가 있다. 소취하하지 않으면 우리와 재계약이 불가능하다”는 식으로 취업을 막아 선 정황이 포함돼 있다. 고소를 취하하고 재취업된 C 씨는 “소송 내역을 전 회사가 알아내 취업을 방해하고 재취업이 힘들게 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일단 생계가 막혀 소송을 취하했지만 이건 너무한 처사”라고 분통을 터트렸다.
특정 세력이 채권추심원의 개인정보를 수집해 취업 방해 수단으로 이용한 사실이 드러날 경우 금융권 전체에 커다란 파장이 예상된다. 특히 개인 정보에 가장 엄격해야 할 은행업계가 개인 정보를 불법적으로 활용하는 데 앞장섰다는 비난에서 피해가기 어려운 상황에 놓했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일단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취업 방해한 혐의로 몇몇 신용정보업체를 압수수색했다. 아직 사태 파악 중이라 자세한 사항은 알려줄 수 없다. 압수수색 결과가 나오고 의혹이 해소되면 따로 해당 내용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겠다”며 즉답을 피했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
또 다른 위임직, 조사원에도 도 넘은 ‘갑질’ 일부 신용정보사는 ‘임대차 조사원’(조사원)이란 직무를 두고 채권추심원과 비슷한 형태의 위임 계약을 맺는다. 조사원은 부동산 담보 대출 요청이 들어오면 실제 대출을 요청한 사람의 해당 부동산 실거주 여부와 임대차 사실 확인을 맡는다. 방문 확인 건당 1만 원가량이 조사원에게 지급된다. 지난 5월 농협이 대주주로 있는 신용정보사 농협자산관리는 담보 확인 뒤 실행된 부동산 대출이 사기로 밝혀지자 조사원에게 손해배상소송을 걸었다. 조사원이 보증보험에 가입돼 있어서 보증보험사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해도 충분했지만 이 신용정보사는 해당 조사원을 상대로 소송을 강행했다. 영업점 실무 책임자는 해당 송사에서 빠졌다. 언론의 비판 수위가 높아지자 해당 업체를 3개월 만인 지난 8월이 돼서야 소송을 취하했다. 일부 금융업계 관계자는 “소송 대응력이 떨어지는 약자에게 피해를 등떠미는 행위”라며 해당 신용정보사를 맹비난했다. 더욱이 이 신용정보사는 소송 제기 전 해당 조사원에게 지난 6년 근무한 퇴직금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송사가 불거지자 차일피일 퇴직금 지급을 미뤘다. 해당 조사원의 동료는 퇴직금을 이미 받은 상태였다. 위임직이라는 형태의 계약 조건을 악용하고 있는 셈이다. 사업자 신분으로 위임계약을 맺었지만 상당수 위임직 종사자들은 근로자성을 인정 받는 추세다. 채권추심업무와 달리 임대차 조사는 기한이 한정돼 있고 부동산 특성상 지역에 따라 구체적인 수행방법이 필요한 탓이다. 일부 업체는 일반 근로자와 같은 조건으로 위임직을 관리감독하며 업무 평가까지 빼놓지 않고 있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실무 책임자를 쏙 뺀 채 위임직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자체가 위임직의 근로자성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며 “계약이 어찌됐든 근로자성이 인정 받을 경우 반드시 퇴직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