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이 대한민국 폐부를 찌르게 된 과정엔 최 씨의 아버지인 최태민 목사가 자리한다. 1975년 초 최태민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육영수 여사 죽음을 위로하는 편지를 보내며 인연이 시작됐다. <우먼센스> 1990년 12월호에 공개된 최태민 인터뷰에서 최 씨는 “75년 초였다. 육영수 여사께서 돌아가신 뒤 이를 위로하는 내용을 편지로 적어 박근혜 당시 이사장에게 보냈다. ‘위로의 말씀을 전하며 기회 있으면 한번 만나주시길 바랍니다’라는 말로 편지의 끝을 맺었다. 그 편지를 본 박근혜 이사장이 불러줘 만나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박근혜 대통령 역시 이런 최태민과의 인연과 관계를 인정했다. 1990년 11월 초 <우먼센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은 “어머니(육영수 여사)께서 돌아가신 뒤 따뜻한 위로 편지를 많이 받았다. 그런 격려 편지를 읽어보고 만나게 된 케이스 중 하나”라고 말했다. 이어 박근혜 대통령은 “80년 직후 기념사업을 시작하려고 할 때 도와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유신 소리만 나와도 욕을 먹던 어려운 시기였는데 선뜻 도와준 사람이 최태민 고문뿐이었다. 참 고맙게 여기고 있다”고 밝혔다.
1975년 3월 첫 만남 이후 최태민은 박근혜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지난 9일 < TV조선>은 최태민의 아들 조순제 씨의 녹취록을 공개하며 박근혜 대통령과 최태민의 관계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고 보도했다. 조순제 씨는 “최태민과 박근혜 대통령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봐야 한다. 최태민이 사흘에 한 번씩은 찾아왔다. 단둘이 독대하는 경우도 많았다. 둘이 들어갔다 하면 나오지 않았다. 밥은 문간에 갖다 놓으면 최태민이 가지고 들어갔다”며 “박근혜 대통령을 가족에게서 떼어놓고 아들인 나도 접근을 못하도록 했다. 혹시 박근혜 대통령을 잡을까 싶어서 날 경계했다. 박 대통령의 친동생인 박근령·지만 씨와 멀어진 것도 최태민의 이간질 때문”이라고 전했다.
최태민과 박근혜의 첫 만남이 이뤄지고 한 달 뒤인 75년 4월 최태민은 구국여성봉사단의 전신인 대한구국선교단을 조직했다. 최태민은 봉사단 총재를 맡았고 박근혜 대통령이 명예총재직을 맡았다. 이때 최순실이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게 된다.
1977년 3월 경로병원 개원식에서 당시 구국여성봉사단 명예총재로 참석했던 박근혜 대통령. 최태민과 함께 테이프를 끊고 있다. 맨 오른쪽은 구자춘 당시 서울시장. (사진 제공 : 우먼센스)
또한 조순제 씨는 “최태민은 1970년대 박근혜 대통령과 구국선교단 활동을 같이 했다. 그 과정에서 박 대통령이 ‘여성 대통령’이자 ‘아시아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정치적 야망을 자극했다. 구국선교단을 기초로 해서 성장하면 여성 대통령이 가능하다고 바람을 넣었다”며 정치 입문에 최태민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1994년 최태민이 사망한 뒤 <우먼센스>와의 인터뷰에서 최순실은 “대학 1학년 때인 1976년에 박근혜 대통령을 처음 봤다. 그때 흥사단에서 행사가 있었는데, 거기 참가한 적이 있다. 직접 만나본 것은 얼마 안 된다. 계속해서 지켜보았는데 참 깨끗한 여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흐트러짐이 없고, 욕심도 없다. 게다가 물러설 줄도 아는 사람이다. 아버님도 같은 생각이셨던 것 같다”고 박근혜 대통령과 만남을 언론에 공개했다.
지난 3일 <고발뉴스>는 최태민과 그의 넷째 부인 사이에서 나온 아들 최재석 씨의 인터뷰를 담았다. 이 인터뷰에 따르면 최태민은 훨씬 오래전부터 이런 시나리오를 구상에 둔 것으로 보인다. 최재석 씨는 “부친은 1963년 당시 공화당 서대문구 위원장을 맡아 정치활동을 하고 있었다. 육영수 여사가 살아 있을 때도 박정희 전 대통령과 친분으로 두 번 정도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실제 10·26 직후 합동수사본부가 만든 최태민의 이력 조서에는 최태민이 1963년 5월에 공화당 중앙위원을 지낸 것으로 나와있다.
이뿐만 아니다. 지난달 26일 <TV조선>과 지난 1일 <CBS> 등에서 박근령 씨의 남편 신동욱 공화당 총재는 “최태민은 육영수 여사가 살아있을 때부터 박근혜 대통령에게 접근을 시도했다. 육 여사는 이런 최태민의 시도를 포착하자 어린 박근혜 대통령에게 ‘이런 사람들을 굉장히 조심해야 된다’고 주의를 주기도 했다”고 아내 박근령 씨의 말을 전했다. 이어 신 총재는 “최태민과 최순실은 추울 때 바람막이로 다가왔다가 어느새 피부가 돼버렸다”며 “최태민이 박근혜 대통령의 재단 관련 업무에 지나치게 개입하자 당시 박근령 씨는 ‘최태민 씨를 내보내야 한다’고 충고했지만 박 대통령은 ‘최태민을 언급하면 천벌 받는다’며 그를 감쌌다”고 밝혔다.
계획적인 최씨 일가의 업무 개입은 박근혜 대통령의 모든 활동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최태민 역시 “나는 박근혜 이사장의 자문 역할을 하긴 했다. 박근혜 (당시 육영재단) 이사장은 나와 의논할 일이 생기면 부정기적으로 찾아왔다”고 밝히며 이런 관계를 인정했다.
이와 같은 비정상적인 관계가 지속되자 박근령·지만 씨는 1990년 노태우 대통령에게 “박근혜 대통령에게서 이들을 떼어내 달라”는 내용의 탄원서까지 썼다. 탄원서에는 “최태민은 박정희 전 대통령 유족을 중심으로 마련된 각종 육영사업, 장학재단, 문화재단 등 추모사업체에 깊숙이 관여했다. 회계장부를 교묘하게 조작한 뒤 많은 재산을 착취했다. 지금은 서울 강남 및 전국에 걸쳐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고 썼다. 실제로 최태민 일가는 1983년 이후 수백억 원대 부동산을 매입했다.
부동산뿐만 아니라는 증언도 추가됐다. <고발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최재석 씨는 “당시 자택에는 별도의 내실로 향하는 비밀 통로가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자택을 방문할 때마다 최태민과 함께 내실에 들어가 둘이서만 머물렀다”는 증언으로 포문을 연 뒤 최태민의 재산 규모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최 씨는 “최태민의 서울 역삼동 자택은 약 990㎡(약 200평) 규모로 부인 임순이와 최순실 등이 거주했다. 자택 안에는 비밀 아지트도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빈번하게 방문했던 이 장소에는 금은보화로 가득 찬 창고도 자리했다”며 “비밀 아지트는 26.4㎡(약 8평) 정도였다. 한 면을 채운 금고 철문만 약 13.2㎡(약 4평) 규모였다. 금고 안에는 수백억대 양도성 예금증서와 골드 바 같은 귀금속, 수천억 원대 땅문서 등이 가득했다. 자택 지하 330㎡(약 100평) 규모 지하실에는 한 점에 수백에서 수천만 원을 호가하던 운보의 작품 등 명화 400여 점이 보관됐다”고 일렀다. 또한 “재산의 상당부분이 현금화돼 해외로 빠져나갔으며 나머지 동산은 구리 쪽에 있는 최씨 일가의 안가에 묻혀있는 걸로 안다”고 덧붙였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
왜 아무도 최태민을 막지 못했나 JP “뒷조사 지시에 박근혜가 울며불며…” 최태민을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한 번 있었다. 지난 1977년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최태민은 잡아들였다.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최태민을 직접 조사했다. 하지만 기소 중지되거나 불기소 등으로 처리됐다. 그 이유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으로 설명 가능하다. 김 전총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최태민 수사를 지시했다. 이를 알게 된 박근혜 대통령이 김재규 전 부장에게 ‘왜 최태민을 조사하냐’ 묻자 김 전 부장은 ‘아버지가 조사를 지시한 것’이라고 답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맘대로 해보라’며 고함을 지르고 야단을 쳤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찾아가 울고불고 난리를 부렸다”고 밝혔다. 김 전 총리는 이어 “박정희 전 대통령은 약한 사람이었다. 박근혜 대통령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최태민이란 반 미친놈이랑 자기 방에 들어가서 밖에 나오지도 않았는데 제 아버지, 어머니 말도 안 들었다”며 “육영수 여사가 본래 이미지와 달리 이중적 모습이 많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육 여사를 빼 닮았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 가능성에 대해 김 전 총리는 “그럴 일 없을 것”이라며 가능성을 일축했다. “박근혜라는 여자는 국민 전부가 청와대 앞에 모여 내려오라고 해도 절대 내려갈 사람이 아니다. 엄청난 고집을 자기 아버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박근혜다. 절대 그만두지 않는다. 무슨 짓을 하든 그 고집이 그렇다.” [최] |